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바다에서 꿈을 꾸고, 북극곰은 얼음대륙 위에서 눈을 빛내는 것처럼 그냥 원래부터 지금 있는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존재들이 있다. 한국영화에서 안성기라는 배우가 특별한 건 그 역시 스크린 바깥에 있는 걸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의 작품만을 기억하는 관객에겐 인자한 아버지, 혹은 지도자로서만 기억되기도 하지만 8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애인의 순애보를 짓밟는 파렴치한(<깊고 푸른 밤>)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노예(<성공시대>), 돈 맛에 길들여진 부패한 형사(<투캅스>), 말 없고 잔인한 킬러(<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어느 하나로 분류하기 어려운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런 다양한 모습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이 모든 캐릭터가 스크린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안성기가 스크린 밖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전공(베트남어학과)을 살려 베트남전에 베트남어 교육대 장교로 참전할 계획”을 가졌던 한 명의 젊은이였다는 걸 종종 잊는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군하는 바람에 그냥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고 전공을 살리는 대신 다시 영화계로 돌아오게” 되었던 인생의 갈림길이라는 것이 있었고, 베트남전이 조금만 더 연장되었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배우 안성기는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보기 좋은 영화를 권할 것만 같은 그가 주로 베트남전을 다룬 전쟁영화들을 추천한 것이 그다지 의외의 선택은 아니다. 이 영화들은 배우인 그에게 자극을 준 탁월한 마스터피스인 동시에 “모든 영화는 어떤 주제를 다루던 결국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의 말처럼 “전쟁에 대한 별다른 자의식 없이 그저 한 번 부딪쳐보자는 마음으로 월남 참전을 꿈꿨던” 청년기를 환기시키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주제를 통해 어떤 한 시대의 기억을 온전히 담은 이 영화들은 현재의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

1. <디어 헌터> (The Deer Hunter)
1978년 │ 마이클 치미노

“아마 내가 다시 영화를 시작할 때 즈음 본 영화일 거예요. 로버트 드니로부터 크리스토퍼 월켄, 메릴 스트립까지 모두 정말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예요. 고향에서 즐겁게 지내던 친구들이 베트남에 끌려가 베트남전에 참여해 벌어지는 전쟁 장면도 끔찍하지만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와 보여주는 상처 밖에 남지 않은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정말 그 땐 충격이었어요. 특히 베트콩에게 사로잡혀 러시안 룰렛을 할 때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는 정말 눈이 부셨죠. 친구에게 배짱을 보이라고 독려하다가 그만 총이 발사됐을 때, 잔뜩 젖은 눈으로 친구를 부르는 모습에선 슬픔과 죄책감이 묘하게 섞여 있어요. 사실 본지 오래되어서 특별한 디테일보단 처참한 전장의 풍경 같은 장면과 장면들이 드문드문 기억날 뿐이지만 이토록 황폐한 전쟁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음악은 정말 아름다웠다는 건 기억이 나네요.”

전쟁 영화지만 두 개의 동등한 전력이 공격을 주고받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마이클(로버트 드니로)과 닉(크리스토퍼 월켄) 등 주인공들은 참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베트콩에게 사로잡힌다. 이 영화의 탁월한 점은 전쟁의 진정한 참혹함은 총상과 같은 외상이 아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단 점이다. 베트콩들에게 따귀를 맞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러시안 룰렛을 해야 하는 주인공들은 진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러시안 룰렛용 권총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한 뒤에도 그들에겐 ‘상처뿐인 영광’조차 남지 않는다. 특히 영화 후반부 모든 감정이 지워진 표정으로 기계처럼 러시안 룰렛에 도전하는 닉의 모습은 전쟁이 남긴 내상의 깊이를 그대로 드러낸다.

2.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년 │ 프랜시스 코폴라

“아무래도 내가 배우다 보니 연출보다는 배우 위주로 영화를 보게 돼요. 하하. 짧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 말론 브란도와 배우가 아닌 진짜 장교 같은 모습의 마틴 쉰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해리슨 포드요? 사실 그 무렵의 해리슨 포드는 그다지 눈에 띄는 배역이 아니었어요. 잠깐 나와서 임무를 하달하는 수준이죠. 어쨌든 그 대배우들의 연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킬고어 대령 역의 로버트 듀발이 전쟁 중에 끊임없이 파도타기를 시도하는 모습이었어요. 그게 비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모습이 아닐까요.”

<지옥의 묵시록>을 지배하는 가장 큰 감정은 광기다. 무료해서 주먹으로 거울을 깨고 고통스러워하는 윌라드 대위나 강가에 네이팜 탄을 투하하면서도 서핑을 시도하는 킬고어 중령, 그리고 캄보디아에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어 신과 같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시인의 영혼을 가진 군인’ 커츠 대령까지 영화에 나오는 군인들은 정상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의 광기가 개별적인 특성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감정이란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은 진작에 잃은 윌라드에게 전쟁은 재밌거나 지루할 뿐이고, 킬고어 역시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내면을 채우기 위해 서핑에 목숨을 건다. 어쩌면 그들도 일정한 조건이 충족됐다면 커츠 대령처럼 명분 없는 전쟁 속에서 ‘공포의 얼굴’을 보고 세상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이 말살하는 것은 육체뿐이 아니다.

3. <하얀 전쟁> (White Badge)
1992년 │ 정지영

“<남부군>을 찍을 때였어요. 안정효 선생의 원작소설을 읽고 당시 같이 작업 중이던 정지영 감독에게 이 작품으로 다시 뭉치자고 졸랐어요. 정지영 감독도 책을 읽더니 소재가 좋아 같이 해보자고 했고요. 우리 시각으로 베트남전을 그린 첫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용감한 우리 군인과 나쁜 베트콩 무리, 그런 이분법이 아니라 군수물자처럼 그곳에 팔려간 용병의 시각으로 그린 영화잖아요. 그게 의미 있었다고 봐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팔려나가고 나이가 들어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사실 그 전에는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전쟁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인 영화를 보여주긴 어려웠죠.”

안성기가 영화 시작부터 꿈에서 들리는 포화와 헬기 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는 무기력한 중년의 소설가 한기주로 나오는 영화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그는 월남전으로 돈을 벌었으니 박정희 대통령이 그립다는 친구나 화려한 미사여구로 월남전 소설의 첫 문단을 장식하자는 편집자들 사이에서 ‘그 전쟁에서 얻은 것은 월남의 자유와 평화도, 내 쥐새끼만한 목숨도 아닌, 인간과 역사에 대한 혼돈뿐’이라 고백한다. 다른 현재진행형의 전쟁 영화와 달리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전쟁을 떠올리며 그것이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묻는 이 영화는, 결국 전쟁은 끝났어도 그 후유증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플래툰> (Platoon)
1986년 │ 올리버 스톤

“아마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중에서 전쟁 장면의 디테일과 완성도로만 따지면 최고의 영화일 것 같아요. 이 영화를 찍은 올리버 스톤의 또 다른 베트남전 관련 영화 <7월 4일생>이 전쟁 이후의 후유증을 다룬다면 이 영화는 아무래도 전쟁 자체를 다룬 영화니까. 주인공 찰리 쉰이 참여하는 마지막 전투는 정말 살육의 현장이죠. 비를 맞으면 사타구니의 습진이 번질 거라는 어떤 병사의 대사가 기억나는데 정말 영화 속의 정글은 습기와 더위만으로도 위협적인 느낌이었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이 황폐해질 정도였죠.”

어쩌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건 베트남 사람이라면 병사든 양민이든 모두 다 말살하는 선임하사관 반스 중사(톰 베린저) 같은 인물일지 모른다. 어리바리한 신병인 크리스(찰리 쉰)가 참혹한 전쟁터에서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 반스를 존경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착할 것까진 없지만 반스의 강경책에는 반대하는 엘리어스 분대장(월렘 데포)을 반스가 죽였다는 걸 알게 된 후 크리스는 전쟁에는 영웅도, 영광도, 존경심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마지막 ‘우리는 적이 아닌 우리 자신과 싸웠다, 적은 우리 안에 있었다’는 크리스의 독백은 적과 아군의 이분법 외에는 모든 신념이 적이 되어버리는 전쟁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5. <풀 메탈 재킷> (Full Metal Jacket)
1987년 │ 스탠리 큐브릭

“아직 어리바리한 해병대 훈련병들이 교관에게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는 장면이 가장 먼저 기억나는 영화예요. PT체조부터 유격 훈련까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한 모습이죠. 다른 추천 영화들도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이 영화는 유독 전쟁을 비꼬는 영화예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군인 대 군인의 참혹하더라도 정정당당한 전쟁의 모습이 아닌 거죠. 영화 초반부에 그렇게 힘든 특수훈련을 받은 미 해병대의 모습은 치졸하고, 그들을 위협하는 베트콩 저격수는 어린 소녀였죠. 과연 우리가 아는 베트남전의 이미지가 정말 있었던 것인지, 과연 전쟁은 누가 누구와 싸우는 것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예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부터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문제작을 만들어온 스탠리 큐브릭이 베트남전에 손을 댄 영화다. 탁월한 전쟁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어떤 한 시기의 특수한 전쟁을 다루면서도 전쟁 자체에 공통적으로 스민 비인간적 요소를 비판한다. 특히 영화 초반 하트먼 상사가 훈련병들의 따귀를 때리고 변태라 부르는 등, 인격적 모욕을 퍼붓는 걸 서슴지 않고, 동기들은 ‘고문관’ 동료를 위로하긴 커녕 따돌리고 괴롭히는 모습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우리나라 군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전쟁을 준비한다는 건, 즉 군인이란 존재를 만드는 건 인격을 지우는 과정이 필수적인 일일지 모른다.

이름이 곧 의미가 된 배우

영화계라는 자리가 원래부터 주어진 장소가 아니고 전혀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결국 지금의 안성기는 영화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배우다. 비록 지난해 <신기전> 이후 “요즘 영화계가 어려워서 작년에도 뭘 한다고 했다가 안 되서 멋쩍게 된”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는 새로운 작품을 찾고 또 준비한다. 작년의 경험 때문인지 “준비하는 작품이 하나 있긴 한데 아직 계약을 하지 않아 말하긴 힘들어요. 하게 되면 초여름 즈음 촬영 시작할 것 같긴 한데”라고 조심스레 말하지만 어쨌든 한국에 영화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바깥에 있는 안성기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안성기가 빠진 한국영화를 상상하기 어려우니까. 배우 안성기는 그런 존재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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