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에서 계속) 학업성적이 우수했던 김목인은 학교 선생님과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연극영화과 진학을 포기했다. 1997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간 그는 영화와 음악 동아리 선택을 놓고 고민하다 영화를 공부하는 ‘시각매체’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헤비메탈 밴드들이 충주 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구경을 갔는데 레드 제플린으로 시작해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로 끝나는 짬뽕 스타일이더군요. 그때 자신 있으면 무대에 올라와 연주해라 했을 때 저희 밴드 멤버들이 올라가려고 했었죠.(웃음) 저는 음악보다는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김목인)

당시는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기 이전의 아날로그 시절이었다. 영화 동아리에 가입한 김목인은 2학년 때까지 8mm 비디오촬영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편집 시설이 없어 완성작을 내지는 못했다. “그때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영화연출과 연기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관심 있는 걸 찍고 붙이면 영화가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당시로서는 첨단 기계 같아 열심히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그냥 친구들이 공연하는 걸 찍었죠. 그리고 홍대 쪽에 영화 수집하는 분이 운영했던 영화공간 ‘빛’에 들락거리며 영화역사에 나오는 영화들을 보고 비평하는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동대문에 있었던 독립영화협회 사무실에서 사용료를 내고 편집기를 사용했지만 작업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면서 체계적인 실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김목인)


2학년을 마치고 영화실무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아보기 위해 휴학을 한 그는 학교 선배가 운영한 청소년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영화잡지 ‘시네21’에 소개된 ‘필름in’의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16mm 필름 촬영 워크샵에 참여했다. “영화라는 게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일단 혼자가 아닌 집단 작업이고 프레임 안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후반 작업이란 걸 알게 되면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수강생들이 각자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찍기로 해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는데 제 작품이 채택되지 못해 그냥 스탭으로 일하려니 영 재미가 없더군요.”(김목인)

영화 쪽으로 빨리 재능을 인정받고 싶었던 그는 마음이 조급했다. 여름쯤에 영장이 나와 입대를 했다. 군 복무 중이었던 그해 말,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제대 후, 2001년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영화 쪽에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시네21’ 잡지에서 평론하는 동아리 선배, 친구들을 통해 비평작업을 해보려 영화비평공모전에도 출품했지만 당선되지는 못했다. “뭔가 해볼까 하는 생각에 학교 앞에 있던 사회과학 서적을 파는 서점에 갔는데 크라잉넛의 노래가 들어있는 아우어내이션 같은 인디음반을 팔더군요. 홍대 앞에 뭐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그러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제1회 프린지 페스티발 독립예술제 공연에서 ‘새봄에 핀 딸기꽃’과 ‘갱톨릭’이란 인디밴드의 공연을 처음 보았습니다. 부산출신인 ‘새봄에 핀 딸기꽃’의 여성보컬은 지금 복합문화공간 무대륙의 사장님이세요.”(김목인)


인디밴드의 공연을 본 후, 김목인은 세션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재즈피아노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 컴퓨터로 영화 편집 작업을 시작한 그는 피아노와 기타 소리를 비디오에 더빙하는 작업에 흥미를 가졌다. 홈레코딩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하게 인디레이블 카바레 사운드 홈페이지에서 5주년 기념앨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았다. 지미 헨드릭스 같은 록 음악을 피아노로 조금 연주해 캠코더로 녹음한 데모 CD를 만들어 보냈다. “기성곡 연주가 아니라 자작곡을 보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영화를 하면서 작품을 여러 번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던지라 신이 나더군요.”(김목인)

그때까지 김목인은 창작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곧바로 낙원상가에서 17만원짜리 키보드를 구입했다. 병실에 오래 입원해 꿈과 희망이 없는 환자의 모습을 생각하며 피아노를 반복적으로 친 창작 연주곡을 만들어 다시 보냈다. 덜컥 채택이 되었다. 바로 카바레 사운드 5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장기입원환자의 꿈’이다. 팀 이름이 필요하니 빨리 지으라는 재촉에 ‘가정용피아노를 위한 프로젝트’로 급하게 정했다. “가사 없이 연주만 했는데 곡에 대한 피드백이 조금 있었지만 사람들은 제 연주인지는 잘 모를 겁니다. 그땐 밴드들이 피아노에는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카바레사운드 작업실에 피아노가 없어 이성문 형과 충주 고향 집에 내러가 녹음을 했습니다. 형이 제 방에 있는 테이프 진열장을 보고 음악을 꽤 듣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김목인)


본격적으로 음악을 해보고 싶어 집에 있는 기타를 가지고 올라왔다. 2001년 5월. 당시 카바레 사운드에서 일했던 김민규(현 소속사 일렉트릭 뮤즈 대표)가 망원역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처음으로 작업실에서 밴드의 합주 모습을 구경했다. “갑자기 전문가들을 만났다 생각하니 당황스러웠지만 저를 써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때 제가 건반을 친다고 하니까 밴드 ‘오 브라더스’ 멤버들이 피아노로 로큰롤 곡도 치냐고 묻더군요. 뭔가 해보고 싶어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해 ‘오 브라더스’ 라이브 때 가끔 세션으로 피아노를 치게 되었습니다.”(김목인)(part4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