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
Q. 15년 만에 새 앨범을 내셨다.“딱히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청년 때였죠. 세상 모든 게 답답하고 내 안에서 들끓는 것은 모두 끄집어내야 하는 시기였어요. 나를 닮은 모든 것을 찾아다녔죠.”
한영애는 이제껏 자신을 닮은 음악을 해왔다. 모두가 곱게만 노래할 때 탁성으로 내질렀던 가수. 대적할 여가수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무소의 뿔처럼 꼿꼿이 달려왔다. 보는 이를 어딘가로 여행하게 하는 무당과 같은 가수. 연극이 가미된 이채로운 무대. 천둥과 같은 목소리. 진취적인 음악들. 돌이켜보면 한국이란 땅에서 한영애라는 가수가 등장했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다. 그녀의 옆에는 이정선, 엄인호, 김수철, 송홍섭, 윤명운, 이병우, 신윤철 등 장인들이 있었다. ‘누구 없소’ ‘코뿔소’ ‘바라본다’ 등 한 번 들으면 지울 수 없는 경이로운 음악들이 한영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15년 만에 발표한 정규 6집 ‘샤키포’는 늘 그랬듯이, 역시나 한영애로 가득 찬 앨범이었다. 자신만의 아우라(우리나라에서 ‘아우라’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가수가 한영애다)는 여전하지만 트렌디한 어법도 피하지 않았다. 기적을 부르는 주문 ‘샤키포’, 그리고 ‘너의 편’과 같은 노래는 듣는 이에게 힘을 실어준다. 기적이 별건가? 바로 이런 앨범이 기적이다. 2015년 올해로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한영애는 봄부터 전국투어를 통해 팬들과 만날 예정이다.
한영애: 밀린 숙제를 한 기분이다. 체증은 좀 내려갔지만, 혹시 또 소음덩어리가 아닐까? 뭐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다. 요새는 음악들이 많이 나오니까. 음악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많은 소리가 있지 않나. 그래도 앨범 하나 내고 나니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나 살짝 궁금하더라. 난 원래 그런 것이 궁금하지 않았는데.
Q.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앨범에 대한 갈증 있었을 것 같은데.
한영애: 그렇게 오래 된지 몰랐다. 15년이 된 지는 누군가 말해줘서 알게 됐다. 가수는 늘 앨범에 대한 갈증은 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새 음악에 대한, 또 새 세상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동안 내 정신이 좀 자유롭지 못했다.
Q. 15년이 흐른 만큼 변화도 있을 것 같다.
한영애: 예전에는 내 노랫말에 은유와 상징이 많았다.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는 직선적인 가사가 많아졌다. 사운드 면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가미됐다. 사운드적인 면을 강조하다보니 멜로디는 조금 단순해진 면이 있다. 처음에는 이게 과연 나다운 음악일까 하는 어색함이 있었다. 예전 내 음악에는 밴드의 강한 사운드가 강조되곤 했다. 중간에 간주에 기가 막힌 기타 연주가 나오고, 그러면서 전체적인 그림이 달라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데 사운드와 이미지 중심으로 가다보니까 예전과는 음악이 좀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밴드 형태도 바뀌었고.
Q. 첫 곡 ‘회귀’부터 전자음들이 많이 들어가고,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한영애: 더 과격하게 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난 가요의 느낌을 내려 했다. 때문에 그 곡을 프로듀스한 친구는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 친구는 미술로 말하면 작가주의적인 음악을 해왔다. 대중음악은 이번 내 앨범을 통해 처음 해본 친구다. ‘회귀’는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음악을 풀어낸 것이다. 이 곡의 느낌이 앨범 전체와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집약돼 있는 곡이기도 하다. 가사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길 떠났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힘’이라는 문장이다. 내가 써놓은 것을 내가 읽고 용기가 생겼던(크게 웃음) 그런 경험을 했다. Q. 한영애는 블루스, 록 뮤지션이라는 이미지가 있기도 한데, 신보에서는 발라드 곡들이 꽤 많아진 것 같다.
한영애: 이번 앨범에서는 다른 작곡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난봄부터 내게서 곡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막 쏟아져 나오지는 않더라. 그래서 여기저기 곡을 의뢰했고, 수많은 곡들이 내게 왔다. 그 중에 아름다운 곡들을 고르다보니 발라드가 전보다 많아졌다. 발라드라는 표현보다는 서정적인 곡이 많아졌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Q. 강산에, 방준석, 이은규, 김도현 등 여러 작곡가들이 참여했다. 작곡가들을 선정한 기준이 있었나?
한영애: 사람보다는 그 음악을 먼저 봤다. 강산에의 경우는 어느 날 먼저 연락이 왔다. 작업을 하다가 곡이 나왔는데 영애 누나가 하면 딱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곡이 무척 좋아서 선택했다. 늘 그렇듯 강산에의 곡은 따스하다.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도 곡이 좋아서 선택한 경우다.
Q. 방준석이 만든 ‘샤키포’는 기적의 메시지를 담은 곡이다.
한영애: 앨범을 준비하면서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는데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희망찬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정말 모두가 이견 없이 똑같은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다들 지쳐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가사는 황경신 작가와 함께 썼다. 황 작가가 “언니랑 같이 가사를 쓰면 왜 이렇게 긍정적인 글들이 나오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더라. ‘샤키포’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올 거야. 기적은 일어 날거야’라는 의미의 주문이다. 저기 앉아있는 인형의 이름이기도 하고.
한영애가 친필로 써준 ‘샤키포’. 샤키포는 한영애의 인형 이름이기도 하다
Q. 최근에 경험한 기적이 있다면?
한영애: 일상을 잘 견뎌내는 것도 기적 아닌가? 즐겁게 행복하게.
Q. ‘너의 편’ ‘샤키포’가 ‘21세기의 한영애’라는 생각을 했다. 트렌디한 느낌인데 한영애의 목소리가 얹어지면 딱 한영애의 곡이 된다.
한영애: 그건 뭐, 어떤 가수나 마찬가지 아닌가. 항상 곡에 맞게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동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트렌디한 사운드가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차용하지는 않는다.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그 당시에는 산뜻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색할 수 있다. 트렌드를 쫓기보다는 늘 자기를 닮은 것을 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Q. 하지만 역시 기존의 한영애를 연상케 하는 곡들은 있다. ‘크레이지 카사노바’는 ‘코뿔소’를 떠올리게 하더라.
한영애: 그 노래는 가사가 재밌지 않나? 황경신과 그 가사를 쓰면서 무척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황 작가와는 오랜 친구다. 우리는 자존심이 필요 없는 친구다. 가사를 쓰면서 내 이야기를 많이 수용을 해줬다. 내가 옆에서 계속 잔소리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고맙게도 싫은 내색 안 하고 너무 좋은 가사를 써줬다. 이렇게 좋은 노랫말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Q. 최근에 본인의 상태가 매우 맑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새 앨범의 음악들도 밝다. 힘이 넘친다.
한영애: 정말이다. 앨범을 한창 녹음할 때에는 내 몸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래서 밝지 않은 곡을 노래할 때에는 걱정도 되더라. 노래가 처절하게 되지 않을까봐.
Q. 가사 없이 전자음으로 이루어진 곡 ‘그림 하나’가 마지막 트랙이다. 이 곡을 마지막에 배치한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고 들었다.
한영애: 그 곡은 내가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을 배워서 처음으로 만든 곡이다. 프로그램을 배우고 나서 다루는 법을 잊어버릴까봐 얼른 만든 곡이다. 약 1년 반 전에 만들었다. 그때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음악이 뭘까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Q. 컴퓨터 음악을 배우시다니 의외다. 전자음악을 하고 싶으셨던 건가?
한영애: 글쎄? 일렉트로닉 음악이다, 아니다 그런 경계를 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적절히 자신에게 맞게 적절히 사용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다. 사실 ‘그림 하나’는 그렇게 디테일한 전자 사운드를 가진 곡은 아니다. 전문가들이 들으면 어설픈 부분을 알아챌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설픈 대로 의미가 있는 곡이었기 때문에 수록하게 됐다. Q. 사람들이 한영애를 설명할 때 유독 ‘카리스마’ ‘아우라’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한영애: 아우라를 ‘개성’이라고 풀이하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잘 해야 되지 않나? 난 내가 노래 잘하는 가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다를 것 같다. 난 노래, 가사가 가진 공간을 보여주고 싶다. 미술로 친다면 그림보다는 조각품처럼 표현하고, 또 노래하고 싶다. 내 속에 있는 것,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싶다.
Q. 그래서인지 한영애의 공연은 연극적인 요소가 강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것을 넘어 연기를 하기 시작한 것도 한영애였다. 라이브음반 ‘아우성’의 속지에서는 공연을 소리연극이라고 말했다.
한영애: 아무래도 내가 연극을 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요새는 연극적인 퍼포먼스를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정교하게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연기적 요소가 많으면 그것이 노래를 덮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되는 부분도 있다.
Q. 이제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한영애: 으악! 너무 부끄럽다. 연극 했던 세월, 중간의 공백기 빼고 25년으로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40주년 투어를 해야겠지. 봄부터 ‘40주년 전국 투어’를 무지막지로 많이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웃음)
Q. 예전 이야기를 좀 여쭤보고 싶다. 첫 레코딩이 1977년 이정선, 이주호, 김영미와 함께 한 해바라기 1집이었다.
한영애: 명동의 가톨릭여학생 회관 안에 100명 쯤 들어가는 해바라기 살롱이 있었다. 그곳에서 김의철이 해바라기라는 그룹을 운영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씩 음악 발표회를 가졌다. 의철 오빠를 알게 되면서 나도 함께 노래하게 됐다. 그러다 의철 오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이정선이 해바라기를 이어받았다. 그 뒤로 3년 정도 공연을 계속 하다가 난 연극 쪽으로 넘어갔다. 그 뒤로는 7~8년 정도 음악을 쉬었다. 그때는 딱히 가수가 될 생각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지. 청년 때였다. 세상 모든 게 답답하고 내 안에서 들끓는 것은 모두 끄집어내야 하는 시기였다. 나를 닮은 모든 것을 찾아다녔던 시기다.
Q. 하지만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한영애: 1985년도에 솔로데뷔를 했다. 이후 엄인호, 이정선을 주축으로 이광조, 김현식, 나 이렇게 블루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촌블루스를 창단하게 됐다.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는데 요샛말로 대박이 터졌다. 1986년 여름 샘터파랑새극장에서 열린 신촌블루스의 첫 공연을 난 잊을 수 없다. 그때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김현식은 언더그라운드의 왕자였고, 이광조 역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때였다. 이정선과 엄인호는 자신들의 확실한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나만 무명이었던 것이다. 공연을 보러 온 이들이 처음에는 “한영애가 누구야”라고 했다가 노래가 끝난 다음에는 “아, 저 가수가 한영애구나”라며 감탄을 하며 돌아갔다. Q. 솔로앨범 2집 ‘바라본다’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본인도 동의하나?
한영애: 1집은 노래를 오래 쉬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프로듀서가 하자는 데로 많이 따라간 앨범이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제외한 다른 곡에서는 나를 많이 죽인 앨범이었다. 1집을 들으면서 ‘아, 이건 날 닮은 거 같지 않은데 내가 좀 기획을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발 나를 닮은 음악을 하자’는 마음으로 내가 직접 기획을 했다. 그때부터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 속이 후련한 앨범이었다.
Q. ‘누구 없소’ ‘루씰’, ‘코뿔소’도 좋지만 ‘바라본다’는 지금 들어도 놀라운 곡이다.
한영애: 그 곡은 가사를 쓴 다음에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고민을 하다가 김수철에게 찾아갔다. 김수철이 작곡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김수철에게 “‘사랑하리라’ 이 부분은 합창을 하고 싶다. 그 위로 내가 애드립을 얹으면 좋을 것 같다” 이런 식을 설명을 하니 김수철이 “곡 다 나왔네” 이러면서 흔쾌히 작곡을 해줬다. 가사를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살려줬다. 정말 고마웠다.
Q. ‘바라본다’라는 제목은 무슨 의미인가?
한영애: 내가 멍청히 바라보는 걸 워낙 좋아한다. 그냥 보는 거. 눈 두는 거. 아무 생각 없이.
Q. 한영애라는 가수는 후배들에게 큰 산과 같은 존재다.
한영애: 나도 선배를 보고 “아, 그래 저 분이 계시지”라고 의지하곤 한다. 하지만 난 후배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함께 음악을 해나가는 동료 말이다.
Q. 새 앨범 발매 기자회견에서 “살면서 가장 좋은 것이 무대라는 것을 발견했고, 또 그 생각이 변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영애: 그 중에서도 노래하는 거. 그게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발견한 것 중 가장 재밌는 일이다. 다른 재밌는 일이 있으면 노래 그만둘 지도 모르지.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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