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극적인 참사가 낳은 수많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제 음악이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무대에 오른 제프 벡은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다. 진심이 담긴 거장의 연주는 시름에 빠진 관객들에게 안식의 순간을 제공했다. 제프 벡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의 파동은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갈고닦은 명인의 그것이었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듯한 거장의 면모도 멋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젊은이처럼 몰아붙이는 강렬한 에너지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기타라는 악기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흔들어놓을 수 있는지, 음악이 얼마나 위대한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27일 제프 벡의 두 번째 내한공연이 열린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은 제프 벡을 보러 온 관객들로 가득 찼다. 2010년 첫 내한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기타리스트들, 그리고 기타를 등에 맨 학생들이 즐비했다.

6시 6분, 암전이 되자 제프 벡은 텔레캐스터를 들고 무대에 나왔다. 강렬한 인트로 후 기타를 스트라토캐스터로 바꾸더니 ‘나인(NIne)’으로 표독스러운 연주를 펼치기 시작했다. 일렉트릭 기타의 가능성을 최대한대로 뽑아낸 섬세하면서도 폭발적인 4년 전 내한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 이상인 것 같았다. 연주가 녹슬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졌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걸까?



이번 공연은 최근 제프 벡의 투어를 함께 돌고 있는 기타리스트 니콜라스 마이어가 함께 했다. 니콜라스가 잔잔하게 아르페지오를 연주하자 거기에 맞춰 제프 벡은 익숙한 코드 연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점차 곡의 얼개가 드러나고, 그것이 지미 헨드릭스의 ‘리틀 윙(Little Wing)’임을 알아챈 관객들은 엄청난 함성을 질러댔다. 이외에도 제프 벡은 존 맥러플린(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의 ‘유 노우, 유 노우(You Know, You Know)’ 타미 볼린(빌리 코뱀)의 스트라투스(Stratus)’ 등 다른 기타리스트들의 곡을 해석해 들려줬다. 전설들의 연주가 이 지구 위 최고의 기타리스트의 손길을 통해 흐르는 순간이었다.

‘피플 겟 레디(People Get Ready)’를 연주할 때는 짐짓 경건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대 위에 로드 스튜어트는 없었지만, 제프 벡의 ‘노래하는 기타’는 보컬의 부재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슬라이드 바를 중심으로 연주된 ‘엔젤(풋스텝스)(Angel(Footsteps))’은 공연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지판 위를 미끄러지는 슬라이드 바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제프 벡이 현 위로 슬라이드 바를 갖다 대자 마법과 같은 소리의 향연이 펼쳐졌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연신 호흡을 다잡았다. ‘웨어 워 유(Where Were You)’는 제프 벡의 엄지손가락과 음정을 조절하는 암(Arm)과 음량을 조절하는 볼?놉을 이용해 소리 자체의 파형을 미세하게 표현하는 그만의 기타 소리가 빛을 발했다.

역시 제프 벡의 진가는 블루스와 록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굿바이 포크 파이 햇(Goodbye )’에 이어 메들리로 흐른 ‘브러쉬 위드 블루스(Brush With Blues)’, 그리고 빅 블락(Big Block)에서는 제프 벡의 선 굵은 벤딩이 단연 일품이었다. 이외에 ‘스트라투스’ ‘블루 윈드(Blue Wind)’ ‘유 네버 노우(You Never Know)’에서는 제프 벡 특유의 재즈 록·퓨전 스타일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었다.



제프 벡과 짝을 이룬 기타리스트 니콜라스 마이어의 중동 풍의 멜로디가 중심을 이룬 신곡들인 ‘예민(Yemin)’ ‘이집션(Egyptian)’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예민’에서 일렉트릭 클래식기타를 화려하게 연주하는 마이어는 마치 젊은 시절의 존 맥러플린을 보는 것 같았다. 성향이 다른 두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묘하게 어울렸다.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Danny Boy)’와 비틀즈의 ‘어 데이 인 더 라이프(A Day In The Life)’에서는 원곡의 아우라를 위협하는 제프 벡의 해석력이 빛났다. 신기에 가까운 톤이 멜로디를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앵콜에서 제프 벡은 ‘롤링 앤 텀블링(Rollin’ and Tumblin’)’을 원곡과 전혀 다르게 연주해 스릴감을 전했다. 업비트의 리듬 위로 제프 벡은 마치 블루스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 다양한 리프와 프레이즈를 쏟아냈다. 그 안에서 여러 블루스의 고전들이 스쳐갔다. 마치 자신이 연습했던 블루스를 한보따리 풀어놓는 것 같았다. 블루스로 얼마든지 다른 것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대목에서 제프 벡은 정말 젊은이처럼 펄펄 날았다. 사람이 기타 한 대로 저렇게나 자유로워질 수 있구나!



4년 전 내한공연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지막 곡으로 선택된 ‘커즈 위브 엔디드 애즈 러버스(Cause We’ve Ended As Lovers)’가 흐르자 공연장은 숙연해졌다. 한 음, 한 음이 절대음이었다. 버릴 것이 없었다. 연주를 마친 제프 벡이 기타를 번쩍 들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음악평론가 김성환 씨는 “제프벡, 그의 마음과 손으로 연주하는 기타는 올림픽홀에 모인 관객들, 지금 공허함과 분노 속에 지쳐가는 한국인들의 가슴을 진심으로 위로했다. 그것은 화려한 연주 테크닉만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따뜻함이었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음악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였다”라고 전했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프라이빗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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