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언제나 주인공 곁에서 도움을 줬던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일종의 조력자 역할을 맡을 때마다 그의 어깨는 든든했고 깊은 눈은 가늠하기 어려운 많은 감정을 담아냈다. 배우 배수빈이 그 풍부한 필모그래피 안에서 바람둥이(<걸프렌즈>)부터 복수의 화신(<천사의 유혹>)까지 다양한 역할을 보여줬음에도 편안한 미소로 누군가를 지켜주는 믿음직한 남자로 기억되는 건 그래서다.

물론 그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놓은 캐릭터는 MBC <주몽>의 중성적 인물 사용이었지만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배우 배수빈에 대한 관심을 만들어냈던 건 SBS <바람의 화원> 속 정조였다. 이 작품에서 화원 김홍도와 신윤복의 후원자 역할을 한 그는 깊은 눈을 전투적으로 부릅뜨고 정적을 물리치는 강인한 남성으로서의 정조를 보여주며 MBC <이산>이나 KBS <한성별곡-正>에 등장했던 정조와는 다른 배수빈만의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2009년 상반기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인 SBS <찬란한 유산>의 준세는 사실 여자주인공의 곁을 지키다 결국 진짜 남자주인공과의 사랑을 빌어주는 수많은 서브 남자주인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편안한 미소로 은성(한효주)의 지원군이 되는 동시에 장숙자 사장의 해임안을 앞두고 옳은 선택을 위해 갈등하는 준세의 올곧은 매력이 아니었다면 환(이승기), 은성, 준세의 멜로 라인이 그토록 팽팽하게 유지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비록 막장드라마라는 오명을 듣기도 했지만 SBS <천사의 유혹>에서 재희(홍수현)가 재성을 부르는 호칭이 ‘키다리 아저씨’라는 건 흥미로운 우연이다.

최근 MBC <동이>에서 역시 주인공 동이(한효주)의 든든한 조력자인 차천수 역할을 맡게 된 그가 추천해준 따뜻한 봄날, 여행가며 듣기 좋은 음악은 그래서 그를 닮았다. 비록 전면에 나서진 않지만 후위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배경음악 같은 이 남자의 추천곡과 함께라면 혼자 가는 여행도 결코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1. Marvin Gaye의 < What`s Going On >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은 흑인 음악 특유의 그루브감이 있는 곡이에요. 그래서 드라이브를 하며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햇빛 좋은 봄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틀어보길 추천할게요. 사실 마빈 게이라는 뮤지션 자체가 좀 옛날 사람이지만 음악은 지금 들어도 참 세련됐어요.” 한국 최고의 뮤지션 조용필 역시 “그냥 황홀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평할 정도로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은 마빈 게이의 전체 디스코그래피 안에서도 탁월한 리듬 감각과 기교를 자제하되 가슴을 울리는 보컬이 유독 빛나는 곡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피폐해져 가는 미국 사회에 대해 ‘What`s Going On’(어찌 되어가는 거지?)라고 묻는 날 선 시대정신 역시 이 곡의 위대함을 더한다.



2. 딜라이트(Delight)의 <커피 가리나 1호점 (Blue Lemonade)>
배수빈이 두 번째로 추천한 곡은 제목부터 여행이라는 주제와 어울리는 딜라이트의 ‘Picnic’이다. “처음 시작하는 연인들의 설렘을 가사와 멜로디로 풀어놓는 음악이에요. 상큼한 여자 보컬의 목소리와 객원 랩퍼로 참여한 버벌진트의 랩이 더해져 우울할 때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개인적으로 페퍼톤스처럼 상큼한 음악이 봄날의 BGM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비슷한 의미로 ‘Picnic’을 추천하고 싶어요.” 딜라이트가 가리나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 맑고 청량한 느낌의 보컬 유미를 영입해 만든 싱글 <커피 가리나 1호점 (Blue Lemonade)>의 타이틀곡이다. 연애 초기, 둘만의 주말 소풍을 위해 김밥을 준비하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는 여성 화자의 상기된 감정이 직설적이고 꾸밈없이 표현된다. 특히 반복되는 구절인 ‘불어라 바람 아마도 사랑’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유미의 보이시한 음성은 곡의 상쾌함을 이루는 중요 포인트다.



3. Jason Mraz의 < Mr. A-Z >
“대중들 모두가 좋아하는 곡” 배수빈은 제이슨 므라즈의 ‘Geek In The Pink’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씨앤블루의 정용화가 MBC <라디오 스타>에서 불러 다시금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Geek In The Pink’를 아이돌 추천으로 유명해진 음악으로 분류하는 건 억울한 일이다. < Mr. A-Z >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그만큼 꼭 제이슨 므라즈의 팬이 아니라 해도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인지도를 자랑한다. “여행 갈 때는 아무래도 신나고 조금은 달리는 느낌의 곡이 좋잖아요. 여행은 밝고 ‘업’된 기분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추천하고 싶어요. 워낙 제이슨 므라즈의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제이슨 므라즈의 곡 중에서도 자미로콰이를 연상시키는 그루브가 돋보이는 말 그대로 신나는 넘버다.



4.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
“사실 이 선곡을 조금 의외라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우울하거나 조금 처졌을 때 듣는 게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거든요. 앞서 소개한 곡들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죠. 하지만 그 특유의 나른함이 햇살 좋은 봄의 오후와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차분히 햇살과 정적을 즐기고 싶을 때 좋은 음악이라 할 수 있겠죠.” 나른함. 이 말만큼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잘 수식하는 표현이 있을까. 특히 배수빈이 추천한 타이틀곡 ‘아름다운 것’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해 절절하기보단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이석원의 보컬과 강렬하기보단 공명감을 살린 기타 스트로크는 잔잔함 안에서 얼마나 풍부한 감정의 진폭이 가능한지 증명한다.



5. Maroon 5의 < Songs About Jane >
“마룬 5의 ‘Sunday Morning’은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BGM이에요. 이 곡을 들으며 눈을 뜨면 오늘 하루 어디 가서 어떤 시간을 보낼까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되죠. 사실 여행이란 가는 것만큼이나 가기 전의 설렘이 소중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 곡을 추천하고 싶어요.” 마빈 게이와 제이슨 므라즈, 그리고 마룬 5까지 배수빈은 리듬감이 좋은 곡을 많이 추천한 편인데 이 곡 ‘Sunday Morning’ 역시 모던록의 연주에 펑키한 그루브를 섞어 한바탕 몸을 들썩이게 한다. 여기에 팝 록 밴드라는 호칭답게 다분히 대중적인 멜로디는 처음 곡을 듣는 사람도 쉽게 팬으로 포섭할만한 것이다. 사실 그것이 마룬 5 최대의 장점이겠지만.




“<대장금>으로 치면 민정호 종사관이죠.” 배수빈의 말대로 그가 <동이>에서 연기하는 차천수는 말하자면 그가 종종 보여준 바 있는 멋있는 조력자의 매력을 대놓고 극대화한 캐릭터다. 뛰어난 검술로서 도망 노비들을 돕는 검계의 중요 간부이자 앞으로 친구의 동생인 동이(한효주)의 수호자가 되어줄 이 캐릭터를 통해 그가 기대하는 바가 궁금한 건 그래서다. “시놉시스 상 멋있는 역할이라도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멋이 결정되는 거 같아요. 진실하게 연기해서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정도에 따라 대중의 리액션은 달라지죠.” 그러고 보면 정조도, 준세도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정말 멋질 수 있었던 건, 배수빈이라는 배우가 그 멋진 설정에 묻어가지 않고 자신만의 남자다운 매력을 덧입혔기에 가능했었다. 그의 눈빛과 미소로 완성될 차천수는 과연 드라마 속 수호천사의 계보에 어떤 독보적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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