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에 입학하면 모두들 감기 바이러스를 공유하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돌려 읽었던 적이 있다. 일본에 대해 나쁘면 나빴지 좋은 선입관을 가지진 않았을 대학 신입생들이 한 일본 작가의 소설을 필독한 건 제법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건 아마도 하루키의 글이 스스로 인정하듯 일본 문학의 전통보다는 스콧 피츠제럴드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 현대문학에 그 뿌리를 둔, 전통에서 자유로운 소설이어서는 아니었을까. 비록 무대는 일본의 대학이었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대학생활과 고민, 연애는 일본인의 지역적 특수성보단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대학생, 혹은 청춘이라는 어떤 시기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를 풀어낼 뿐이다.

대안공간 루프에서 진행 중인 ‘Re:Membering Next of Japan’展을 볼 때의 느낌 역시 그렇다. 2차 대전 시기의 할복한 실제 일본 군인을 모델로 극렬한 패러디를 보여준 코이즈미 메이로의 작업을 제외하면 30대 일본 작가들이 만든 영상작업은 무국가적인 느낌이다. 가령 다양한 드로잉이 잔상을 남기며 변화하는 스즈키 히라쿠의 작업은 형태 변화 자체가 주는 순수한 시각적 쾌감에 의존하고, 거울과 카메라를 이용한 츠다 미치코의 작업은 그 트릭 자체가 흥미로울 뿐이다. ‘사회와 관계성조차 내면의 주관적 시선 속에서 바라본다’는 전시 소개글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다분히 개인적인 태도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속한 공간의 문화적 속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나라의 관람객에게 더 편하게 다가온다. 사적인 경향이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경향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은 어쩌면 몇 년째 에쿠니 가오리와 이누도 잇신에 열광하는 지금 세대를 설명하는 열쇠일지도 모르겠다.

<그루지>
2005년│감독 시미즈 다카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적 스승을 미국의 현대문학에서 찾았지만 결국 모든 흐름은 평평하게 높낮이가 맞춰지는 법이다. 일본 공포영화 <주온>에 대한 헐리웃의 관심도 그런 맥락이다. 이젠 유명 인사가 된 <주온>의 토시오는 일본 전통 귀신이라기보다 일본식 공포물의 극단적 전형일 뿐이다. 즉 전통 문화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최대의 무서움을 전해주는 캐릭터이고, 우리나라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관객 역시 두려워할 여지가 다분했다. 그래서 비록 원작 감독을 다시 기용하긴 했지만 결국 미국판 <주온>인 <그루지>가 만들어졌다는 건, 미국이 일본 문화에 관심을 보였기 보단 일본에서 어디에서나 통할만한 공포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걸 보여준다.

‘인도현대미술 – 세 번째 눈을 떠라’展
04.17~06.07│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일본현대미술 전시가 흥미로운 건 일본의 전통 뿐 아니라 소위 ‘재팬 애니팝’이라 불리는 일본만의 독특한 현대 미술 경향에 익숙한 관람객의 기대를 배반한다는 점이다. 일본 작가는 만화와 오타쿠와 캐릭터를 가지고 작업할 것만 같은 선입관이 얼마나 낡은 것인지 보여준 셈인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인도현대미술 – 세 번째 눈을 떠라’展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왠지 구도적인 느낌의 미술을 보여줄 것만 같은 인도 작가들이 팝아트 스타일의 ‘삽타 파티의 차루’나 고철을 이용한 설치 미술 ‘메탈박스’ 같은 작업을 한다는 걸 본다면 우리가 다른 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편견 혹은 기대감이 21세기엔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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