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정시우 기자][충무로 능력자들]
황석희
황석희

영화 ‘데드풀’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좌석에 앉아 스크린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 요염한 안티히어로의 ‘찰진 말빨’을 유머 충만한 자막으로 풀어낸 번역가의 정체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암흑 속에서 떠오르는 이름 황.석.희. ‘데드풀’을 보며 이 영화의 번역가에게 호기심을 느낀 건, 한두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데드풀’ 관련, 인터넷 공간에 “번역가, 약 빨았네!” “번역가에게 상 줘라” 등의 글이 넘쳐나는 걸 보면 말이다. 영화 번역가가 관심의 중심에 서는 일도 드물지만, 그것이 논란 때문이 아닌 환호로 보답 받은 것은 분명 드문 풍경이다. 서두를 필요가 있나. 황석희 번역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황석희 번역가를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건넨 명함. 엔딩 크레딧 형식으로 꾸며진 명함에서 황석희라는 사람의 ‘센스’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명함 뒷면에 있는 ‘세상을 번역하다’라는 문구가 특히나 가슴에 박혔는데, 실제로 황석희 번역가의 작업 반경은 넓고 깊고 다채롭다. 현재 극장가에 걸려 있는 ‘스포트라이트’ ‘캐롤’ ‘사울의 아들’ 역시 황석희의 손을 거친 작품들. ‘데드풀’ 포스터 글귀를 살짝 바꿔서 인용하자면, 황석희는 현재 가장 ‘핫하고, 재기 넘치고, 요염한’ 영화 번역가임에 틀림없다.

10. 영화 번역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황석희: 영어교육과를 나왔다.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실력은 못 된다.(웃음) 원래는 책 번역을 하고 싶었는데, 초보다 보니 기회가 많지 않았다. 계약서·매뉴얼·서신 같은 단순한 번역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정신과 의사가 호스트로 나와서 엄청 떠드는 토크쇼 ‘닥터 필 쇼’의 번역을 맡게 됐다. 영상 번역은 두 줄로 써야 한다, 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게 된 거다. 지금은 영상파일이지만, 그땐 비디오테이프를 보며 번역을 하던 시절이라 중고가게 에 가서 비디오 테크를 장만했다. 그걸 놓고 리모콘으로 돌리고-멈추고-돌리고-멈추고를 반복하며 번역을 했다. 영화 번역 쪽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TV쪽은 2003-2004년도까지 비디오테이프였다. 아마 이 바닥에서 나만큼 밑바닥부터 시작한 번역가는 없을 거다. 그게 나름 자부심이기도 하다.

10. 영화 번역과 드라마 번역에 차이가 있는 걸로 안다.
황석희: 내가 번역 경력이 10년인데, 드라마 번역을 6년 가까이 했고 영화만 한지는 3년 정도 됐다. 최근 들어온 ‘넷플릭스’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케이블들은 굉장히 까다롭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사전수준으로 해야 한다. 수위제약도 영화보다 훨씬 많다. 번역회사나 채널에서 번역에 관여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고.

10. 번역료 차이는 혹시….
황석희: 굉장히 많이 난다. 영화가 훨씬 세다. 그러니까 다들 영화를 하고 싶어 하고. 지금 TV번역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 갈수록 덤핑하는 업체가 많아지고 있는데, 지출을 아낄 때 가장 먼저 손대는 쪽이 번역료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내가 케이블 번역 2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가 올리브채널, XTM 등에서 미드를 활발하게 방영할 때였다. 덕분에 그나마 수입 유지가 꾸준히 됐었다. 요즘은 많이들 힘들게 일하는 것으로 안다. 이 길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도 많으실 거다. 나 역시 고민했던 부분이다.
황석희2-2
황석희2-2
10. 언제부터 고민하지 않고, ‘내 길은 확고하게 변역’이란 생각을 했나.
황석희: 글쎄…정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던 것 같다.

10. 여러 의미에서 번역 후 성취감이 컸던 작품은 뭔가.
황석희: 일단 ‘데드풀’이 그렇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스포트라이트’도 성취감이 큰 영화다. 나는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많이 얻는 편이다. ‘스포트라이트’는 기자들의 이야기라서 주위에 아는 기자님들을 달달 볶았다. 법정용어가 나오기에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님에게도 조언을 얻기도 했다. 현장용어나 호칭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쓸 때 뿌듯함을 느낀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는 언론 정의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내가 찍은 영화는 아니지만 번역을 하다보면 사명감이나 정의감이 든다. 그리고 전쟁물인 ‘더 퍼시픽’과 ‘밴드 오브 브라더스’ 시리즈. TV에 나갔을 때 평이 좋았는데, 번역은 굉장히 고생을 했다. 전쟁마다 전투이름이 있지 않나. 관련 전투 기록을 뒤지고, 작전 전개도를 보려고 지도를 모으는 등 정말 별 짓을 다 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나왔을 때 가장 무서운 첫 번째가 ‘밀덕’들이거든.

10. ‘밀리터리 덕후?’
황석희: 맞다.(웃음) 그 분들은 정말 전문가 수준이기 때문에 번역이 틀리면 바로 안다. 당시 지인 중에 박격포 부대에서 포반장을 했던 중사가 있었다.(일동웃음) ‘더 퍼시픽’의 경우 배경 부대가 또 박격포부대여서, 그 친구에게 조언을 많이 얻었다. 나도 군대를 다녀왔지만 포병용어는 잘 모르거든. 헬기승무원 출신인 나에게도 외계어인 거지. 그런데 만약 그 용어들을 칼 같이 알아서 써 주면 ‘밀덕’들은 굉장히 좋아한다. 접근성이 조금 떨어지는 자막이긴 하지만, 그걸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큰 선물이 되는 거다.

10. 전문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것 같다. 정확하게 알고 쓰고자 하는 세심함도 엿보이고.
황석희: 적확한 용어를 쓰고 싶은 마음이 크다. 관계자들이 봤을 때 ‘신경을 썼구나’ 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대충 쓰고 싶지는 않다.

10. 성공에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웃음) 번역가마다 문체가 있다고 들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황석희의 문체’라면.
황석희: 내 입으로 내 문체가 어떻다고 말하긴 그런데, 번역가들끼리 보이기는 한다. 극장에서 번역을 보면, 10분 내로 누가 했는지 알 수 있다. 번역가들마다 습관이 있다. 조사를 쓰는 방법이라든지, 사용 단어 등에서 감지가 된다. 아마, 다른 번역가들도 내 자막을 보면 바로 ‘황석희 자막’이라는 걸 알아챌 거다.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요즘 좋은 자막에 대한 생각이 많다. 관객들이 내 스타일에 맞추기를 바라는 것보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도 관객에 맞춰 조정할 수 있는 유연함은 갖추는 게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황석희 작가 번역 작품들
황석희 작가 번역 작품들
10. 영화 번역은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다. 지망생들이 많이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인맥이 정말 중요한가’이지 않을까 싶다.
황석희: 사실, 영화번역을 꿈꾸는 사람들로부터 상담 요청을 많이 받는다. 최근에도 트위터로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인맥도 없고, 유학 갈 돈도 없고, 학벌도 좋지 못한데 과연 영화번역을 할 수 있을지 우울하다”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이야기한 ‘세 가지 악조건’에 나는 다 포함되거든. 영화번역가라는 게 실현가능성이 굉장히 낮은 직업인 것은 맞다.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도 몇 명 안 된다.

10. 손에 꼽는 걸로 안다.
황석희: 맞다. 활발하게 번역을 하는 사람이 7명 정도 될까. 결국 전국 7등 안에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살현 가능성이 낮아도 굉장히 낮은 직종인 거다. 그런데 ‘인맥이 없어서, 학벌이 별로여서, 뭐가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게, 내 경우엔 그럼에도 어찌어찌 했으니까. 결국 해 줄 수 있는 말은 ‘실현가능성이 낮은 직업이고 어렵지만 그게 철벽처럼 안 되는 조건은 아니다’라는 거다.

10. 영화 번역으로 인연을 넓혀 준 ‘웜바디스’는 어떻게 만난 건가.
황석희: 너무 하고 싶어서 졸랐다.(웃음) 예고편을 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포트폴리오를 수입사에 보냈다. 실무자가 내 블로그에서 ‘뉴스룸’ 필모가 있는 걸 보고 회사에 추천했다고 하더라. 사실, ‘뉴스룸’과 ‘웜바디스’는 차이가 큰데 ‘뉴스룸’ 팬이셨던 것 같다. 그 뒤로 꾸준히 하게 됐다. 운도 따랐다. 사실 실력이 좋은 번역가들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좋은 번역이 빛을 보려면 영화 성과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번역이 좋아도 영화가 묻히면 주목받지 못하니까.

10. 소설을 영화화 한 경우가 많다. 번역을 할 때, 소설들을 찾아보나?
황석희: 찾아본다. 번역을 하다가 책에서 오역을 찾은 경우도 있다. 어쨌든 나는 조금 더 유리한 입장이거든. 같은 장면이라도 영상으로도 보니까. 한번은 책에서 발견한 오역을 블로그에 포스팅 했는데 출판사에서 댓글을 다셨다.(웃음) 관련해서 서로 메일을 주고받다가 그쪽 번역가 분에게 확인을 마친 후, 수정본이 아예 나온 게 있다. 번역가 분이 실수를 인정하고, 출판사에서도 우리 실수라고 인정을 한 건 대단한 용기다.

10. 개봉 중인 영화에서 오역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을 텐데. 수정이 바로 되나?
황석희: 개봉 중간에 수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단 비용이나 일정상의 문제가 크다. 잘못된 대사 하나 때문에 영화 전체 줄거리가 뒤집힌다면 모르겠으나, 그 정도의 대 사건은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오역은 모든 영화마다 다 있다. 나 역시 오역이 적지 않을 거다. 재작년에 개봉한 ‘아메리카 셰프’에서도 오역을 하나 했다. ‘스윗브레드(SweetBread)’라는 게 나오는데, 그걸 ‘꿀빵’이라고 번역했다. 알고 보니 ‘소의 흉선’을 의미하는 거였다.
황석희2-3
황석희2-3
10. 헛!! 미안하다, 웃어서.(웃음)
황석희: 하하하. ‘아메리카 셰프’는 레이먼 킴 셰프를 달달 볶으면서 번역을 한 영화였다.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써서 번역한 작품이었는데 그런 어마어마한 오역을 하다니. 그때 그 오역이 이슈가 조금 됐다. 그래서 바로 사과문을 썼다. 내 경우엔 오역이 이슈가 되면 바로 사과를 하는 편이다. 매 실수마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이슈가 되면 사과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전에는 우기기도 하고, 번역가 입장에서 이유가 있다 따지기도 했는데, 정말 부질없는 짓 같다.(웃음)

10. 오역이 발견되면 자다가 ‘이불 킥’도 하고 그러나.(웃음)
황석희: 아우~ 미치지. 어떻게 바꿀 수도 없고.(일동웃음) 그래서 영화가 블루레이 등으로 넘어갈 때 다시 달라고 해서 수정을 한다.

10. 드라마를 번역할 때 영화 번역을 하는 게 꿈이라고 했더라. 영화 번역을 하고 있는 지금은 넥스트가 뭔가.
황석희: 지금 하고 있는 영화들보다 규모가 조금 더 있는 영화들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몇 살까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지금 활발하고 활동하고 계시는 박지훈 씨나 여타 번역가 분들이 나이가 많이 드셨을 때까지 오래도록 하셨으면 좋겠다. 따라가는 입장에서 그 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힘이 날 것 같다. 경쟁자들이기도 하지만, 지표가 있으면 좋으니까. 그리고 나에겐 이 직업 자체가 곧 삶이다. 영화를 가지고 일을 하고, 기사를 봐도 영화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해도 관객들과 영화에 대해 ‘덕질’하는 것밖에 없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인생이 너무 휑할 것 같다. 이젠 업 그 이상이 돼 버렸다.

10. 그동안 번역한 대사 중에, 당신 인생에 영향을 미친 대사가 있을까.
황석희: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영화 ‘와일드’ 엔딩을 보면 “흘러가도록 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이었던가!”가 나온다. 절망의 끝에서 커다란 배낭 하나 짊어지고 무작정 길을 떠난 여인이 이야기다. 인생이 너무 고단해서 떠난 길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는데,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가끔 머리가 너무 복잡하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아서 나를 놔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본능에 집중하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번역 대사가 많긴 한데, 나에게 도움이 된 대사를 꼽으라면 그거다. “흘러가도록 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이었던가!”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권영탕 sorrowkyt@naver.com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