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이 글에는 ‘알리타: 배틀 엔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미미’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여쁜 외모에 색색이 고운 옷을 가진 소녀는 내 심장을 훔쳤다. 미미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인형이었다. 미미라는 이름도 내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들리는 ‘미영’이라는 이름과는 한 끗 차이가 아닌,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이름. 미미는 나의 일상을 오색찬란하게 수놓는 존재였다. 온종일 미미만 바라보아도 물리지가 않았다.
이별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보따리장수처럼 커다란 가방에 옷을 담아 발품을 들여서 옷을 팔러 다녔던 아빠가 미미를 쏘아보았다. 그날따라 허탕을 치고 돌아온 아빠의 눈에는 종이인형이 작은 사치가 아니라 사치로 보였나 보다. 아빠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 말라며 가위로 종이인형을 삭둑삭둑 자르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볼멘소리가, 울음이 차올랐지만 꿀꺽 삼켰다. 어둑어둑한 백열등 아래 아빠의 옆얼굴도 퍽 슬퍼 보였던 까닭이다.
스크린 속 알리타를 마주하면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슬픈 추억이라서 통째로 삼켰던 그 시간들이 밀려나왔다. 빛바랜 시간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2563년. 화성 연합 공화국(URM)과의 전쟁으로 공중도시들의 대추락이 있은 지 300년 후. 마지막으로 남은 공중도시 ‘자렘’만 강력한 공학으로 떠 있다. 고철도시는 자렘으로 튜브를 통해 물자를 올려 보내고, 자렘에서 버려지는 고철을 떠안는 것이 존재 이유다. 경찰이 사라지고 총이 금지된 고철도시는 현상금 사냥꾼인 헌터워리어를 고용하여 치안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유를 불문하고 자렘에 거역하면 사형이다.
고철 처리장에서 사이보그 전문의 다이슨 이도(크리스토프 왈츠)는 인간 두뇌만 멀쩡한 생체 사이보그를 발견한다. 이도는 바디를 달아주고, 모든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죽은 딸의 이름인 알리타(로사 살라자르)까지 내어준다. 알리타에게는 대추락 이후 전 세계 생존자가 모인 고철도시의 풍경이 경이롭다. 알리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은 소년 휴고(키언 존슨)를 만난다. 휴고는 알리타가 자렘으로부터 왔음을 일깨우고, 고철도시 최고의 스피드 게임 ‘모터볼’의 희열을 만끽하게 해준다.
휴고는 시궁창과도 같은 고철도시에서 자렘으로 가는 꿈을 붙든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사실 그는 알리타와 같은 사이보그의 부품을 뺏어서 암시장에 파는 부품 강도다. 일정액을 모으면 모터볼의 운영자인 벡터(마허샬라 알리)가 자렘행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벡터는 휴고에게 천국의 종노릇을 할 바에는 지옥의 지배자가 낫지 않느냐며 고철도시에 남기를 권하지만, 휴고의 꿈은 자못 간절하다.
이도의 전처이자 모터볼 최고의 기술자 시렌(제니퍼 코넬리)은 알리타와 마주치고 깜짝 놀란다. 이도가 죽은 딸을 위해 만들었던 바디임을 한눈에 알아차린 것이다. 자렘에서 딸의 병 때문에 쫓겨났던 시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시 올라가려고 한다. 한편 자렘의 노바는 벡터나 그루위시카(잭키 얼 헤일리)의 눈을 통해 고철도시를 지켜보면서, 벡터에게 자렘의 위협이 될 알리타를 죽이고 심장만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알리타를 딸처럼 아끼는 이도는 그녀가 평범한 10대 소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알리타는 흐릿한 기억을 질러 전사였던 과거와 마주하고자 한다.
‘알리타: 배틀 엔젤’은 키시로 유키토의 만화 ‘총몽’(銃夢)에 매료된 제임스 카메론이 오랜 시간 한껏 공을 들인 프로젝트다. ‘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 ‘에이리언 2’의 리플리, ‘아바타’의 네이티리처럼 그가 그려온 강인한 여성들의 연장선상에 사이보그 소녀 알리타가 추가되었다.
‘아바타’ 이후 10년 만에 재회한 제임스 카메론과 VFX 스튜디오 웨타 디지털(Weta Digital)은 26세기라는 미지의 시간을 공중도시 ‘자렘’, 고철도시, 그루위시카의 지하세계라는 공간으로 실감나게 구현했다. 그 안에서 기계의 몸을 가진 사이보그가 이물감 없이 어우러진다. 또한 모터볼 게임의 쾌감도 상당하다. 무엇보다도 실사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CG 캐릭터 알리타가 극히 매력적이다. 제작과 각본을 겸한 제임스 카메론은 연출은 B급 감성이 넘치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에게 맡겼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특유의 하드고어한 디테일이 뚝뚝 묻어난다. 종합하면 일반관보다는 특화관에서 관람할, 12세 관람가지만 어린이 관객에게는 잔혹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도의 사이버코어 분석에 의하면, 알리타는 평범한 십대의 뇌를 가졌지만 놀라우리만큼 강력한 심장을 갖고 있다. URM 기계 종족 최후의 생존자 ‘99호’가 바로 알리타의 과거다. 평범한 전사가 아니라 최첨단 사이보그 병기였다. 기억의 편린들만 있던 순간에도, 그녀는 전사의 영혼을 가졌기에 광전사가 쓰던 바디와 교감한다. 그녀의 몸은 광전사들이 쓰던 격투술인 기갑술을 기억한다. 알리타는 몸싸움 뿐 아니라 말싸움에도 지지 않을 만큼 배포도 두둑하다. 그렇지만 오렌지와 초콜릿과 강아지가 좋은, 웃음도 눈물도 정도 많은 10대 소녀다.
나에게 ‘알리타: 배틀 엔젤’은 한 소녀의 성장담으로 다가온다. 알리타가 모터볼을 하는 순간에도, 기갑술을 펼치는 순간에도, 아버지 같은 이도의 슬픔을 헤아리는 순간에도 감정의 진폭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알리타는 전사이기에 싸움에 끌리지만, 소녀이기에 특별한 감정에 끌리기도 한다. 그녀의 강한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존재는 휴고다. 너처럼 인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사이보그라서 다가서기를 멈칫하는 알리타를 향한 휴고의 진심 어린 한마디다. 휴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도, 줄 수도 있는 알리타는 그에게 심장을 내어주면서 말한다. 난 적당히는 몰라.
사랑을 위해 심장까지 내어주는 어마어마한 소녀 알리타를 만났다. 싱긋 웃으면 어여쁘고, 또르륵 눈물을 흘리면 처연한 소녀다. 감정의 온도가 오롯이 느껴지는 이 사이보그 소녀를 적당히 좋아하기는 힘들 듯싶다. 종일 그녀만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을 듯싶다.
오래전 그날처럼.
2월 5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어릴 적, ‘미미’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여쁜 외모에 색색이 고운 옷을 가진 소녀는 내 심장을 훔쳤다. 미미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인형이었다. 미미라는 이름도 내가 붙여준 이름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들리는 ‘미영’이라는 이름과는 한 끗 차이가 아닌,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이름. 미미는 나의 일상을 오색찬란하게 수놓는 존재였다. 온종일 미미만 바라보아도 물리지가 않았다.
이별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보따리장수처럼 커다란 가방에 옷을 담아 발품을 들여서 옷을 팔러 다녔던 아빠가 미미를 쏘아보았다. 그날따라 허탕을 치고 돌아온 아빠의 눈에는 종이인형이 작은 사치가 아니라 사치로 보였나 보다. 아빠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지 말라며 가위로 종이인형을 삭둑삭둑 자르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볼멘소리가, 울음이 차올랐지만 꿀꺽 삼켰다. 어둑어둑한 백열등 아래 아빠의 옆얼굴도 퍽 슬퍼 보였던 까닭이다.
스크린 속 알리타를 마주하면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슬픈 추억이라서 통째로 삼켰던 그 시간들이 밀려나왔다. 빛바랜 시간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2563년. 화성 연합 공화국(URM)과의 전쟁으로 공중도시들의 대추락이 있은 지 300년 후. 마지막으로 남은 공중도시 ‘자렘’만 강력한 공학으로 떠 있다. 고철도시는 자렘으로 튜브를 통해 물자를 올려 보내고, 자렘에서 버려지는 고철을 떠안는 것이 존재 이유다. 경찰이 사라지고 총이 금지된 고철도시는 현상금 사냥꾼인 헌터워리어를 고용하여 치안을 유지한다. 그리고 이유를 불문하고 자렘에 거역하면 사형이다.
고철 처리장에서 사이보그 전문의 다이슨 이도(크리스토프 왈츠)는 인간 두뇌만 멀쩡한 생체 사이보그를 발견한다. 이도는 바디를 달아주고, 모든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죽은 딸의 이름인 알리타(로사 살라자르)까지 내어준다. 알리타에게는 대추락 이후 전 세계 생존자가 모인 고철도시의 풍경이 경이롭다. 알리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은 소년 휴고(키언 존슨)를 만난다. 휴고는 알리타가 자렘으로부터 왔음을 일깨우고, 고철도시 최고의 스피드 게임 ‘모터볼’의 희열을 만끽하게 해준다.
휴고는 시궁창과도 같은 고철도시에서 자렘으로 가는 꿈을 붙든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사실 그는 알리타와 같은 사이보그의 부품을 뺏어서 암시장에 파는 부품 강도다. 일정액을 모으면 모터볼의 운영자인 벡터(마허샬라 알리)가 자렘행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벡터는 휴고에게 천국의 종노릇을 할 바에는 지옥의 지배자가 낫지 않느냐며 고철도시에 남기를 권하지만, 휴고의 꿈은 자못 간절하다.
이도의 전처이자 모터볼 최고의 기술자 시렌(제니퍼 코넬리)은 알리타와 마주치고 깜짝 놀란다. 이도가 죽은 딸을 위해 만들었던 바디임을 한눈에 알아차린 것이다. 자렘에서 딸의 병 때문에 쫓겨났던 시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다시 올라가려고 한다. 한편 자렘의 노바는 벡터나 그루위시카(잭키 얼 헤일리)의 눈을 통해 고철도시를 지켜보면서, 벡터에게 자렘의 위협이 될 알리타를 죽이고 심장만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알리타를 딸처럼 아끼는 이도는 그녀가 평범한 10대 소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알리타는 흐릿한 기억을 질러 전사였던 과거와 마주하고자 한다.
‘알리타: 배틀 엔젤’은 키시로 유키토의 만화 ‘총몽’(銃夢)에 매료된 제임스 카메론이 오랜 시간 한껏 공을 들인 프로젝트다. ‘터미네이터’의 사라 코너, ‘에이리언 2’의 리플리, ‘아바타’의 네이티리처럼 그가 그려온 강인한 여성들의 연장선상에 사이보그 소녀 알리타가 추가되었다.
‘아바타’ 이후 10년 만에 재회한 제임스 카메론과 VFX 스튜디오 웨타 디지털(Weta Digital)은 26세기라는 미지의 시간을 공중도시 ‘자렘’, 고철도시, 그루위시카의 지하세계라는 공간으로 실감나게 구현했다. 그 안에서 기계의 몸을 가진 사이보그가 이물감 없이 어우러진다. 또한 모터볼 게임의 쾌감도 상당하다. 무엇보다도 실사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CG 캐릭터 알리타가 극히 매력적이다. 제작과 각본을 겸한 제임스 카메론은 연출은 B급 감성이 넘치는 로버트 로드리게즈에게 맡겼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특유의 하드고어한 디테일이 뚝뚝 묻어난다. 종합하면 일반관보다는 특화관에서 관람할, 12세 관람가지만 어린이 관객에게는 잔혹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도의 사이버코어 분석에 의하면, 알리타는 평범한 십대의 뇌를 가졌지만 놀라우리만큼 강력한 심장을 갖고 있다. URM 기계 종족 최후의 생존자 ‘99호’가 바로 알리타의 과거다. 평범한 전사가 아니라 최첨단 사이보그 병기였다. 기억의 편린들만 있던 순간에도, 그녀는 전사의 영혼을 가졌기에 광전사가 쓰던 바디와 교감한다. 그녀의 몸은 광전사들이 쓰던 격투술인 기갑술을 기억한다. 알리타는 몸싸움 뿐 아니라 말싸움에도 지지 않을 만큼 배포도 두둑하다. 그렇지만 오렌지와 초콜릿과 강아지가 좋은, 웃음도 눈물도 정도 많은 10대 소녀다.
나에게 ‘알리타: 배틀 엔젤’은 한 소녀의 성장담으로 다가온다. 알리타가 모터볼을 하는 순간에도, 기갑술을 펼치는 순간에도, 아버지 같은 이도의 슬픔을 헤아리는 순간에도 감정의 진폭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알리타는 전사이기에 싸움에 끌리지만, 소녀이기에 특별한 감정에 끌리기도 한다. 그녀의 강한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존재는 휴고다. 너처럼 인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사이보그라서 다가서기를 멈칫하는 알리타를 향한 휴고의 진심 어린 한마디다. 휴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도, 줄 수도 있는 알리타는 그에게 심장을 내어주면서 말한다. 난 적당히는 몰라.
사랑을 위해 심장까지 내어주는 어마어마한 소녀 알리타를 만났다. 싱긋 웃으면 어여쁘고, 또르륵 눈물을 흘리면 처연한 소녀다. 감정의 온도가 오롯이 느껴지는 이 사이보그 소녀를 적당히 좋아하기는 힘들 듯싶다. 종일 그녀만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을 듯싶다.
오래전 그날처럼.
2월 5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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