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광택이 아름답고 굴절률이 높으며 단단하고, 산출량이 적은 돌. 보석은 희소재화지만, 보석 자체에 부여된 가치는 사람들의 탐욕에 비례한다. 지난 3일 종방한 KBS2 일일드라마 ‘루비 반지’는 사랑과 성공에 눈이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페이스오프’, ‘배다른 자매’, ‘1인 2역’ 등 자극적인 소재는 시청자의 눈과 귀를 자극했지만, 언뜻 보기에 허무맹랑해 보이던 이야기가 마치 어디선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로 탈바꿈한 데는 극의 중심에서 상반된 성격의 두 여자를 자유로이 오간 배우 임정은의 공이 컸다.Q. 루비와 루나로 살았던 5개월간의 긴 여정이 끝났다. ‘루비 반지’는 초반에 ‘막장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으나 중반부를 지나 시청률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지난 2001년 가수 윤종신의 ‘해변 무드송’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며 데뷔한 그녀는 ‘변호사들’, ‘여자가 두 번 화장할 때’, ‘적도의 남자’ 등을 통해 쉼 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자로서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큰 욕심은 없다.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싶다”는 소박한 답변을 내놓는다. 한 작품을 마친 뒤 찾아온 평안함과 성취감에 감사한다는 그녀, 배우라는 이름의 껍데기를 걷어낸 자리에는 루비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배우 임정은’이 있었다.
임정은: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던 게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물론 ‘페이스오프’가 말이 되는 소재는 아니었다(웃음). 출연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그 부분에 흥미를 느꼈다. 드라마에서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소재이기도 했고.
Q. 시트콤 시간대 편성, 한때 62%의 시청률을 기록한 ‘젊은이의 양지’를 연출한 전산 PD의 작품 등 ‘루비 반지’는 기획 단계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다. 결과는 만족하는가.
임정은: 5개월간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기대보다 잘 돼서 모두가 기뻐했다. 전산 PD도 어깨가 무거웠을 거다. 근데 함께 작품을 해보니 성공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더라. 쉽게 갈 수도 있는데 매 장면에 많은 공을 들였다. 중요한 신에서 뒷모습을 찍는다거나 거울을 활용한 앵글 등 재밌는 장면이 많았다.
Q. ‘페이스오프’, ‘배다른 자매’ 등 막장 드라마에서 등장할 법한 장치들이 있어 연기하는 입장에서 ‘설득력 있는 감정 전달’에 대한 고민도 깊었겠다.
임정은: 이야기 전개가 빨랐고 ‘페이스오프’보다는 ‘루나의 욕망’에 초점이 맞춰졌다. 소재에 매몰되지 않고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풀어가려고 노력했다.
Q. ‘1인 2역’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또 이소연과 배역을 바꾸기 전에 연기한 부분은 5회 분량 정도뿐이지 않았나. 연기하며 어떤 부분에 집중했나.
임정은: 이소연과 내가 서로 골격, 목소리도 다르고 키 차이도 있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보다는 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 짧지만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또 최대한 눈에 보이는 부분들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
Q. 루비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저 정도까지 참을 수 있나?’ 하는 분들이 많았다(웃음). 연기하면서 본인도 답답함을 느꼈을 것 같다.
임정은: 오히려 루나를 연기하면서 마음 놓고 제멋대로 연기해보고 나니까 루비의 마음이 이해되더라. 루나의 삶은 욕망으로 점철돼있지만, 루비는 평범한 삶을 꿈꾼다. 답답한 면도 있었지만, 루비가 루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성격의 소유자라서 가능한 부분도 있었다. 물론 실제의 나라면 그 정도까지는 참지 않았겠지만(웃음).
Q. 파멸하는 루나를 보면서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엄마 유길자(정애리)의 편애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임정은: 정말 그렇다. 처음에 루나는 기껏해야 서울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리포터에 불과했다. 근데 정말 힘든 건 엄마였을 거다. 세상에 어떤 이가 남편이 다른 데서 나아온 자식을 그렇게 애지중지 기를 수 있겠나. 후반부에 엄마가 기자회견을 놓고 “루나가 죽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길러준 정을 생각해서 좀 살려 달라”고 했을 때 이해가 됐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Q. ‘루비 반지’의 러브라인도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페이스오프’라는 소재가 등장한 이유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게 얼굴인지 마음인지를 묻고 싶다’던 전산 PD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임정은: 드라마를 보는 분들 입장에서 ‘배경민(김석훈)이 아직도 페이스오프 사실을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는 게 십분 이해된다. 루나가 아닌 루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나인수(박광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경민이는 ‘멍청한 놈’, 인수는 ‘이상한 놈’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웃음). 작품이 끝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외모라는 것도 심리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 중 하나니까.
Q. ‘루비 반지’는 결국 사랑과 성공을 갈망했던 루나가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었다. 그 지점에서는 당신이 연기한 루나와 이소연이 연기한 루나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1인 2역을 맡아 선악을 오가는 연기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임정은: 기존에 맡아 보지 않은 역할을 연기했음에도 그런 평가를 받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나 자신도 감정을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고 자유로워졌다는 걸 느낀다. 전산 PD가 어떤 답을 주지 않고 “알아서 해라”고 말하며 믿어준 게 컸다. 진심으로 느낀 것을 담아내려고 했고, 그게 시청자들의 눈에도 보였다니 다행이다.
Q. 예전에 당신은 데뷔와 동시에 ‘제2의 심은하’라는 수식을 달고 나왔지만, 인터뷰 때는 늘 “나는 평범하다”고 답했다. 이제는 그 ‘평범함’이 단점이 아닌 매력으로 느껴진다.
임정은: 예전에는 그 평범함 때문에 통통 튀는 역할을 못 맡고 착한 역할만 연기해야 하는 제약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연기를 하다 보니 그런 평범함이 큰 장점이라는 걸 알겠더라. 나이를 먹을수록 할 수 있는 역할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내가 자연스러움을 담아낼 수 있는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Q. 분명 여배우는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결혼, 출산 등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임정은: 점점 더 연기가 재밌어질 것 같다(웃음). 원래 일에 큰 욕심이 없이 쉬엄쉬엄 하는 편이었지만, 나이를 먹음에 따라 다양한 감정선을 표현할 수 있게 되니까 요즘 들어 새삼 연기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20대에는 연기를 하면서도 심리적으로 위축됐었다. 스물아홉 살에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 뒤로 조금씩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Q. 20대의 마지막에 떠난 캐나다 여행이 꽤 뜻깊었나 보다.
임정은: 3개월 정도 머물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나도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하는 생각도 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좀 재밌게 살아보자고 했고, 그때 돌아와서 출연한 작품이 ‘적도의 남자’다.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인지 그때 연기할 때 사람들이 ‘정말 작정을 했구나!’ 하더라(웃음).
Q. 어느덧 30대 중반이다. 여자로서 배우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아졌을 것 같다.
임정은: 인생에서 우선순위는 없다는 생각이다. ‘일 때문에 결혼을 못 한다’는 전혀 아니다(웃음). ‘때가 되면 하겠지’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즐겁게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매 작품 자연스럽게, 성실하게 임하며 살고 싶다. (Q. 팬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메시지가 있다면?) 연기에 재미를 느낀 만큼 새로운 시도도 하고 싶다.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역할을 맡을 때도 믿음을 갖고 지켜봐 달라(웃음).
글. 김광국 realjuki@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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