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는 영웅을 만드는 법이다. 시청률 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 MBC 수목드라마가 11월 11일, 명예 회복을 기원하며 <히어로>를 출격시킨다. <눈물의 기원>, <그라운드 제로>를 통해 남다른 연출력을 인정받은 김경희 감독과 <제주도 푸른 밤>, <도망자 이두용> 등 단막 작품에서 범상치 않은 필력으로 주목받은 바 있는 박지숙 작가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으는 <히어로>는 언론과 재벌이라는 현대 사회의 강력한 두 가지 권력을 통해 소시민들의 정의와 삶에 응원을 보내려는 작품이다.

“심각하게 폼 잡고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배경과 목적은 거창하지만, 10월 23일 서울 광장동 멜론 악스 콘서트홀에서 열린 <히어로>의 제작 발표회에서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은 시종일관 경쾌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부상으로 불참한 김민정에 대해서 “스캔들도 좀 내고 싶고, 다양한 스틸 컷으로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싶은데 부상 때문에 촬영을 함께 하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유머러스한 대답으로 입장을 대변한 이준기와 재벌가의 딸이라는 본인의 캐릭터에 대해 “봉 잡아서, 좋아요!”라는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한 소감을 밝힌 신주아는 그런 작품 속의 활기를 발표회장까지 이어 왔다. 김경희 감독 역시 “어느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소중한 가치다.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모든 인물들이 개인의 아픔과 이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심각하게 폼 잡고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웃음과 순발력, 위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매력적인 것 같다”는 이야기로 이 드라마의 지향점에 대해 설명 했다. 가벼운 목소리로 “사람들이 잊고 살아가는 중요한 가치”에 대해 말하는 이 드라마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꿈을 꾼다. 그 꿈을 향해 가는 지름길은 그들이 말한 ‘히어로’의 정의에서 ‘사람’의 자리에 ‘드라마’를 대입하면 보다 정확히 보일 것이다.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사람. (김경희)”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이 되는 사람은 모두가 히어로다. (엄기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주변을 배려하고,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람. (이준기)” “소시민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 (백윤식)” “세상에는 악도 많지만, 결국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히어로가 되는 것 같다. (신주아)”

수상하도록 패기 넘치는 신문기자 진도혁, 이준기
이준기는 몇 번이나 도혁에 대해 “전작에 비해 가볍고 유쾌한 인물”임을 강조했다. 국정원의 언더커버, 무거운 운명을 짊어진 진짜 영웅을 연기하던 것에 비하면 긍정적이고 활기찬 도혁의 모습은 얼핏 그의 말대로 즐겁고 신나는 캐릭터로 이해된다. 그러나 결국 ‘히어로’가 되어 소시민들을 대변하는 정의로운 기자로 변모하게 될 그는 이번에도 마냥 편안한 연기를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생활고와 이를 더욱 가중시키는 철없는 누나(장영남) 덕분에 마음대로 공부조차 할 수 없었던 도혁은 간신히 삼류 가십지의 기자가 되지만 신문의 폐간으로 막다른 길에 봉착한다. 그러나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전직 폭력배 용덕(백윤식)은 그에게 새로운 신문의 창간을 제안하고, 그를 비롯한 신문사의 기자들(정석용, 정수영, 지창욱, 진성)은 새로운 꿈에 부푼다.

경찰대 출신의 강력반 팀장 주재인, 김민정
경찰 대학을 수석 졸업한 엘리트 경위인 재인은 매사에 모범적이고 정석을 따르는 고집스러운 인물이다. 직업인으로서 그녀가 경찰로 순직한 아버지를 닮았다면, 생활인으로서의 그녀는 여성스럽고 우아하지만 조금은 철이 없는 어머니(오미희)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녀는 각종 무술로 범죄자를 소탕하다가도 집으로 돌아오면 핑크색 잠옷을 입고, 치밀하게 잠입을 하다가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는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재인의 매력 포인트이며, 그녀가 해성과 도혁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 김경희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재인은 “삼류 인생인 도혁과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싸우고, 무시하고, 경멸하다가 점점 그의 매력을 알게 되고 변화과 성장을 하는 인물”이다.

성공과 출세지향의 엘리트 기자 강해성, 엄기준
캐릭터 설명을 부탁하는 질문에 엄기준은 “해성은 야망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짧게 정리했다. 좌충우돌하지만 다이내믹한 도혁과 달리 냉정하고 영민하지만 다소 전형적인 캐릭터인 해성은 대세그룹의 회장 일두(최정우)의 딸인 호경(신주아)과 약혼을 하고, 그 힘으로 대세 일보 경제부의 ‘대세’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인터뷰 했던 경위 재인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면서 언제나 무시하던 도혁이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이 견딜 수 없어진다. 일에서 그러했듯, 사랑에서도 원하는 것은 쟁취해야만 하는 그는 용덕과 손을 잡은 도혁과 머리로 싸우는 동시에 가슴으로도 싸워야하는 고난에 처한다.

15년만의 복수를 준비하는 전직 두목 조용덕, 백윤식
쌍 도끼파의 두목이었던 용덕은 15년의 복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출소한다. 이제는 상철(조경훈) 외에는 따르는 부하도 없고, 그 사이에 아내는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고, 그가 없는 동안 대학생으로 커버린 딸은 돌아온 그를 외면한다. 그야말로 인생의 막장에 도달한 그는 자신을 인터뷰 하고자 했던 기자 도혁에게 새로운 신문의 창간을 제안하고, 신문을 통해 대세 일보와의 숨겨진 관계를 청산하고자 한다. 선악과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나 작품 안에서 남다른 무게감을 보여주는 백윤식은 인물에 대한 질문에 대부분 허허실실 웃으며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촬영 하면서)어려운 점 없습니다. 허허허. 그냥 생활적으로 리얼하게 풀어갑니다”라는 간단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품의 중심을 잡아줄 열쇠로서 제 몫을 충분히 하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은 고수의 내공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관전포인트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작 발표회 현장에는 240여명의 중년 여성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이준기의 팬들은 그의 등장에 환호성을 질렀고, 2시간여에 걸친 행사 후에는 한명씩 무대 앞으로 나와 ‘악수회’에 참여했다. 분명 한류스타로서 이준기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것이 이준기에게 보내는 기대의 근거는 아니다. “여러 기자들에게 싸여 사진 찍히는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 한국에도 파파라치 도입이 시급하다”는 돌발 발언을 하거나, 포토 콜에 응할 때도 예상치 못한 장난스러운 포즈를 보여주는 그는 짐작할 수 없는 ‘다음’을 가진 배우로서 충분히 흥미롭다. 그리고 그가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삼류 기자를 선택했다는 점은 적어도 이 배우가 카메라 앞에 설 때와 팬들 앞에 설 때 가져야 할 생각의 구분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그래서 그가 수, 목의 ‘히어로’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일은 아무래도 즐거운 과정이 될 듯 싶다.

사진제공_ MBC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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