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이 글에는 ‘논–픽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첫 상업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했던 작가로부터. 오래간만의 통화인지라 내가 잘 지내냐며 안부부터 챙기자 그는 단박에 말했다. “나? 오빠는 행복하지.” 낙천적이고 곰살궂고 독특한 그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통화를 끝내자 잊고 지냈던, 해묵은 그 시절에 일순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의 첫 상업영화는 스플래터 호러 영화였다.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서 공동작업을 했던 시나리오 작가는 다섯이었다. 모두 20대였다. 달라도 너무너무 달랐던 우리들은 견해 차로 신경의 날을 세우기도 했고, 상대가 흘리듯 툭 내뱉은 의견에 살을 붙이기도 했고, 늘어지는 작업에 공동의 시간을 축내기도 했다. 그래도 작업실에서 다섯이 주고받던 대화는 참으로 좋았다. 소소한 일상부터 자신을 사로잡는 유무형의 대상까지 대화의 주제에는 경계가 없었다. 하는 말에도, 듣는 말에도 흥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출판사 ‘베르퇴이’의 잘 나가는 편집자 알랭(기욤 카네)은 독자는 줄고, 책은 늘고 있는 현실이 살얼음판이다. 출판사 회장은 그에게 ‘E북’이 성공할 여지가 있는지 묻는다. 알랭은 종이책을 사랑하지만 전자화의 필요성도 느낀다. 그렇지만 세월을 거쳐 온 개념을 보관하고 싶다. 인터넷이라는 창구 덕분에 많이 쓰고 잘 쓰는 사람이 많아진 ‘글의 시대’에도. 알랭은 작가 레오나르(뱅상 매케인)의 신작 ‘마침표’를 반려한다. 그는 레오나르의 이번 소설이 유달리 구질구질하고 마땅찮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남몰래 레오나르를 만나고 있다. 연극 배우였던 그녀는 시즌제 드라마의 위기 대처 전문가 역할로 인기를 얻었지만, 다음 시즌에 출연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다. 왠지 자신이 소진된 것도 같고, 발전도 없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인질이 된 기분이랄까. 셀레나는 자신처럼 알랭에게도 다른 사람이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20년 내내 욕망을 유지할 순 없다고, 부부 사이는 욕망이 전부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즉 책을 사랑하는 셀레나는 알랭에게 레오나르의 신작을 호평한다.
자신의 연애사를 은밀하게 담아내는 레오나르의 소설은 전처 솔랑주가 남긴, 강간 당한 심정이라는 글로 인해 인터넷에서 악의적 논쟁을 불러왔다. 레오나르는 알랭으로부터 그의 출간된 소설들이 정체보다 침체이고, 워스트셀러라는 노골적 평가도 듣는다. 무려 6년을 이어온 관계에 이별을 고하는 셀레나는 그에게 신작 ‘마침표’의 제목이 과하다며 꼭 마지막 소설 같다고 일침을 가한다. 신작 때문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레오나르는 “모든 픽션은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고 의견을 세우지만, 진행자로부터 “당신을 아는 사람에게는 당신 사생활이 엿보이죠”라는 말을 듣는다.
레오나르의 아내 발레리(노라 함자위)는 국회의원 다비드의 비서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녀는 이미지가 생명인 정치인은 모든 면에서 투명해야 한다고 여긴다. 레오나르는 출근 준비로 분주한 그녀에게 알랭에게 원고를 퇴짜 맞았노라며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칭얼댄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1도 안 맞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레오나르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음도.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확인사살한다. 발레리는 책에 다 떠들면서 아내인 자신이 모를 거라 생각한 레오나르의 반응이 놀랍다. 그런데 그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부부끼리도 오랜 시간 알아온 알랭의 아내 셀레나가 불륜상대였다는.
디지털 사업 담당자 로르(크리스타 테렛)는 알랭과 일적으로는 누차 대립하지만, 일을 떠나서는 내밀한 관계다. 전자화를 악마의 출현으로 보는 출판계에서 그녀는 문자도 글쓰기의 한 유형이고, 트윗은 하이쿠(일본 고유의 단시)이고, 도서관은 책 창고이고, 책의 내용은 구글과 같은 가상공간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작가였던 로르는 문학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21세기 출판을 고심하는데 동참하려고 출판사를 택했지만, 가정을 포기할 리 없는 알랭의 곁을 떠나고야 만다. 각별한 충고를 남기며. “끌려가지 말고, 당신이 원하는 변화를 선택해.”
지난 16일 개봉한 ‘논-픽션’은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코미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이지만 ‘여름의 조각들’(2008)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퍼스널 쇼퍼’(2016) 등으로 국내에서 그의 팬도 상당하다. 우리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를 사랑하듯,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사랑한다. “‘논-픽션’을 이끌어주고 영감을 준 작품은 바로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1993)라는 것을 꼭 언급하고 싶다. 그 때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에릭 로메르의 생각이 끊임없는 대사의 향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논-픽션’ 역시 말맛이 진진한 대사들로 그득하다. 거기에 매력적인 배우들의 은근한 연기가 더해져서 대사마다 윤기가 줄줄 흐른다. 줄리엣 비노쉬와 기욤 카네는 20년 차 부부가 갖는, 무르녹은 관계를 담아냈다. 뱅상 매케인은 한 잔의 커피, 낡은 카디건, 목 늘어난 티셔츠, 흩날리는 머리, 푸근한 미소로 귀염성이 있는 소설가를 빚어냈다. 크리스타 테렛은 극 중 섹시한 육식녀 스타일로 묘사되는 역할을 총명하게 접근해서 싱그러운 여운을 남겼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변화의 원동력은 디지털 혁명이다. ‘논-픽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변화된 삶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컴퓨터와 함께 성장한 밀레니얼 세대에게 아직은 종이책이 팔리지만 독서 습관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극 중에도 등장하는, 이 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인 ‘나르시시즘의 시대’ ‘탈진실의 시대’ ‘글의 시대’ 등이 관객에게도 사유를 촉발(觸發)하게끔 한다.
‘논-픽션’의 종이책과 E북, 픽션과 논픽션, 파리지앵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담긴 대사 안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는 순간도, 고개를 갸웃하며 의구스러운 순간도, 넘치는 위트로 까르륵 웃음이 터지는 순간도 찾아온다. 놀라우리만치 말(言)과 말(言)이 닿는 작품이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며칠 전, 전화가 왔다. 첫 상업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 했던 작가로부터. 오래간만의 통화인지라 내가 잘 지내냐며 안부부터 챙기자 그는 단박에 말했다. “나? 오빠는 행복하지.” 낙천적이고 곰살궂고 독특한 그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통화를 끝내자 잊고 지냈던, 해묵은 그 시절에 일순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의 첫 상업영화는 스플래터 호러 영화였다. 우리 두 사람을 포함해서 공동작업을 했던 시나리오 작가는 다섯이었다. 모두 20대였다. 달라도 너무너무 달랐던 우리들은 견해 차로 신경의 날을 세우기도 했고, 상대가 흘리듯 툭 내뱉은 의견에 살을 붙이기도 했고, 늘어지는 작업에 공동의 시간을 축내기도 했다. 그래도 작업실에서 다섯이 주고받던 대화는 참으로 좋았다. 소소한 일상부터 자신을 사로잡는 유무형의 대상까지 대화의 주제에는 경계가 없었다. 하는 말에도, 듣는 말에도 흥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출판사 ‘베르퇴이’의 잘 나가는 편집자 알랭(기욤 카네)은 독자는 줄고, 책은 늘고 있는 현실이 살얼음판이다. 출판사 회장은 그에게 ‘E북’이 성공할 여지가 있는지 묻는다. 알랭은 종이책을 사랑하지만 전자화의 필요성도 느낀다. 그렇지만 세월을 거쳐 온 개념을 보관하고 싶다. 인터넷이라는 창구 덕분에 많이 쓰고 잘 쓰는 사람이 많아진 ‘글의 시대’에도. 알랭은 작가 레오나르(뱅상 매케인)의 신작 ‘마침표’를 반려한다. 그는 레오나르의 이번 소설이 유달리 구질구질하고 마땅찮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줄리엣 비노쉬)는 남몰래 레오나르를 만나고 있다. 연극 배우였던 그녀는 시즌제 드라마의 위기 대처 전문가 역할로 인기를 얻었지만, 다음 시즌에 출연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다. 왠지 자신이 소진된 것도 같고, 발전도 없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인질이 된 기분이랄까. 셀레나는 자신처럼 알랭에게도 다른 사람이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20년 내내 욕망을 유지할 순 없다고, 부부 사이는 욕망이 전부가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즉 책을 사랑하는 셀레나는 알랭에게 레오나르의 신작을 호평한다.
자신의 연애사를 은밀하게 담아내는 레오나르의 소설은 전처 솔랑주가 남긴, 강간 당한 심정이라는 글로 인해 인터넷에서 악의적 논쟁을 불러왔다. 레오나르는 알랭으로부터 그의 출간된 소설들이 정체보다 침체이고, 워스트셀러라는 노골적 평가도 듣는다. 무려 6년을 이어온 관계에 이별을 고하는 셀레나는 그에게 신작 ‘마침표’의 제목이 과하다며 꼭 마지막 소설 같다고 일침을 가한다. 신작 때문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레오나르는 “모든 픽션은 어느 정도 자전적”이라고 의견을 세우지만, 진행자로부터 “당신을 아는 사람에게는 당신 사생활이 엿보이죠”라는 말을 듣는다.
레오나르의 아내 발레리(노라 함자위)는 국회의원 다비드의 비서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녀는 이미지가 생명인 정치인은 모든 면에서 투명해야 한다고 여긴다. 레오나르는 출근 준비로 분주한 그녀에게 알랭에게 원고를 퇴짜 맞았노라며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칭얼댄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1도 안 맞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레오나르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음도.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확인사살한다. 발레리는 책에 다 떠들면서 아내인 자신이 모를 거라 생각한 레오나르의 반응이 놀랍다. 그런데 그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부부끼리도 오랜 시간 알아온 알랭의 아내 셀레나가 불륜상대였다는.
디지털 사업 담당자 로르(크리스타 테렛)는 알랭과 일적으로는 누차 대립하지만, 일을 떠나서는 내밀한 관계다. 전자화를 악마의 출현으로 보는 출판계에서 그녀는 문자도 글쓰기의 한 유형이고, 트윗은 하이쿠(일본 고유의 단시)이고, 도서관은 책 창고이고, 책의 내용은 구글과 같은 가상공간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작가였던 로르는 문학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21세기 출판을 고심하는데 동참하려고 출판사를 택했지만, 가정을 포기할 리 없는 알랭의 곁을 떠나고야 만다. 각별한 충고를 남기며. “끌려가지 말고, 당신이 원하는 변화를 선택해.”
지난 16일 개봉한 ‘논-픽션’은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코미디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이지만 ‘여름의 조각들’(2008)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퍼스널 쇼퍼’(2016) 등으로 국내에서 그의 팬도 상당하다. 우리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를 사랑하듯,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사랑한다. “‘논-픽션’을 이끌어주고 영감을 준 작품은 바로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1993)라는 것을 꼭 언급하고 싶다. 그 때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에릭 로메르의 생각이 끊임없는 대사의 향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논-픽션’ 역시 말맛이 진진한 대사들로 그득하다. 거기에 매력적인 배우들의 은근한 연기가 더해져서 대사마다 윤기가 줄줄 흐른다. 줄리엣 비노쉬와 기욤 카네는 20년 차 부부가 갖는, 무르녹은 관계를 담아냈다. 뱅상 매케인은 한 잔의 커피, 낡은 카디건, 목 늘어난 티셔츠, 흩날리는 머리, 푸근한 미소로 귀염성이 있는 소설가를 빚어냈다. 크리스타 테렛은 극 중 섹시한 육식녀 스타일로 묘사되는 역할을 총명하게 접근해서 싱그러운 여운을 남겼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변화의 원동력은 디지털 혁명이다. ‘논-픽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변화된 삶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컴퓨터와 함께 성장한 밀레니얼 세대에게 아직은 종이책이 팔리지만 독서 습관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극 중에도 등장하는, 이 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인 ‘나르시시즘의 시대’ ‘탈진실의 시대’ ‘글의 시대’ 등이 관객에게도 사유를 촉발(觸發)하게끔 한다.
‘논-픽션’의 종이책과 E북, 픽션과 논픽션, 파리지앵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담긴 대사 안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는 순간도, 고개를 갸웃하며 의구스러운 순간도, 넘치는 위트로 까르륵 웃음이 터지는 순간도 찾아온다. 놀라우리만치 말(言)과 말(言)이 닿는 작품이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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