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은 정우성이다. 정우성이라는 배우에 대한 정의는 이 한 줄로 정리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길 동어반복은 뜻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어떤 화려한 수사도 정우성이 가진 독특한 아우라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불만족스러운 도구일 뿐이다. 쏘는 느낌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빛, 원래 얼굴의 한 부위인 것처럼 어울리는 콧수염,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어딘가 반항적인 분위기는 어떠어떠한 멋이 아닌, 그냥 정우성의 멋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자면 하나의 기호이자 고유명사 ‘The 정우성’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하지만 그가 정말 흥미로운 존재인 것은 그 동어반복의 폐쇄회로 속에서 끊임없이 ‘The 정우성’의 의미를 확장한다는 점이다.

‘The 정우성’의 정반합

영화 <호우시절>에서 사람들이 궁금해 한 것은 <똥개>에서 꼬질꼬질한 난닝구에 늘어난 추리닝을 입어도 여전히 빛나던 정우성이 과연 허진호의 그 ‘슴슴한’ 서사 안에 어떻게 스며들어갈지에 대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옛 사랑과의 재회에 설레고 혼란스러워하는 한 평범한 남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 메이(고원원)와의 추억을 증명하기 위해 유학 시절의 친구에게 증거 사진을 재촉할 때의 초조한 표정과 귀국을 앞둔 공항 앞에서 메이에게 “하루 있다가 갈까?”라고 조심스럽지만 큰 용기를 내어 말하는 모습은 누구에게 한 번쯤은 있었을 설렘의 순간을 그대로 환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여전히 정우성이다. 영어로 대화하다가 갑자기 중국어로 말하는 메이에게 한국말로 “뭐라는 거니?”라고 말하고, 몰래 데이트를 즐기다가 중국 지사의 직원에게 들키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자연스러운 코믹함 속에서도 그의 눈빛은 깊고 정장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정우성이 배우로서 또 스타로서 성장하는 과정은 캐릭터로의 몰입과 스타성의 발휘라는 모순이 정반합을 이루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또 다른 고유명사가 된 ‘The 장동건’이 남자로서 가능한 모든 좋은 점의 모범 답안을 지시하는 기호라면, 지하 격투 무대에서 싸우고 데이토나 USA 레이서였던 SBS <아스팔트 사나이>의 동석부터 <본 투 킬>의 킬러 길을 거쳐 <비트>의 민에 이르는 과정을 겪으며 정우성은 터프하되 청춘의 결핍에 괴로워하는 반항의 아이콘이 됐다. 친구와의 의리를 위해 혼자서 수 십 명의 건달과 싸우다 민이 죽는 <비트>의 결말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순교는 죽음을 통해 불멸의 이미지를 약속한다. 즉 민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그리고 창작자들은 정우성의 이미지를 고착화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정우성 본인은 “민이를 죽이지 않았다.” <비트>로 스타덤에 올랐던 그가 옴니버스 영화 <모텔 선인장>을 선택한 건 그래서 흥미로운 일이다. 여자와의 섹스에 몰입하면서도 “나 사랑해?”라는 물음에는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민구는 여전히 무책임한 청춘이지만 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인물이다. 여전히 그에게서 민을 찾는 창작자들과의 작업을 통해 <태양은 없다>, <무사>, <데이지> 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의도적인 변화 욕구가 느껴지는 <러브>나 <똥개> 같은 작품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에 쌓이기 시작했다.

스타에서 스타로

하지만 대중이 바라는 정우성의 이미지라는 것은 제법 명확했고 아무리 그가 어깨에서 힘 뺀 연기를 하더라도 멋지지 않으려 하는 스크린 속의 정우성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때부터 그는 변화를 좇는 대신 변화를 품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대중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화법의 다양함을 찾은 것이다. 가령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철수는 세상과 대화하며 어느 정도 철이 든 민을 연상시킨다. 그는 폼 날 것 없는 공사장 인부지만 몇 번의 인연만으로 수진(손예진)의 프러포즈를 받을 만큼 매력적이기도 하다. 즉 그는 정우성을 벗어난 똥개가 되기 위해 애를 쓰기보다는 그 변화를 자기 안에 갈무리했다. <호우시절>에서 캐릭터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어색한 영어를 쓰라는 감독의 요구에 대해 “사람들은 단순히 동하의 영어 실력이 아닌 스타 정우성의 실력으로 보기 때문에 유창한 영어 구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건 그래서다. 덕분에 그를 정우성이 아닌 다른 누구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관객은 오히려 동하의 유창한 영어 대사에서 더 자연스러운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다. 때문에 비주얼로만 따지면 정우성에 대한 2시간짜리 찬가였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현상금 사냥꾼 도원과 <호우시절>의 동하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The 정우성’이 가진 여러 표정 중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는 배우로 시작해 스타를 꿈꾸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스타로 시작해 배우의 이름을 얻길 원한다. 하지만 정우성은 스타로 시작해 여전히 스타다. 그것은 단순히 CF를 전전하며 자신의 스타성을 소진하는 과정과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스타성을 지키면서 연기의 폭을 그 안에 담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의 스타성을 더욱 빛나게 했다. 그 안에서 ‘The 정우성’의 의미는 확장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 변천사를 살피고, 그가 성장한 궤적을 쫓은 결론은 역시, 정우성은 정우성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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