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를 보며 웃을 수는 있다. 그러나 미소를 짓기란 불가능하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집요할 정도로 결혼과 가정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들의 집과 가족은 보는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들 뿐이다. 장면이 아닌 언술로 제시되는 행복한 가정이란 결국 어떤 공감과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화감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구체화되는 행복에 대한 강박은 심리적 공포를 자아낼 정도다. 임성한의 작품에 비해 파격과 기행의 농도가 옅을 뿐, 최근 방영되고 있는 대부분의 가족극 역시 평화로움과 따뜻함이 아닌 기묘한 공포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가족호러물’로 칭해도 좋을 이 장르는 나름의 패턴을 갖추기 시작했다. 안방극장의 신 흥행 장르인 ‘가족호러물’의 법칙을 정리해 보았다. 행복한 여성을 만들기 위해 일단 가정을 파괴하고, 그 여성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여성들의 불행을 거침없이 초래하는 일련의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뻔뻔해서 무섭다. 그리고 그 방식이 뻔해서 더 무섭다.어느 여배우는 미용실에서 ‘손질한 지 한 달 지난 모양’을 요구한다더니, 가족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꼬들꼬들하게 삶은 라면을 그대로 채반에 건져 놓은 듯 치열하게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고수한다. 그리고 MBC 의 강재미(이보영), SBS 의 강금희(오현경)와 같이 멋없는 뿔테 안경까지 썼다면, 확신해도 좋다. 이제 그녀의 인생은 전반부의 전개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남편은 그녀를 배신할 것이고, 그녀는 눈물로 오욕의 세월을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절망에 빠진 그녀가 파마머리를 생머리로 바꾸는 순간, 희망의 싹이 고개를 내밀테니까 말이다. MBC 의 오영심(신애라)이 바람난 남편과 사별한 후 출근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 역시 파마머리를 단정한 단발로 바꾼 것이었다. 다만, SBS 의 오신영(이영은)이 비극의 서막,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부터 난데없이 곱슬머리가 생머리로 바뀌는 예외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결국 오신영이 기적적으로 병상에서 깨어나 복수를 시작하게 될 전개를 생각하면 일종의 싱커페이션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KBS 의 서혜진(박주미)이 끝내 불합리한 가정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그녀가 파마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생머리의 영광이란 파마머리의 고통을 겪은 이에게 내려지는 보상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MBC 의 황금란(이유리)이 생머리에서 점차 화려한 웨이브 머리로 변화 한 것으로 이상의 법칙에 반기를 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겠다. 손님, 그건 고데기예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는가. 무릎이 후들거리고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의 오정희(배종옥)는 음독을 시도한 불륜녀에게 가려는 남편을 붙잡기 위해 맨발로 뛰어 나가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물론 ‘사물이 거울에 비치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백미러의 문구 때문에 놀란 남편이 갑자기 가속 하자 더 이상 쫓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는 바람에 차에 치인 것이었지만, 집 안에서 분통을 터트렸다면 피할 수 있는 사고였다. 의 강금희 역시 남편이 불륜녀와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놀라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다 자동차와 충돌하고, 의 오신영 또한 남편과 자신의 주치의, 그녀의 남편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본 후 달아나다 자동차 앞에서 주저앉는다. 그러나 파마머리의 여자주인공은 차에 치일지언정 죽음에 이르지 않으니, 너무 큰 걱정은 말자. 다만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의 김홍구(윤다훈)는 아내의 사진이 도로로 날아가는 사소한 일에 놀랐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교통법규 준수에 앞서 일처종사 하는 일이다. 미취학 아동시절부터 교육받았다. 낯선 사람이 주는 사탕은 받아먹지 말라고. 하물며 어른이 되고 나서 낯선 사람이 합의 없이 친절을 베풀 때는 ‘도를 아시는지’ 궁금하거나 ‘가까운 곳에 죄를 사해주는 곳이 있다’고 알려줄 때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낯선 사람의 친절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가는 몸이든, 마음이든 일단 어딘가는 상처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의 오영심은 모텔에서 청소일을 하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임지은(김유리)을 유심히 관찰해야 했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일하는 홈쇼핑 채널의 유명한 쇼호스트. 목소리라도 알아들었더라면, 그래서 남편에게 그 여자 험담을 하겠다고 전화만 했더라면, 모텔 복도에서 둘이 옥신각신하는 꼴을 직접 목격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의 강금희 역시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대학 후배인 왕새미(정시아)가 낯선 외모로 다시 등장 했을 때 그녀를 환영했다가 남편을 빼앗겼다. 의 오정희 또한 다를 바 없다. 여행지에서 만난 모르는 여자가 잘 아는 닥터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유혹한 그 옛날의 여자이며, 그 닥터가 자신의 전남편임을 직감했어야 했다. 예쁜 여자, 어린 여자, 야한 여자보다 모르는 여자를 조심하라는 얘기다. 현실의 청년들은 실업문제로 고심하고 있지만, 드라마 속의 주부들은 재취업도 쉽다. 물론, 그녀들은 대학생들처럼 토익점수와 어학연수로 무장하는 대신 친구의 치킨집에서 닭 인형 옷을 입고 전단지를 돌리거나, 친구와 함께 도배 일을 하며 강인한 생활력과 뛰어난 적응력을 입증한다. 그리고 회사의 젊은 임원들은 그런 여성들에게서 남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법이다. 의 강금희는 십년 전 광고회사 근무 경력을 살려 재취업에 성공한 후, 광고회사 대표인 윤정우(김정민)로부터 애정공세를 받기에 이른다. 의 오영심은 심지어 한참 나이 어린 문신우(박윤재)의 마음을 얻었는데, 그는 무려 그녀가 다니는 회사의 모기업 회장의 차남이다. 그러니 팍팍한 회사 생활 속에서 혹시나 올지 모를 신분상승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수많은 싱글 여성들은 같은 처지의 여사원들간의 견제를 당장 그만두고 이혼 경험이 있는 직원들을 주시할 일이다.
그러나 의 경우를 볼 때,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의 상처가 없는 유부녀 직원은 아무리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아도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없다. 연애시장에 있어서만큼은 기업인들의 윤리 의식이 제법 확실한가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다. 그러니 옷깃을 부여잡고 말이라고 섞고 있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의 오신혜(강예솔)는 사랑하는 유부남이 이별을 요구하자 그의 아내가 전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채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아내 남자의 아내에게 이혼을 종용한다. 그러나 그녀는 오신혜의 언니의 산부인과 담당 의사이며, 그녀가 낳은 아이의 친부는 오신혜의 형부다. 의 왕봉수(정성운)도 비슷한 처지다. 그는 광고회사에 입사해 대표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만난 라이벌 강금화와 진해지는데, 자신의 누나 왕새미가 그녀의 남편 고경세(권오중)와 재혼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역시 인연이 나선형구조로 꼬여 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사업을 부도내고 달아낸 남편 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ㅉㅗㅈ기는 한혜원(강경헌)은 우연히 문진우(이훈)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사실 그녀의 동창인 박세령(전익령)의 남편이며, 손윗동서인 오영심과 연인관계로 접어 든 문신우의 친형이다. 이쯤 되면 홈드라마에 내제된 일련의 코드를 짐작할 수 있다. 생활 속의 두뇌 가동은 장기적으로 치매를 예방하는 법이다. 나나 무스쿠리: 의 오정희는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곡이라며 ‘Donde Voy’를 계속 들었다. 나나 무스쿠리가 부른 것으로 유명한 이 곡은 이국적인 발음과 올드팝의 정서가 어우러지며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주부들의 감성에 소구한다. 그런 점에서 임성한 작가는 자신의 드라마 속에서 자주 나나 무스쿠리를 등장시켰다. 여주인공이 노래방 회식자리에서 그녀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를 좋아한 여주인공은 결국 착하게 산 보상을 받는다. 오정희는 기대를 좀 가져도 되겠다.
고모 or 이모: 빙의된 인물이 결국 행하는 것은 예언이다. 귀신의 힘을 빌어 사람들은 타인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운명을 발설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족극에서 고모와 이모들은 이미 귀신의 힘을 빌지 않고도 이러한 역할을 해 왔다. 마치 혼령처럼 서사 없이 어디선가 불쑥 등장하는 이들은 빙의되듯 집의 한 구석에 짐을 부려놓고 온 가족들의 속마음을 중계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조카를 유혹한 불륜녀를 혼내주기 위해 눈에서 불을 뿜기도 한다. 귀신보다 무서우면 무서웠지, 못할 게 없다.
생식: 생야채즙은 임성한의 세계에서 건강을 위한 입문서와 같은 존재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음식이란 날 것 그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을 쓰는 동시에 딸기를 칫솔로 씻어야 할 정도로 주의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 황금란은 몸이 아닌 마음을 위해 생곱창을 씹어 먹었다. 그리고 질긴 정도와 곱의 양을 측정해 품질 측정까지 해냈다. 생식을 하면 전자 혀를 갖게 된다는 보도를 접해도 놀라지 말자.
글. 윤희성 nine@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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