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이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자들은 모두 죽거나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에 비해 조금이라도 나아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백골이 되거나 부재한 자들의 덕분이기도 하다. KBS 에서도 도망노비와 그를 잡기 위한 추노꾼의 추격은 어느새 새 시대를 향한 열망과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각축장으로 확대됐다. 격이 다른 영상과 현재를 반영한 질문들로 우리를 가슴 떨리게 했던 는 이제 단 2회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 그동안 끝없이 확장됐던 사연들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강명석, 위근우 기자가 그동안의 를 돌아보았다. /편집자주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시대적인 선후가 바뀌어 있지만, KBS 는 곽정환 감독의 전작 KBS 의 뒷얘기처럼 보인다. 에서 정조의 죽음과 함께 온 조선의 몰락은 사는 게 지옥 같은 의 인조 시대가 됐다. 에서 세 남녀는 ‘正’을 찾아 궁으로 들어갔지만, 의 세 남녀는 저자 거리를 헤맨다. 시대의 ‘正’을 찾으려 왕과 신하가 논쟁하던 시대가 지나고, 모두가 지옥 같은 저자거리를 맨 몸으로 부딪친다. 대길(장혁)이 개장수언니(이대연)와 나눈 대화는 곧 의 시대정신이다. 길은 없다. 길을 찾는 것이 곧 길이다. 그것은 추노꾼 대길과 엘리트 무관 태하(오지호), 노비 업복(공형진)의 입장 중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는 각자의 길을 찾아 분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대길과 태하, 업복은 사적으로는 원수지간에 가깝지만,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얻으려면 뜻을 모아야 한다. 의 기이한 공과는 여기서 비롯된다.
수컷들의 연대가 할 수 있는 것 vs <추노>│이명박 시대로부터의 탈주" />는 계급의 연대라는 가장 정치적인 문제를 ‘수컷’의 연대라는 가장 본능적인 문제로 풀이한다. 대길과 태하는 22회가 되도록 정치적 견해를 좁히지 못하지만, 수컷의 정서를 공유하기에 철웅(이종혁)과 함께 맞선다. 그들은 동료를 목숨처럼 아끼고, 고문을 당하면서 육체적 고통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열며, 여자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줄 안다. 언년(이다해)이 이른바 ‘민폐 언년’이 된 건 언년의 잘못이 아니다. 는 설화(김하은)가 언년 때문에 우는 대길을 보며 “남자가 그렇게 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세상에 그런 남자는 없을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도 100% 수컷을 추종하는 세계다. 여자를 이해는 못해도 지켜주기는 하고, 아무리 빌어먹을 추노꾼도 여자와 아이는 보호하는 세계.
그래서 는 보다 스타일은 진화하되 담론은 정지했다. 계급과 입장이 다른 남자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연대의 가능성을 찾는 과정에서 는 남자들의 대립과 연대가 가진 원초적인 두근거림을 시각화 한다. 굵은 힘줄을 가진 남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는 모습은 남성 에너지의 극단이다. 그러나 그들의 연대는 수컷들이 그 외의 인물들과 유리되는 과정이다. 태하는 조선비(최덕문)처럼 동지들을 저버리는 자와 한 길에 설 수 없고, 대길이 여자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짝귀(안길강)같은 동지의 힘을 빌려 그들을 보호하는 정도다. 는 시대의 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드라마가 아니라 길 찾기에 실패한 남자의 자기 고백처럼 들린다. 남자들의 뜻이 모였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이 노무현 시대에 대한 성찰이었다면, 는 이명박 시대로부터의 탈주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임재범의 목소리처럼 비장미를 가득 품은 채 죽는 순간까지 싸우는 것뿐이다.
남자들이 사라진 뒤 남은 이들이 만들어갈 이야기
가 후반으로 갈수록 조선시대의 총체적인 삶이나 정치적 담론대신 액션 신이 길어지는 건 갈수록 빠듯해진 제작시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는 이것이 ‘수컷의 몰락’이라는 걸 자각한다. 에서 남성다움이 가장 강조되지 않은 곳은 업복이를 중심으로한 노비들과 저자거리의 남자들이었다. 노비들의 세계에는 총쏘기에 겁을 내는 남자들이 있고, 초복(민지아) 처럼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여자가 있다. 또한 저자거리에서 작은 권력을 휘두르는 오포교(이한위)와 싸우지는 못하지만 비굴한 웃음과 뇌물로라도 주막의 여자들을 지키는 방화백(안석환)이 대길과 태하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할 이유는 없다. 가 태하와 방화백이 상징하는 남자들의 삶에 대한 균형을 잡아냈다면 시각적 스타일과 시대 담론도 균형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는 남은 2회가 중요하다. 맨 몸으로 시대와 부딪쳐 길을 찾던 100% 남자들은 점점 사라진다. 남은 건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남자들과 ‘장군’없이 살아야 하는 여자들이다. 는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의 가치와 희망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까. 곽정환 감독의 길 역시 거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그는 거장의 잠재력을 가진 천재일까, 보다 정치적으로 공정하고 지적인 ‘100% 남자’ 스타일리스트일까.
글 강명석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지 말거라. 그 열망이 욕망으로 바뀌지 않는 사람을, 내 본 적이 없거늘.” 태하(오지호)를 고문하던 철웅(이종혁)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사사로운 욕심으로 보지 말라는 태하의 항변에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현재까지 KBS 에서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반정을 꿈꾸던 조선비(최덕문)는 현실 정치 안에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과거의 동료들을 팔아 넘겼고, 봉림대군(이준)은 왕위 승계를 위해 조카 석견(김진우)의 위험을 외면한다. 물론 태하는 여전히 정의롭고, 한섬(조진웅)은 의로운 죽음을 택하지만 그들은 단 2회 분량을 남겨놓은 지금까지 결국 권력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했다. 권력은 정의롭지 못하고 정의는 권력을 잡지 못한다. 철웅의 냉소가 현실화되면서 는 극의 전반부를 지배하던 치열함을 잃고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진다.글. 강명석 two@10asia.co.kr
신념이 거쳐야하는 통과의례의 유예가 남긴 것 vs <추노>│이명박 시대로부터의 탈주" />초기 에서 추격전의 세 꼭짓점이었던 대길과 태하, 철웅은 모두 목적하는 바가 뚜렷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 목적과 수단의 괴리가 없기에 그들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었고, 그것은 스토리 진행에 질주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갈등 구조에 불꽃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작 그토록 쫓고 바라던 것이 눈앞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주저한다. 단기적으로는 태하를, 평생을 걸어 언년이(이다해)를 쫓던 대길은 정작 그 둘의 은신처를 찾자 태하를 잡고 언년이와 행복하게 해후하는 것이 동시에 이뤄질 수 없어 추격을 중단하고, 소현세자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하는 태하는 미래의 청사진도 없이 성급하게 이뤄지는 반정에 동의하지 못한다. 오직 태하와 좌의정(김응수)에 대한 콤플렉스를 칼로서 극복하던 철웅만이 거침없이 학살극을 벌일 뿐이다.
하지만 약간은 맥 풀리는 이들의 주저함은 신념, 혹은 꿈을 현실이라는 토대에서 펼치기 위해 한 번은 거쳐야할 통과의례와도 같다. 좋은 일을 위해 나쁜 놈과 손잡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업복이(공형진)의 고민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얽힌 현실의 관계망 안에서 목적은 종종 그 수단과 괴리된다. 단순히 칼을 드는 것으로서 넘을 수 없는 이 진흙탕 안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한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인가. 후반부 가 무기력해지는 건 대길과 태하, 업복이의 내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길은 등 따습고 배부르게 안돈하는 게 제일이라며 문제를 외면하고, 태하는 현실 정치 안에서 소현세자의 뜻을 펼치는 것보다는 석견을 지켜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 업복이는 주저하며 생포된 동료를 쏘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판단인지 ‘그 분’(박기웅)의 뜻에 무비판적으로 따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싸우지만 이 싸움은 신념을 위한 일보전진의 시도가 아닌, 타락하지 않은 주인공들이 인조(김갑수)와 좌의정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검은 손길을 피하는 발버둥으로 축소된다.
의 무기력증을 경계함
권력이 쟁취해야 할 대상이 아닌 거부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 되는 순간 다시 한 번 증명되는 것은 권력의 속성에 대한 철웅의 냉소다. 물론 그 불신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비가 변절하는 과정과 ‘그 분’이 대의를 위해 주위의 작은 불의를 무시하는 모습, 저자의 일원인척 하던 오포교(이한위)가 한 줌 권력으로 부리는 횡포처럼 는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권력의 타락상을 재현해낸다. 하지만 재현만으로는, 그리고 냉소만으로는 어떤 미래도 만들지 못한다. 중요한 건 그 너머다. 태하와 업복이가 꾸었던 불가능한 꿈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일회적 몽상이 될 것인가, 태하의 바람처럼 견고한 여울의 귀퉁이를 허물 한 줄기 급류가 되어 제2, 제3의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 이제 2회가 남은 이 드라마가 제시할 전망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현재 가 빠진 무기력증이 현실 정치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글 위근우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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