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정석원을 동물에 비유하면, 골든 레트리버 같다. 물론 각 잡힌 어깨가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다부진 몸집을 보면 같은 대형견인 도베르만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선입견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는 선한 눈매와 웃을 때 드러나는 팔자주름 위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개구진 표정. 그리고 말로는 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듯 끊임없이 손짓과 동작을 보여주는 이 남자는, 당장이라도 달려 와 안길 듯 붙임성 좋은 목양견을 닮았다.

“힘 있고, 강한 느낌을 주는” 정석원의 단단한 외형적 조건은 무술 감독을 꿈꾸던 해병대 출신 청년에게 액션 배우가 되는 지름길을 열어 주었다. 동시에 “주인공들은 대부분 키가 크니까, 키 큰 제가 선배님들보다 빨리 일을 많이 했”던 그를 향한 주위의 시기 어린 시선도 있었다. 결국 “세계 최고의 무술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찾았던 서울액션스쿨을 나온 정석원은 우연히 같은 해병대 출신의 기획사 대표와 연이 닿았다. 그리고 화면에 몸짓만이 아닌 표정을 내보일 수 있게 된 그는 액션 너머의 세계로 날아올라야 했다. 높이, 멀리 뛰기 위해선 단련된 근육의 도움닫기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해 온 운동은 SBS 에서 “다리에 알이 배겼고 워낙 벌어져서 툭툭 털면서 걷는” 운동선수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말도 많고 장난도 치고, 덜렁거리고 실수도 많이 하는” 의외의 성격은 KBS2 의 김제하가 천연덕스럽고 유머러스한 남자로 그려지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운동할 때 하루 쉬면 삼 일치가 없어진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정석원에게는 연기와 운동은 닮았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분석이란 걸 몰랐던” 그에게 대본을 읽고 파악하는 과정은 “벤치 프레스를 몇 백 개 드는 것보다 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몸을 충분히 풀지 않고, 이전의 단계를 충분히 익혀두지 않으면 “100% 다치는 발차기”처럼, 감정을 쌓고 준비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창피하고 다치”는 것은 물론 “시청자도 실망하고” 다친다는 걸, 이제 정석원은 안다. 다치지 않고, 다치게 하지 않으며 운동을 하기 위해선 적절한 근육이 필요하다. 연기도 그렇다. 그래서 정석원이 목소리 높이며 신나게 소개한 이 영화들은 그에게 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이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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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runken Master 2)
1994년 | 유가량
“원래 액션 영화를 되게 좋아했어요. 성룡, 이연걸, 견자단, 쟝-끌로드 반담 나오는 액션 영화는 거의 다 봤어요. 그 중에서도 제일 재밌게 봤고, 정말 충격을 받은 영화가 에요. 이 영화의 액션은, 그 합은, 지금도 나오기 힘들어요. 너무 대단하고 완벽해요. 성룡의 연기와 주먹 하나에 사연과 감정이 있어요. 정말 소울이 있는 액션이에요. 술이 없으니까 공업용 알코올을 마시고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싸우는 그 장면은 진짜 많이 봐서 비디오테이프에 그 부분은 소리가 안 나올 정도예요. 아아아! 보시면 아실 거예요, 그 전율!”

1994년 를 홍보하기 위해 내한한 성룡은 언론 인터뷰에서 “관객이 돈을 내며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스턴트맨이 아닌 성룡의 연기죠. 그래서 저는 제 작품에 대역을 쓰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성룡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1979) 이후 15년 만에 찍은 는 몸을 사리지 않는 그의 연기 철학이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이자 홍콩 액션 영화의 고전이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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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Last Samurai)
2003년 | 에드워드 즈윅
“저는 이 영화가 ‘액션의 교과서’라고 생각해요. 서울액션스쿨에 있을 때 사람들과 함께 굉장히 많이 봤어요. 한 100번은 본 것 같아요. 액션은 물론 영상도 정말 멋있어요. 그리고 부자지간이지만 사무라이라서 계급이 분명하게 나눠져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와요. 아버지가 감정을 숨기다가 어느 순간 드러내는데 엄청 감동적이에요. 아, 톰 크루즈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되게 나이 든 할아버지도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어요. 실제로 스턴트맨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칼로 한 번 싹 베는데도 그 에너지가 확! 전해져요.”

는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지금의 자신을 만들고 지탱했던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 것에 좌절한 남자들의 이야기다. 조국과 명예를 위해 전장에 나섰던 네이든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와 국가와 황제에 목숨을 건 충성을 바쳤던 사무라이의 마지막 지도자 카츠모토(와타나베 켄)는 동서양의 충돌하는 두 세계 속에서, 그리고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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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unflower)
2006년 | 강석범
“원래 반전이 있는 캐릭터나 영화를 좋아해요. 는 군대에서 봤는데 진짜 재미있었어요. 태식(김래원)이 굉장히 어눌하고 순박하게 구는데 저 사람이 왜 감옥에 갔을까 궁금증이 생기는 거예요. 학생들한테 맞다가 문신이 딱 드러나는데 그게 너무 멋있는 거예요. 저 사람, 뭔가 사연이 있겠구나! 싶었죠. 나중에 태식이 술 먹고 (성대모사하며) “내가”라고 소리치는데 소름이 막 돋았어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좌절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잘못은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죄는 만회하기 너무 어려울 때도 있다. 는 세상이 ‘미친 개’라 부르는 태식과 그를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는 덕자(김해숙)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꿈꾸는 것을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를 말하는 영화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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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Bungee Jumping Of Their Own)
2000년 | 김대승
“예전에 봤던 영화인데 최근 다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사실 때 저랑 (정)겨운이 형이랑 박지헌 역을 놓고 경쟁했었거든요. 그 때 감독님이 이병헌 선배님 같은 연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를 다시 봤는데 예전에 미처 보지 못 했던 것들까지 보이는데 정말 신선하고 재밌더라구요. 표정으로 희로애락을 다 표현하는 이병헌 선배님 연기는, 정말, 어우! 말도 안 되게 대단했구요.”

번지 점프가 두려운 건 비단 그 높이 때문만은 아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놓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용기를 가졌냐고 묻기 때문이다. 는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당신이 말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한 남자의 운명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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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White Fang)
1991년 | 랜달 크레이저
“외가 친척들이 외국에 많이 계셔서 명절에 모일 때면 디즈니 같은 외국 영화를 많이 사다 주셨거든요. 이나 도 한국에 나오기도 전에 되게 어렸을 때 봤어요. 도 그 때 본 영화인데, 어린 저한테 이 영화의 영상이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늑대와 주인공의 관계, 그들이 나누는 감정을 보면서 ‘아, 정말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구요.”

에단 호크가 아역 시절 출연한 영화 는 그가 연기한 소년 잭이 우연히 설원에서 어미를 여읜 새끼 늑대와 친구가 되는 이야기다. 잭 역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했기에 그와 늑대는 서로에게 아버지이고 자식이었다. 동물을 다루고 있음에도, 잭이 곰의 위협을 받는 장면이나 투견 장면 등 사실적인 영상이 인상적이다.
정석원│연기의 근육을 키워준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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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저 되게 노력파에요”라고 말하는 정석원의 쑥스럽지만 자신 있는 표정이 미더운 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정말 열심히 하고, 그것을 통해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이다. 해병대에서 “더운 날 땡볕 아래에서 PT 체조 몇 천 번을 하고, 오리발 끼고 4km를 뛰는” 육체와 정신의 단련을 버텼던 그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이거 맛있었지? 근데 이게 무슨 맛이었어? 라고 3개월 동안 똑같은 말을 계속 묻는” 어렵고 지리한 캐릭터 분석을 경험하며 연기의 근육을 단련했다. 물론 “미치는 줄 알았을 정도”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 악물고 힘겹게 들어 올린 벤치 프레스가 멋지고 강한 팔 근육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앞으로의 배우 생활에 유용한 자산을 얻은 시간이기도 했다. “머릿결은 생머리일까 반곱슬일까. 자주 입는 옷은 뭘까, 자주 가는 곳은 어디일까”까지 감독님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만들어갔던 속 이우상은, 마흔 살 여자 혜정(장서희)의 잊은 줄 알았던 욕망을 일깨워주었다.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는 수트가 잘 어울리는 단단한 몸집 뒤에 물러서 있던 정석원의 설익어서 유혹적인 가능성도 보여주었다. 유난히 우월한 탓에 늘 몸의 실루엣으로 먼저 기억되었던 배우 정석원의 얼굴이 점점 눈앞에 선명해진다고 느낀다면, 이는 그가 단단한 배우가 되기 위해 묵묵히 연기의 근육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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