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3일 방송된 EBS 는 새벽에 일어난 지진 같은 방송이었다. 모두 깊이 잠들어 기척을 느낀 사람은 적을 지라도 그 현장을 목도한 사람에게 그것은 오래오래 기억될 정도의 큰 진동이었다. 대상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게 만드는 새로운 화법과 바퀴벌레라는 혐오스러운 대상을 묵묵히 관찰하게 만드는 특별한 영상미는 한국 방송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한 뼘 넓혔으며, 채널에 대한 기대치를 훌쩍 키웠다. 올 한해 바퀴들과 함께 지내면서 “잘 보면 바퀴의 얼굴이 메뚜기를 닮아 착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문동현 PD를 만나자 궁금증이 바퀴 떼처럼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부터 까지 언제나 다큐멘터리 속에 예상치 못한 부비트랩을 숨겨 놓는 그의 답변들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되짚어 볼 대목이 많았다.

거두절미하고 묻겠다. 대체, 왜 바퀴 벌레를 주제로 선택한 것인가?
문동현 PD
: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방송을 만드는 입장에서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기가 조심스럽지만, 솔직히 영화 를 보고 비슷한 분위기의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한계 때문에 느와르의 느낌을 접목시키기가 어렵더라. 고민하던 중에 3년에 전에 생각 했던 아이템 중에 바퀴벌레가 이 장르에 어울리겠구나 싶었다.

“실제 사오백 마리 이상의 바퀴를 사육했다”
문동현 PD│“바퀴벌레는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와 닮았다”
문동현 PD│“바퀴벌레는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와 닮았다”
3년 전에는 그럼, 왜 바퀴를?
문동현 PD
: 2007년 말에 을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PD 17명을 뽑아서 두 달 정도 합숙을 시켰었다. 매일 과제하듯이 아이템을 3개씩 내고 경쟁하듯이 걸렀는데, 그때 냈던 아이디어 중에 바퀴벌레가 있었다.

도 어울리지만, 개인적으로는 가 연상되는 장면들도 있었다. 보통 다큐멘터리와 달리 그림자를 사용한 미장센들이 많았기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화면이 영화적인 느낌이 강했다.
문동현 PD
: 사실 바퀴는 피사체가 작기 때문에 조명이나 그림자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그렇지만 나도 그렇고, 고승우 촬영 감독이 그런 표현들을 워낙 좋아한다. 그림자가 주는 은유적인 느낌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전체적으로 ‘경계’라는 단어가 많이 쓰였는데, 그 경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바퀴를 걸고 오버 숄더 샷이 많았다. 인간 세계에서 오는 조명에 바퀴가 투사되는 장면도 많았기 때문에 그림자 사용은 불가피 했다.

기술적인 부분 말고도 바퀴를 촬영하는 일 자체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문동현 PD
: 보시면 알겠지만 야생 상태의 개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한 컷 한 컷 다 세트 안에서 만들어 낸 그림이다. 그래서 실제로 4월부터 방제 연구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바퀴벌레를 사육 했다. 사오백 마리 이상이었을 거다. 냄새가 좀 독한 것을 빼면 바퀴벌레를 만지는 일에는 금방 적응을 했는데, 찍다 보면 얘들이 자꾸 도망가는 바람에 고생을 좀 했다. 게다가 그냥 기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바퀴가 와서 프레임 안에 서서 3초 정도 더듬이를 닦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나간다’는 식의 콘티이기 때문에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서는 수십 번 찍어야 했다. 촬영 내내 “잡아! 도망간다!”하는 소리가 난무해서 현장 음은 거의 쓸 수가 없었다. (웃음)

특히 바퀴가 날아가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원하는 동작을 얻어내는 노하우가 있나?
문동현 PD
: 바퀴에게 최적의 온도는 29도 정도다. 더울수록 활발해 진다. 여름에 촬영을 했고, 조명을 치면 자연스럽게 더운 상태가 만들어 져서 바퀴들이 움직임이 좋았다. 그럴 때 턱에 걸리거나 놀라게 하면 뛰면서 날아오른다. 그림 상으로 그 모습이 멋있겠다 싶어서 그 부분에 주목을 했고, 일부러 스토리에 많이 넣으려고 했다.

“바퀴의 입을 빌려서 인간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문동현 PD│“바퀴벌레는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와 닮았다”
문동현 PD│“바퀴벌레는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와 닮았다”
1편에서 날아 오른 바퀴가 사람의 얼굴에 부딪히는 장면은 인터넷에서도 화제더라.
문동현 PD
: 그러게. 그런 걸 좋아들 하시네. (웃음) 원래는 카메라를 2인칭 앵글로 해서 눈 사이로 바퀴가 쭈욱 가서 탁 붙는 그림을 원했는데 포커스 문제도 있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 그래서 콘티를 변경 했는데 연기자 분이 굉장히 프로페셔널 해서 몸을 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NG는 한번 났고, 두 번째 테이크에 바로 OK가 났다.

그 대목은 비주얼적인 충격뿐 아니라 이야기적으로도 클라이막스였다. 다큐멘터리 안에서 드라마를 보여주는 시도는 작년 에서 시작된 것 같은데, 보통의 트루기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문동현 PD
: 를 할 때도 이건 일종의 실험이라는 생각으로 시도를 했었다. 다행히 내부적으로 반응이 좋아서 때는 드라마를 좀 더 섞어서 깊이 있게 만들어 보려고 한 거고. 다큐멘터리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자연 다큐는 정해진 문법이 있다. 이것을 편하게 느끼는 시청자들도 있지만 식상해 하는 분들도 많다. 시청자의 트렌드와 기호가 변하는데 왜 다큐는 제자리걸음일까. 나는 그대로 하는 게 좀 싫었다. 그래서 정보를 구성하기 보다는 스토리로 만들어서 전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 사람들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오래 기억하고, 감상이 남는 법이니까. 2001년에 를 할 때도 생태를 전달하는 게 아니고 여왕개미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 가는 과정을 보여줬는데 그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바로 그 지점이다. 도 도 다큐멘터리답지 않은 문학성이 내제되어 있다. 혹시, 문학을 전공했나?
문동현 PD
: 국어 교육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만날 공차고 있어서 체육 교육과라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웃음)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런 걸 좋아하는 거겠지. 문학적인 어떤 느낌. 성찰하는 자세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는 한반도의 멸종 동물을 리스트업 하는 대신 그런 접근을 한 것이었나? 외국 다큐멘터리를 더빙한 것 같은 전혀 새로운 느낌이 있는 작품이었다.
문동현 PD
: 그런 리플이 실제로 많았다. 외화인 줄 알고 사람들이 덜 봤다고, 내부에서 농담처럼 핀잔을 듣기도 했고. (웃음) 다큐를 만드는 목적에 있어서 어쨌든 정보가 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도 발달을 했고, 책도 있고, 여러 매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다. 방송은 문제를 제기하고 관심을 갖게끔 만드는 게 역할인 것 같다. 그리고 멸종에 대해서는 인간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한번 쯤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은 입장 바꿔보기에 대한 작업들이다. 그걸로 그 많은 갈등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출발점은 되겠지.

에서 특히 그런 의도가 성공적으로 보였다. 바퀴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더라.
문동현 PD
: 자연 다큐를 많이 하지만, 궁극적인 메시지는 결국 시청하는 인간을 향한 것이다. 그래서 바퀴의 입을 빌려서 인간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항상 주제를 선택하면 그 개체의 캐릭터를 생각 하는데, 바퀴는 숨어서 살고, 터무니없이 미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면서도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점이 88만원 세대, 비정규직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점점 승자독식의 사회가 되어가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어지고 있는데,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처지나 심정을 같이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이 있었다. 내용 중에 바퀴벌레는 자신의 죽음을 알릴 수도 없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사람들도 그렇지 않나. 아기를 낳고, 몸이 아파도 잘릴까봐 회사에 알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이 바퀴의 땅에 온 셈인데, 자꾸 그걸 까먹는다”
문동현 PD│“바퀴벌레는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와 닮았다”
문동현 PD│“바퀴벌레는 질기게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와 닮았다”
그런 의도는 아무래도 직접 대본을 집필하면서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 있었겠다.
문동현 PD
: 내레이션은 처음부터 직접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방송 작가들은 대게 후반에 참여를 하게 되는데, 2, 3개월짜리 프로젝트라면 기획부터 같이 할 수 있지만 는 3월에 기획을 시작해서 11월까지 이어진 장기물이었다. 그렇게 되면 깊이 아이템을 소화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작가의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만큼은 주관적인 내레이션을 쓰는 것이 가능 할 것 같기도 했고.

1편의 화자는 바퀴벌레였고, 2편의 화자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2편은 기대보다 무난하게 구성 된 것 같기도 했다.
문동현 PD
: 사실 2편은 방황을 많이 했다. 1편은 애초의 구성과 유사하고, 2편은 원래 뭐랄까, 비주얼 아트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냥 바퀴들이 음악에 맞춰서 춤추고, 케이크를 먹고 하는 다양한 모습을 담아서 꾸미고 싶었는데, 그것만으로 50분을 가기에는 무리가 있더라. 6월에 중간 시사를 하면서 전면 수정에 들어갔다. 작업 분량을 다 엎어버리고 새로 촬영을 시작하면서 실험도 넣고, 중국 로케도 진행하고, 인터뷰도 넣고 일반 구성 다큐처럼 바뀐 부분이 많다. 결론적으로 종합적인 핵심은 1편에 있는 거고, 2편은 좀 더 다양한 이야기를 더한 걸로 각자 차별화 할 수 있었다고 생각 한다.

실현되지 못한 2편의 욕심이 바로 엔딩의 뮤직비디오로 나타난 것인가? (웃음)
문동현 PD
: 최종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느낌이 바로 그 뮤직비디오다. 2편은 특히 구성물로서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끝에 매듭을 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넣게 되었다.

그 부분에서도 영화 에 나오는 ‘오리진 오브 러브’의 뮤직비디오가 연상되더라.
문동현 PD
: 그 영화를 좋아해서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레이션에도 나오지만 인간은 지구의 하루 중에 밤 11시 59분 33초에 나타난 존재다. 우리가 바퀴의 땅에 온 셈인데, 자꾸 그걸 까먹는단 말이다. 역사나 신화적인 느낌을 통해서 우리가 왜 바퀴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다. 이애림 작가의 평소 작품에 드러나는 샤머니즘적인 감각이 마음에 들어 선택 했는데, 전체적인 콘셉트는 내가 제안 했지만 구체적인 콘티는 그분이 다 제작 했다. 그리고 여기 쓰인 노래도 새로 제작한 거다. 있는 노랜 줄 아시는데 (웃음) 회의를 거쳐서 인간에 대한 바퀴의 외사랑, 두 영혼의 만남으로 가사를 풀었다.

스태프 선택도 감독의 안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조원희를 성우로 기용한 것은 특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동현 PD
: 운이 좋았다. 원래 처럼 이금희 씨 목소리로 동화적인 느낌을 낼지, 혹은 박정자 씨나 김세원 씨의 카리스마 있는 느낌을 더할지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아는 작가가 조원희 씨가 더빙한 아파트 광고를 권해줘서, 들어보니까 너무 좋더라. 목소리에 깊이가 있고, 슬픔이나 여운도 있고. 무엇보다도 정직하게 들려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끝내고 나서, 어쩐지 인간 혐오가 생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동현 PD
: 나부터가 인간인데 아무래 지구에 해악인 존재라고해도 사라지고 나면 무슨 소용인가. (웃음) 다만, 인간이 다른 종들과 더불어 좀 더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계속 모색할 생각이다.

그럼 이제 집에 바퀴벌레가 나와도 안 죽이는 건가?
문동현 PD
: 일단, 우리 집은 바퀴가 안 나온다. (웃음) 사실 그렇게까지 몰입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좀 더 알고 보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를 작업 할 때도 다 똑같은 줄 알았던 개미들이 구분이 되고, 무엇을 하러 왜 나왔는지 이해하게 되더라. 알고, 보이고, 그러면 무조건 더럽다고 하거나 무조건 죽이지는 않을 것 아닌가. 방송을 보고 나서 “함부로 죽이면 안 되겠네”라는 말을 들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한 것 같아서 반갑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예전처럼 행동하겠지만 말이다.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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