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탐라도라, 한양 생각 따위는 몽땅 잊어부라!” MBC <탐나는도다>는 극 초반, 최잠녀(김미경)의 입을 빌어 시청자들에게 선언했다. 지역 고유의 문화를 드라마에 밀접하게 녹여낸 이 작품에서 제주 해녀 버진(서우), 한양 선비 박규(임주환), 영국 청년 윌리엄(황찬빈)의 풋풋한 우정과 로맨스 못지않게 이야기의 중심을 잡은 인물은 ‘버진 어멍’ 최잠녀를 연기한 중견배우 김미경이다. 해녀들의 우두머리 대상군으로 장군 같은 카리스마와 엄격하지만 때때로 끈끈한 모정을 드러내는 최잠녀의 캐릭터는 김미경의 투박한 제주 사투리와 굳센 표정 연기를 통해 17세기 탐라라는 공간을 완성시켰다. <탐나는도다> 막바지 촬영을 앞둔 김미경으로부터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었다.<탐나는도다> 10회부터 배경이 제주에서 한양으로 바뀌며 ‘버진 어멍’을 볼 수 없게 되어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김미경: 이번 주에 한양에 다시 올라온다. 그 과정이 아주 재밌는데 미리 알려주면 아까울 거다. 찍으면서 웃느라고 계속 NG를 냈다.
그 사이 박규의 모친 엄씨 부인(양희경)이 최잠녀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발휘했는데.
김미경: 엄씨 부인과 최잠녀가 대면하는 신을 얼마 전에 찍었다. 둘 다 강한 캐릭터니까 이야기에 맞게 적절한 힘 조절을 했어야 하는데 어떻게 나왔을지 나도 궁금하다. 양희경 선배와는 워낙 오래 친하게 지낸 사이라 우린 찍고 나서 웃었지만 촬영장에는 숨소리도 안 들렸다. (웃음)
“<태왕사신기>를 겪은 배우들이면 세상에 못할 게 없다”
처음 <탐나는도다>의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김미경: 대본만 봐도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제주에 내려가 물질도 해야 하고, 얘기 들어보니 고생문이 환했다. (웃음) 그런데 나는 그 전에 워낙 힘든 작품을 몇 번 했으니까, 특히 <태왕사신기>를 겪은 배우들이면 세상에 못할 게 없다. 그 때 내가 맡은 ‘바손’이 대장장이라서 한여름에 가죽옷 입고 쇠망치 들고 불 앞에서 담금질하는 게, 남자가 해도 땀 뻘뻘 흘리는 일이었지만 사실 성격상 그런 게 잘 맞는다. 그래서 이 정도야 괜찮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1년여의 사전제작을 거친 작품인데 첫 촬영은 어떻게 시작했나.
김미경: 그게 벌써…작년 8월이었다. 6미터 깊이 수조 바닥까지 내려가서 잠수 신을 찍었는데 내가 듣기로는 ‘여기 들어가야 돼’라는 말에 두 명인가는 울며 도망갔다고 한다. (웃음) 그래서 해녀 역의 배우들이 3개월 정도 잠수 트레이닝을 받았다. 난 스케줄이 겹쳐서 이틀 밖에 연습을 못 하고 늦게 합류했는데, 그렇다 해도 배우에게 “못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거니까 ‘설마 나를 빠뜨려 죽이기야 하겠냐’ 하는 마음으로 뛰어들었다. 원래 겁이 별로 없고, 그까짓 물에 들어가는 건데 심장마비 아니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다시 말하지만 <태왕사신기>에서는 불과 함께 했고 이번에는 물이었던 것뿐이고.
제주 로케이션도 상당히 길었는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김미경: 제주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배우나 스태프들이나 화상을 입고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고 다음 날 또 터지고, 쪽진 머리에 가르마를 타면 그걸 따라 화상을 입으니까 쓰라려서 머리를 감기가 힘들 정도였다. 특히 내 딸 버진이, 서우 씨가 고생을 많이 했다. 온 몸이 2도에서 3도 화상을 입어서 익다 못해 몸에 손도 못 댈 지경이었는데 새벽부터 또 촬영에 들어가고, 하루는 이 친구가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까 “오늘 정말 죽을 것 같아요” 하는데 감독님은 그렇다고 안 찍을 수가 없으니까 너무 마음 아파하시면서 “조금만 참아라” 하셨다. 그랬더니 이 체격도 작고 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 친구가 돌아서서 펑펑 우는데 어찌나 안됐는지 모른다. 다들 고생했지만 서우 씨는 좀 더 많이 고생을 했다. 근데 요즘은, “엄마, 작년엔 정말 도망치고 싶었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내가 조금만 더 잘 할 걸” 하길래 “너 충분히 잘 했고, 정말 예쁘다”고 칭찬해줬다.
육체적인 고생도 있지만 제주 방언이 많은 대사도 고민이었을 것 같다.
김미경: 사실 어느 지방 사투리나 서울 사람이 노력해서 토박이만큼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제주 말은 처음 들으면 외국어보다 더 어렵고, 억양이 심하지는 않은데 아주 절묘한 느낌이 있다. 나는 예전에 현기영 선생의 <변방에 우짖는 새>라는 연극을 할 때 제주 말을 공부한 적이 있다. 제주 민란에 대한 내용이라 당시 그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주도 출신 선배를 모시고 다 같이 배웠다. 그 때 가르쳐준 선배를 이번에 무지무지하게 괴롭혔다. 밤이고 낮이고 전화해서 “언니 이건 뭐라고 해?”라고 물었으니까. 사실 제주 말을 우리가 완벽하게 구사할 수는 없고, 구사한다 해도 시청자들이 다 알아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살리는 게 제주도민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제주 내려가서 해녀복 입고 물질하면서 서울말, 표준어를 사용할 거면 한강에 들어가서 고기 잡지 뭐 하러 거기까지 가나. 하지만 현지인들이 보시기에는 어설픈 면이 많았을 거다.
하지만 최잠녀의 제주 사투리는 제주 사람들이 들어도 수준급이라고 하던데.
김미경: 아이고, 아이고. 절대 근처에도 못 간다. (웃음) 그런데 제주 현장에서 날 가르쳐주는 선배가 너무 바빠서 못 만나는 날 ‘이건 좀 고쳐야겠는데’ 싶으면 길에 다니는 해녀나 제주도 분을 아무나 붙잡아서 물어봤다. 내가 버진이에게 벌을 세우는데 “조용히 해! 시끄러!” 하면 너무 이상할 것 같으니까 아무나 붙잡고 “아즈망, 살려줍서게! 이거 뭐라 그래, 빨리!”하고 매달리면 그 분이 “이거? 속씀허라!”라고 알려주는 거다. 그런 게 재미있었다. 모르는 건 현장에서 배우면서 찍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엄마아아, 하고 외치는 서우가 어찌나 예쁘던지”
그동안 <태왕사신기>의 바손을 비롯해 강한 여성 캐릭터를 많이 맡았지만 최잠녀는 그들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훨씬 입체적인 캐릭터였던 것 같다.
김미경: 똑같이 강해 보여도 인물에 따라 다른 점이 있는데 내가 최잠녀에게 중점을 둔 건 모성이었다. 옛날에는 제주도의 잠녀들이 물질해서 캔 것들을 다 나라에 바쳤어야 하고, 그 양을 맞추지 못하면 돌아오는 대가가 너무나 혹독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대사에서도 “탐라땅에서 태어났시믄 좀녀가 되는 게 당연한 거고, 어차피 좀녀를 할 바에는 나처럼 대상군이 되어야 허고” 그러는 것처럼, 나는 그걸 순리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지만 한편으로는 본인 인생도 너무 거칠고 허망하고 딸들을 자기처럼 살아가게 하는 게 너무 가여웠을 것 같다. 내 소중한 새끼 저거, 물에 들어가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걸 맨날 물에 처박는 엄마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으면서도 그 길밖에 없으니까 모질게 굴고 뺨도 때려보고,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좋은 옷 입혀서 어디 몰래 도망이라도 보내고 싶고 이 아이가 날개 달고 날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반씩 섞어서 내 성격을 맞췄다.
사실 대부분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들의 모성은 무조건적인 희생 아니면 집착으로 드러나는 편이라 최잠녀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김미경: 나도 중학교 1학년짜리 딸 하나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엄마 역할을 할 때마다 전형적인 것보다 내 식대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엄마도 인간인데 화 나면 혼낼 때도 있고, 또 종아리 때려놓고 애가 자는 거 보면 나 혼자 울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어떻게 엄마 마음이 독하기만 하거나 지고지순하기만 하거나 그러겠나. 우리 딸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웃겨서, 개그맨 같아서’ 라고 한다. (웃음) 가끔 “엄마가 드라마에서 우아하고 예쁘게 나와야 친구들한테 덜 창피하지 않니?”라고 물어보는데 얘는 내가 평범한 모습으로 나올 때는 별로 재미없어하고, 이번 <탐나는도다>를 보고는 “엄마, ‘포스 짱’이야. 하나도 안 챙피해”라고 했다.
극 중에서 딸로 출연하는 서우와는 어땠나.
김미경: 서우는 예전에 ‘옥메와까’라는 아이스크림 광고를 보고, ‘물건 하나 나왔다’는 생각을 했다. 저 정도로 풀어헤쳐서 자기를 보여줄 수 있는 신인은 드문데, 저게 누군지는 몰라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광고를 했던 애가 내 딸로 나온다는 얘길 듣고 첫 촬영을 하러 간 날, 감독님이 저 멀리 해녀복을 입은 애한테 “버진아, 어머니 오셨다!”하고 외치니까 만약 다른 애들이면 “선생님, 안녕하세요” 했을 텐데 서우는 그 멀리서 “엄마아아!” 하고 외치면서 뛰어오는 거다. 그러고 와서 인사하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난 아무리 어린 후배에게도 처음 만나서부터 반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다들 “선배님, 제발 말을 놓으세요” 그러는데 서우가 그렇게 나오니까 첫 만남부터 어색함이 없고 바로 ‘내 딸’이라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귀양다리’ 박규와 최잠녀가 만나는 순간에서의 묘한 긴장감과 코미디도 재미있었다.
김미경: 임주환 씨도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 친구가 그렇게 여러 작품을 했던 게 아님에도 애드리브가 상당히 좋다. 첫 날 찍는데 내가 뭔가를 던지면 확 받아서 바로 반응을 보인다. 예고하지도 않은 건데 내가 뭐라고 하면 “무엄하다!”가 바로 나오니까, 한참 후배지만 참 잘 한다, 작품이 재밌어지겠다는 느낌이 왔다. 사실 <탐나는도다>에서 배우들의 하모니는 정말 돈을 주고도 못 살 만큼 좋았다. 우리 남편 역으로 나온 변우민 씨는 상대를 막론하고 장난도 잘 치고 분위기를 편하게 해 주고, 끝분이 정주리 씨와 끝분 어멍 고바순 역의 방은희 씨 모녀는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조기종영 반대 운동 같은 걸 처음 겪어봐서 놀랍고도 고마웠다”
99년 SBS <카이스트>로 TV 시청자들과 처음 만났지만 그 전까지 연극을 계속 했다고 알고 있다. 연기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미경: 어릴 땐 운동을 좋아해서 수영선수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땐 무용을 했는데 사실 무용보다는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사물놀이를 더 좋아했다. 지금도 국악이나 농악 공연 같은 걸 보면 감동해서 눈물이 나고 너무너무 흥이 난다. 전생에 남사당패였던 모양이다. (웃음) 혼자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림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내 길이 뭘까 고민하던 중에 우연히 알게 된 친구의 선배 손에 이끌려 극단 연우무대를 찾아가게 됐다. 85년 3월에 입단해서 그 날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서울 전역을 걸어서 돌며 포스터를 붙였다. 그 때 연우무대에서 문성근, 양희은 씨 등이 출연한 <한씨 연대기>를 시작했는데 나는 극장 앞에서 표 팔고 프로그램 파느라 공연은 한 번도 제대로 못 본 대신 매일 듣다 보니 대본이 통째로 다 외워졌다. 몇 달 뒤 배우 중 한 명이 결혼을 해서 그만두게 됐을 때 김석만 연출가가 여러 배우들 오디션을 본 끝에 나더러 “한 번 해 봐” 라고 했다. 처음엔 “에이, 농담도!”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엿새 연습하고 무대에 섰다. 그러다 연극판에서 15년 넘게 지냈다.
그런데 어떻게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건가.
김미경: 일이 너무 좋아서 연애도 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극 연출을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안아보는 순간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애만 보이는 거다. 들어오는 일을 다 거절하고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매일 끼고 살았다. 그러다 아이가 좀 크니까 내가 점점 바보가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전부터 알고 지내던 송지나 작가가 젊은 아이들과 함께 연기하면서 감각을 놓치지 말아보라며 맡겨 준 게 <카이스트>의 ‘석학의 집’ 주인 김미순이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에 적응을 잘 못했다. 무대에서 서로 눈을 마주하며 치열하게 연기하다가 카메라 보고 대사 좀 하고 “오케이, 컷” 하면 끝나는 촬영은 애들 장난 같고 나한테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세월이 점점 흐르면서 그 메커니즘을 나도 모르게 조금씩 습득하게 됐다.
장르를 떠나 배우로서 연기할 맛이 나는 작품은 어떤 건가.
김미경: 글인 것 같다. 대본이 좋고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정말 치열하게 뭘 만들어낼 때, 내가 연기자가 되길 잘 했다고 느끼는 작품이 있다. <탐나는도다>에서 6미터 수조에 들어가기 위해 숨을 참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나는 정말 배우가 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이런 돈 주고도 못 할 경험을 해 보겠나 싶었다.
그런데 <탐나는도다>가 조기종영을 맞았다.
김미경: 너무 아쉽다. 더 고생해도 되는데, 좀 더 힘들어도 우리는 계속 갈 마음이 있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걸 찍어 놓고도 못 보여드리는 게 아깝고, 그걸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 편집하시는 분들도 매일 밤을 새시니까 참 안타깝다. 하지만 난 여태까지 드라마 하면서 조기종영 반대 운동 같은 걸 처음 겪어봐서 놀랍고도 고마웠다. 아마 새로운 것에 대한 재미와, 연기자 및 스태프들의 노력이 보는 분들에게도 전달되는 모양이다. 이 작품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몸으로 부딪혀 일궈낸 거라 더 가슴에 와 닿는 게 아닐까.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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