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를 통해 영화를 소개합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입니다. [편집자주]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포스터/사진제공=영화공간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포스터/사진제공=영화공간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외계인은 어떻게 인간을 이해할까? 개념을 빼앗긴 인간에게 삶은 어떤 의미인가? 두 가지 화두를 안고 직진하는 ‘산책하는 침략자’는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소재로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SF 호러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피칠갑 난도질의 오프닝 시퀀스 이후, 영화는 큰 파동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철학적인 멜로에 가깝다.

영화에는 지구를 침략하기 전,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기 위해 파견된 세 외계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몸을 숙주삼아 인간세계를 안내해주는 ‘가이드’와 함께 한다. 가이드로 지목받은 사람은 개념을 뺏기지 않는다. 영화의 큰 줄기는 두 명의 가이드를 중심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 가이드는 외계인이 된 남편, 신지를 돌보는 나루미다. 나루미는 실종된 후 돌아와 이상 행동을 하는 신지가 낯설지만, 여전히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그를 돌본다. 두 번째 가이드는 특종을 쫓다 두 명의 외계인과 얽혀버린 기자 사쿠라이다. 사쿠라이는 이들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이들에게 동화된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침략자가 아닌, ‘산책’에 방점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무척 느슨하다는 말이다. 자극적인 장면도,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나 박진감도 없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는 공허하고, 그 공허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속 시원히 드러나지 않는다. 외계 생명체의 정체성은 모호하고 텅 비어있다. 어느 순간 해답도 질문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외계인은 질문을 던진다. 질문 앞에서 사람들은 주춤거린다. 그럴 듯하게 포장된 껍질로 세상을 부유하는 인간에겐 너무나 많은 개념이 그물처럼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사진제공=영화공간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사진제공=영화공간
아이러니한 것은 개념을 설명한 후, 개념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자유로워 보인다는 점이다. 신지에게 개념을 빼앗긴 은둔자는 개념을 잃고 비로소 세상으로 나와 행복해 보인다. 가족이라는 개념을 잃고(혹은 버리고), 집을 떠나는 나루미의 동생의 발걸음은 공기처럼 가벼워 보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개념에 스스로를 가둔 은둔자인지도 모른다는 기요시 감독의 은유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개념을 공유하지 않은 외계인과 사쿠라이의 관계에 있다. 사쿠라이와 외계인은 침략자와 가이드의 사이로 시작하지만, 개념에 앞서 감정을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신지와 나루미의 관계에서 이 지점은 좀 더 확실해 진다. ‘사랑’에 대해 궁금해 하는 외계인에게 목사는 어떠한 답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빼앗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루미는 신지에게 사랑을 알려준다. 가이드로서의 규칙을 깨고, 사랑을 준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절대적인 요소가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침략은 멈추고, 영화도 멈춘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어쩌면 이성의 영역인 개념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인 감정이야 말로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큰 핵심이라는 사실을 나루미와 신지, 인간과 외계인의 감정의 교류를 통해 역설한다. 나루미는 사랑을 잃고 텅 비어버렸지만, 신지는 외계인의 영혼에 사랑을 품고 인류애를 실천한다. 누군가는 이 결말이 참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선언이야 말로 참 믿어보고 싶은 우리의 갈망과 같아 헛헛하진 않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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