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경은 나직나직 이야기했다. 어떤 물음에도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대화에 즐겁게 몰입하는 태도에서는 MBC <지붕 뚫고 하이킥> 에서의 캐릭터처럼 어른스럽고 단단한 심지가 드러났다. 98년 서태지 앨범의 포스터 속 소녀로 세상에 얼굴을 알렸던 신세경은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에게서는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품위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신세경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예쁘다’와 ‘아름답다’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후자에 대해 언어로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이 속 깊고 매혹적인 숙녀와의 대화를 공개한다.요즘 MBC <지붕 뚫고 하이킥>으로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실감이 되나요.
신세경: 촬영 때문에 밖에 나가잖아요. 초반에는 보시는 분들이 다들 무슨 촬영인지 모르셨는데 요즘엔 ‘아, <지붕 뚫고 하이킥> 촬영하는구나’ 하고 아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본래 모습이 세경 캐릭터에 녹아나요”
초반에 남산에서 신애를 잃어버리거나 하는 장면에서 고생도 많이 했고 길거리에서의 굴욕 신도 있었는데 그 때 몰라보셔서 다행이네요. (웃음)
신세경: 그렇죠. (웃음) 신애를 잃어버렸던 날은 새벽 다섯 시까지 촬영을 했는데 거의 탈진한 상태로 계속 울고 뛰면서 찍었거든요. 그 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나 보니까 그 에피소드가 인상에 많이 남아요.
올해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했어요. MBC <선덕여왕>에서 천명공주(박예진)의 아역으로도 반응이 좋아서 다음에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궁금했어요.
신세경: 사실 제가 <지붕 뚫고 하이킥>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저에게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지붕 뚫고 하이킥>은 김병욱 감독님 작품이라 그런지 청춘물과 좀 다른 느낌이었고 독특한 캐릭터도 좋았어요. 단지 제가 항상 좀 강한 이미지를 보여줬던 것 같아서 세경의 청승맞으면서도 불쌍한 느낌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죠.
감독님은 처음에 세경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 주셨나요.
신세경: <지붕 뚫고 하이킥> 초반에 제 캐릭터는 우는 장면, 감정 신이 대부분이었어요. 처음에 감독님은 코미디는 정음 언니 위주, 저는 정극 위주로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시트콤이다 보니 유쾌함을 기대하고 보신 시청자 분들께서 제 캐릭터가 너무 청승맞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극이 진행되다 보니 오히려 조금만 흐트러지거나 망가져도 더 재미있는 캐릭터가 창조되는 걸 보면 감독님이 옳은 길로 인도해주신 것 같아요. (웃음)
황정음 씨는 감독님이 모든 것을 디테일하게 지도해 주신다고 ‘주님’이라는 별명도 붙였던데 세경 씨에게는 어떤 얘기를 해 주시나요.
신세경: 저는 영화에서도 정극만 했고, 드라마에서는 사극만 하다 보니까 시트콤에서는 톤을 아주 많이 높여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굳이 그런 걸 원하지는 않으셨고, 제 캐릭터 자체가 정음 언니처럼 밝고 오픈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정극을 기본으로 호흡만 조금 빠르게 했어요. 물론 지난 번 세경이 술에 취했을 때처럼 간혹 코믹한 부분이 있긴 한데 감독님이 참 신기하신 게, 배우의 안에 있는 기본적인 성격의 틀을 보고 거기 맞는 캐릭터를 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본연의 모습이 녹아나는 것 같구요. 아, 물론 해리(진지희)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웃음)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동생인 신애(서신애)를 돌보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실제로는 외동딸인데 나이 차가 많은 동생과 어떻게 친해졌나요?
신세경: 신애랑은 여덟 살 차인데, <지붕 뚫고 하이킥> 촬영을 강원도에서 함께 시작하며 친해졌어요. 제일 덥고 힘들 때부터 같이 지냈더니 정이 많이 들기도 했고, 신애 성격이 활발하고 사내아이 같아서 낯가림이 없거든요. 같이 대본 맞춰볼 때도 있고, 신애랑 지희는 애기들이라 막 뛰어다니면서 장난을 많이 쳐요. 저도 가끔 스태프 분들한테 너네 뛰어다니지 말라고 혼나기도 하고. (웃음) 또 학업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친구라 대본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촬영장에서 학습지를 풀기도 하는데 제가 공부를 아주 잘 하는 게 아니더라도 초등학생 공부는 쉽잖아요. 그래서 옆에서 구경하다가 봐 주기도 하는데 오랜만에 풀어보니까 재밌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좀 많이 노숙했던 것 같아요”
세경 씨도 어린 나이에 데뷔를 했는데 돌이켜 보면 어떤가요.
신세경: 신애가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데 저는 신애랑 같은 나이였을 때도 훨씬 겉모습이 성숙했어요. 5학년 때 키가 162cm였으니까 학교에서는 거인이었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영화 <어린 신부>를 찍었는데 극 중에서 고 1로 나와요. 중학생이 고등학생 역할 할 수도 있지 싶지만 사실 중 1은 초등학교 졸업한지 얼마 안 지난 나이거든요. 그 때 고등학생 역할을 했다는 게 지금도 신기해요. 어릴 때부터 좀 많이 노숙했던 것 같아요. (웃음)
천명공주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의 이미지도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느낌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보다 크기도 했고 사회생활도 일찍 시작한 셈이라 또래 친구들과 고민도 좀 달랐을 것 같아요.
신세경: 네, 그런데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는 친구들이나 저보다도 어린 아이돌 그룹을 보면 정말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사실 연기자는 테크니컬한 부분도 중요하지만 인생을 살아온 경험이 연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더 어릴 때부터 더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연기자는 비교적 덜한 것 같은데 아이돌 같은 경우는 이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딱 그 나이 때가 아니면 커서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포기하게 되잖아요. 저는 고등학교 때 영화 <신데렐라> 딱 한 작품만 하고 계속 학교생활을 했는데, 그 시기에 작품 한 두 개 더 한 것보다 친구들과 놀 것 다 놀고 그 나이에 누릴 것 다 누리고 입시 준비도 해 보았던 게 훨씬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최대한, 하고 싶은 걸 다 하려고 노력해요. 계속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도 그래서구요.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나요?
신세경: 모자를 쓰고 다니면 모르시는 것 같아요. 사실 지하철 타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생각보다 남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 갈 길이나 할 일에만 딱 집중을 하는 거죠. 집 근처 5호선이나 9호선을 주로 타는데 편해요.
그런데 성장기에 활동을 줄이고 그 나이에 누릴 것들을 누리면서 산다는 게 연기자, 혹은 연예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쉬운 선택은 아닐 것 같아요.
신세경: 음, 어느 때는 일해야 하고 어느 때는 쉬어야 된다는 선을 딱딱 그었던 건 아닌데 제가 지금 있는 사무실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도 바로 앞만 보기보다는 길게 봤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딱 이 시기에, 학교를 다닐 수 있을 땐 학교를 다니고 연애를 할 수 있을 땐 연애를 하고 친구와 놀 수 있을 땐 놀아야 되는 게 길게 보면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 연기를 할 때도 필요한 부분이거든요. 그걸 거치지 않으면 분명히 그 부분이 저한텐 결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급하게 가지 말자고들 하셨어요. 사실 사람이 굉장히 욕심이 많은 동물이잖아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얼굴을 많이 비추고 싶고 이름을 빨리 알리고 싶은 건 당연한 거지만 그 때마다 다시 한 번 생각해서 그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 3 때 쓴 소설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어요”
연출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언젠가 감독으로 작품을 만들게 된다면 담아내고 싶은 얘기도 있나요.
신세경: 많아요. 저는 입시에서 연기 실습이 중요했기 때문에 고 3 자습 시간에 주로 책을 읽거나, 정말 할 일이 없으면 소설을 쓰기도 했거든요. 물론 쓰면서도 이건 내 감성으로 쓴 거고 내가 생각해서 쓴 거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애가 뭘 알겠어’ 하는 시선이 강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어디 오픈하기보다는 나이가 더 든 뒤에 읽어보면 저에게 큰 자산이 될 것 같아서 보관하고 있어요.
주로 어떤 이야기를 썼나요.
신세경: 물론, 사랑하는 내용이긴 한데. (웃음) 저는 그게 딱, 열아홉 살의 제가 쓴 글이라서 소중한 거 같아요. 완성도가 높고 엄청나게 잘 짜인 건 아니지만 그 때 제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을 담아낸 글이라서 좋고, 나중에 제가 그걸 모티브로 해서 또 다른 걸 쓸 수도 있고 그런 감성으로 연기를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자기객관화를 잘 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신세경: 저도 객관적이고 싶을 때가 있고, 그런 거 다 무시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최대한 남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대중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이상 신경을 쓸 필요는 있지만 거기에 대해 한없이 생각하다 보면 많은 것들이 다 흐트러질 것 같아요. 이 일 하는 분들 중에 그런 걸로 인해 상처받는 분들도 많으시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떤 부분에 있어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많이 구해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는데 자라면서 중요하게 배운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신세경: 시나리오를 보고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할 텐데 사실 어릴 때는 그냥 무작정 했어요. 캐릭터에 대한 생각보다도 그 신 안에서 주어지는 감정에 대해서 표현하는 게 중심이었는데 점점 그거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점점 더 구체화된 캐릭터를 맡으면서 좀 더 고민하려고 노력해요. 사실 많이 고민할수록, 힘들게 찍을수록 좋은 장면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도 야외촬영이 많을수록 좋은 에피소드가 되죠. (웃음)
영화 보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고 했는데, 배우는 영화를 보는 사람인 동시에 영화의 일부가 되는 존재잖아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요.
신세경: 일상생활에서 그냥 지나가는 지점이고 당연하게 흘러가는 순간인데 어떤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는 ‘아, 이런 게 있었지’ 하고 감동이나 충격을 받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공감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훌륭하다고 평가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들은 정말 폭넓은 부분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 짧고 좁은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그렇게 폭넓은 표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살 한 살 먹어서 삼십 대가 되고 사십 대가 될수록 아주 많이 풍요로워질 것 같고 아주 많이 행복해질 것 같아요. 물론 고통도 있고 슬픈 일도 있겠지만 그런 걸 겪어나가는 것도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속 알차게 성장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인터뷰. 강명석 (two@10asia.co.kr)
인터뷰. 최지은 (five@10asia.co.kr)
정리.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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