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연기자 김창완을 경험한다는 건 초현실적인 현상이다. “존재 자체가 SF적인” MTB 자전거를 타며 “불과 6~7kg의 자전거 위에 몇 십 kg의 거구가 타는 것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는 것”과 같다는 김창완의 소감은 그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니 벌써’의 김창완이 ‘나의 마음은 황무지’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김창완이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TV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믿을 수 있나. 산울림의 김창완인데. 지금 이미 가요계의 전설 취급을 받는 1990년대의 뮤지션들이 존경을 바친 김창완인데, 장기하와 에픽하이마저 스스럼없이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하는 그 밴드의 리더인데. 이미 음악의 만신전에 오른 지 한참 된 천재이자 거장이 매일 TV 브라운관의 한쪽 구석에서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가 만들어내는 모든 대체불가능한 것들

하지만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LP 한 면을 가득 채운 ‘나의 마음은 황무지’를 발표한 김창완에게 어린이 드라마에서 ‘산 할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역만 시킨 것이 비극이었다면, 그 시간을 거쳐 대체 불가능한 어떤 연기자로 성장해버린 지금의 김창완은 그가 음악대신 연기를 더 많이 한 뒤에도 ‘김창완’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어느 날 몸의 일부처럼 보이기까지 했던 안경을 벗고 MBC <하얀거탑>의 냉정하고 교활한 우용길을 연기했고, SBS <일지매>에서 인자한 얼굴 뒤로 온갖 음모를 꾸미는 음험한 폭군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영화 <앤티크>에서는 본심을 짐작하기 어려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어떤 남자를 연기한다. 2008년 현재, 김창완은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시청률에 연연하는 중년의 드라마 CP와 <일지매>에서의 악역을, 현대극과 사극과 영화를 자유롭게 소화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됐다. 그 말고도 연기력이 뛰어난 중견 연기자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김창완처럼 20여년을 선량한 얼굴로 살아오다 어느 날 그 외의 수많은 표정들을 보여주게 된 연기자는 드물다. 많은 배우들이 ‘누구 엄마’나 ‘사장님 전문 배우’로 굳어지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건 김창완이 소수의 음악 팬들을 제외하면 그를 착한 아저씨로만, 혹은 과거의 신화로만 바라봤던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산울림이 실질적으로 해체한 뒤 2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산울림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이 등장했고, 산울림의 음악을 통해 그가 그저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세월의 먼지를 털어냈던 첫 번째 작품이었던 MBC <떨리는 가슴>의 ‘바람’에서는 그의 노래인 ‘너의 의미’가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김창완은 ‘바람’에서 착한 가장 대신 젊은 여성을 통해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던’ 과거를 되찾고 싶어 하는 남성을 연기했고, 그것은 그대로 김창완의 모습이기도 했다. 어른이되 그가 함께 살고 있는 어른과는 다른 감수성과 삶을 원하는 사람. ‘바람’을 연출한 이윤정 감독은 다시 그에게 MBC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여전히 동네 과부와 로맨틱한 감정을 나누는 남자를 연기토록 했고, 안판석 감독은 “산울림의 노래에서 이미 그런 것을 보여줬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우용길의 배역을 맡겼다. 산울림이 지금에도 어떤 사람들이 돌아볼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 김창완은 산울림을 통해 보여준 감성들을 연기로 옮길 수 있었다.

이미 전설이 된 뒤에도 멈추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김창완 밴드의 EP 는 또 하나의 초현실적인 경험이다. 그가 처음으로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결성한 김창완 밴드를 통해 발표한 는 이미 역사에 기록된 거장이 누구에게나 박수 받고자 만든 완숙의 결과물이 아니다. 는 50이 넘어 스릴러 연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김창완의 연기와 같다. 그는 20여년을 산울림의 그 감성으로 살았고, 그것을 연기로, 다시 김창완 밴드의 음악으로 드러냈다. 격렬한 펑크 록 사운드의 작은 파장 하나도 잘라내지 않은 의 사운드는 그 시절 산울림의 음악 이상으로 격렬하고, 그 사운드 속에서 밴드의 연주는 살아 숨 쉰다. ‘Girl walking’에서 이 밴드가 스튜디오에서도 정말 라이브로 연주하고 있다는 생생한 느낌. 지금 이 순간 음악을 하고 있다는 외침이 그대로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 김창완 밴드는 산울림을 회상하거나 재현하는 대신 산울림의 태도로 2008년에 음악을 하는 밴드의 록을 표현했다. 그건 과거와 현재가 충돌해 만들어낸 새로운 순간이다.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는 전설이 된 사람이 20여년 뒤에도 그대로 살아갈 때 무엇이 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정제하지 않은 록 사운드 위로 주문같은 가사들이 반복된다. 열두 살은 열두 살의, 열여섯은 열여섯의 인생을 산다고. 회고와 현재 진행 중인 음악의 박동. 인생을 겪는 것 이상으로 기억해야할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는 그 기억의 과정부터 현재의 순간까지의 여정을 안내한다. 스물세 살 산울림의 감성이 쉰넷의 인생이 만나면서 뮤지션 김창완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됐다.

김창완은 한 인터뷰에서 산울림에 대해 “화석 같은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산울림을 음악사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화석 껍질에 갇혀 있던 그 순간에도 꾸준히 연기를 했고, 동생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담아 새 밴드의 새 앨범을 냈다. 화석 껍질 속에 갇혀 있던 전설이 다시 살아 움직였고, 그의 몸 안에는 여전히 화석이 되기 전에 간직했던 피가 돌고 있다.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산다. 그리고 김창완은 김창완을 산다. 누구도 공유할 수 없지만, 지금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 만큼은 분명한 김창완을.

글. 강명석 (two@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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