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김수경 기자]
이범수: 처음 내가 받았던 시나리오와 영화가 버전이 다르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좀 더 지적인, ‘고뇌하는 림계진’이었다. 한채선(진세연)과의 러브 라인으로 장학수(이정재)와 삼각 관계도 있는 구도였는데 시나리오가 점점 수정됐다. 일장일단이 있으니 난 찬성했다. 장학수랑 캐릭터가 겹치면 안되니까. 림계진이 좀 더 선명한 악역으로 캐릭터의 축을 잡기를 바랬다.
10. 여러 인터뷰나 언론시사회에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악역은 그 공간에서 마음껏 연기를 펼칠 수 있어서 매력적이라고도 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어땠나.
이범수: ‘마음껏 연기를 펼칠 수 있다’는 말은 연기를 여러 버전으로 펼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예를 들어 장학수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여러 버전이 있었다. 장학수를 빤히 쳐다보면서 계속 말하는 버전도 있었고, 그를 전혀 쳐다보지 않고 남얘기하는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에 시선을 꽂으며 정확하게 응시하는 버전도 있었다. 그런 거다. 상황과 감정의 흐름에 맞게 유연하게 여러 가지 버전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악역에 대한 매력을 느끼는 거다.
10. 이정재와의 장교 클럽 장면에서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깊었다.
이범수: 사실 ‘인천상륙작전’에서 아쉬운 장면이 두 군데 있다. 장교 클럽 장면이 그 중 하나다. 장학수와 둘도 없는 단짝처럼 흥겨울수록 극적인 느낌이 배가되기 때문에 내가 러시아어로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편집이 돼서 개인적으로는 되게 아쉽다.
다른 하나는 탱크신이다. 그 신만 2주 동안 촬영했다. 결국 영화에는 20초 나오는데.(웃음) 원래는 시나리오에 흙더미가 흔들리면서 림계진이 탱크 위에 올라타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림계진 최고의 백미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게도 디렉터스 컷으로 봐야 된다.
10. ‘인천상륙작전’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범수: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고 평소에 전쟁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우리나라 작품이든, 외국 작품이든. 그래서 전쟁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전쟁 블록버스터 기회가 왔고, 심지어 우리의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도 재밌고 하니까 잘 됐다고 생각했다.
10. ‘신의 한 수’에 이어 또 다시 아주 강렬한 악역을 맡았다. 소감이 어떤가.
이범수: 오히려 부담감이다. 하지만 악역을 또 해야 되니까 하지 말아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분선을 잘 지어서 또 다른 차이점을 만들면 되니까. 나는 그런 도전 혹은 모험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다.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즐기는 것은 사실이다. ‘짝패’의 깡패두목, ‘신의 한 수’의 살수와 차별점을 두려고 노력했다.
‘신의 한 수’의 살수는 날렵하고 말수도 없는 뱀 같은 이미지였다면 림계진은 좀 더 능글맞고 아주 기름진 캐릭터로 잡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을 드렸다. 살도 찌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찌웠다. ‘몇kg 찌워야지’하고 정해놓은 것은 없고 일단 찌웠다. 촬영할 때는 후덕함이 어울렸는데 내가 너무 멀리 온 것 같더라. 막상 살이 찌니까 부끄럽고 게으른 배우같고.(웃음) 속도 상하고. 나는 열심히 한 건데. 살을 서서히 빼야겠다 싶어서 2~3일 동안 촬영이 없을 때 뺐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첫 테이크가 끝나자마자 살 뺐냐고 물어보더라. 능글맞고 기름지게 잘 가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웃음) 또 그게 현장에서는 맞는 말이라 오케이하고 쭉 찌웠다. 결론적으로 7kg 찌웠다. 정확히 6kg 빠졌다. 인바디 검사를 해보니 체지방은 20kg까지 빠졌고, 근육은 십여kg가 늘어났다.
10. 아무리 직업이라고 하지만, 대단하다. 어떻게 한 건가.
이범수: 찌울 때는 다시는 안 뺄 것처럼 신났지.(웃음) 빼야할 그 날이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더군다나 감독님이 찌우라는데.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조금만 찌울 걸’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찌울 때는 몸, 아니 입이 편하지. 입은 신나고 정신은 힘들고. 살을 뺄 때는 몸이 힘들고 정신은 성취감이 들고.
10. 림계진이라는 캐릭터를 스스로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이범수: 림계진으로 몰입하다 보니까 예상치 못한 문제점에 봉착했는데, 그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내가 맡은 역이 납득이 안되는 거다. 림계진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폭력까지 불사하는 공산주의잔데, 림계진을 연기하는 이범수는 그게 아니라 갭(gap)이 느껴지는 거다. 그래서 그 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타협점을 본 건, 내 스스로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으니 변형된 형태로 민족주의자로서의 림계진을 표현하자는 거였다. 림계진은 아마도 ‘잘 먹고 잘 살자는 건데’라는 생각으로 생각과 사상을 합리화하는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의 작품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면을 느껴보게 된 거다.
10. 과거 작품에서 림계진만큼 힘들었던 캐릭터가 있었나.
이범수: ‘오! 브라더스'(2003)의 오봉구.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서 처음 제안받았을 때 사실 김용화 감독에게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내가 혼자 다 뒤집어 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소 같은 눈, 그 눈에서 나오는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한다고 하더라. 칭찬을 받으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웃음)
그 작품같은 경우에는 내가 지금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내면에 가지고 있는 순진함과 천진난만함을 억지로 찾아서 증폭시킨 거다. 그 당시 살고있던 집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이 등하교하는 모습을 한 달 동안 지켜보고 수업도 참관했다. 뛰어가는 모습도 많이 보고 순박한 면을 캐치해서 확장하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했다.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히 시사회 때 내가 내 연기를 보고 눈물이 났다. 욕먹는 연기를 한 것은 아닌지 객관적으로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진 거다. 특히 상우(이정재)에게 “아빠가 돈 남겨준 거, 이거 형이랑 나랑 나눠가지라고 돈 준거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뭉클했었다. 그때서야 ‘내가 갑자기 빠져들었네. 부끄럽게. 어느정도 설득력은 있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10. 연기를 한 지도 27년차다. 슬럼프를 대하는 당신의 자세가 궁금하다.
이범수: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연기가 직업임과 동시에 놀이고, 게임이고, 취미고, 오락이고, 여행이다. 하고 싶은 것이고 칭찬받고 싶은 것이다. 또 뻔한 것보다는 새롭게 해보고 싶더라.
예를 들어 ‘태양은 없다’ 때 내가 했던 단발머리처럼. 나는 그 머리를 선택한 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다. 몇 년 전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는데, 극중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머리가 내가 했던 머리랑 똑같더라. 그 머리만큼은 내가 선배다.(웃음)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와 그 머리를 보고 나서야 ‘태양은 없다’ 때 병국을 본 이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폭하면 스포츠 머리’라는 공식이 되게 싫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조폭 영화에 출연한다면 절대 깍두기 머리를 안 할 거다,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기회가 찾아온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명 신인이 참 당찬 거였다. 사실 내가 아주 무섭게 생긴 택시 기사님이 그런 머리를 하신 것을 보고 나름 영감을 받은 거다. 택시에 탔는데 내릴 수도 없고 얼마나 강렬했던지.(웃음)
10. 연륜이 있다 보니까 현장에서의 책임감도 있었을텐데.
이범수: 총격전을 벌일 때 신인 배우들이 경험이 많이 없다 보니까 위치를 잘 못찾아서 지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나도 무명 단역부터 시작한 배우로서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북한군 패거리랑은 대화의 자리를 많이 가졌다. 내가 절대 잘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커뮤니케이션해야 NG도 줄어들고 빨리 끝나니까. 먼저 나한테 자꾸 물어보기도 하고.(웃음) 호흡이 잘 맞아서 장학수 패거리가 부러워했다. 우리가 동선 연습하면 구경오고. 뒤에 와서 우리편 하라고 장난치고 그랬지.(웃음)
⇒ 인터뷰②에서 계속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배우 이범수가 보여주는 악의 얼굴은 항상 강렬하고 새롭다. ‘27년차’라는 숫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그의 표정 하나에, 손동작 하나에 풍겨져 나온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는 누구에게도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눌 수 있는 냉정과 이념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품은 북한군 인천 방어사령관 ‘림계진’으로 분해 그간 보여줬던 악과는 또 다른 느낌을 구현해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가 매번 색다른 악을 빚어내기까지의 노력과 고민, 배우로서의 소망을 털어놓았다. 이범수는 ‘참된’과 ‘몰입’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10. 영화를 보고 난 후,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지던가.
이범수: 처음 내가 받았던 시나리오와 영화가 버전이 다르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좀 더 지적인, ‘고뇌하는 림계진’이었다. 한채선(진세연)과의 러브 라인으로 장학수(이정재)와 삼각 관계도 있는 구도였는데 시나리오가 점점 수정됐다. 일장일단이 있으니 난 찬성했다. 장학수랑 캐릭터가 겹치면 안되니까. 림계진이 좀 더 선명한 악역으로 캐릭터의 축을 잡기를 바랬다.
10. 여러 인터뷰나 언론시사회에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악역은 그 공간에서 마음껏 연기를 펼칠 수 있어서 매력적이라고도 했고.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어땠나.
이범수: ‘마음껏 연기를 펼칠 수 있다’는 말은 연기를 여러 버전으로 펼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예를 들어 장학수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여러 버전이 있었다. 장학수를 빤히 쳐다보면서 계속 말하는 버전도 있었고, 그를 전혀 쳐다보지 않고 남얘기하는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에 시선을 꽂으며 정확하게 응시하는 버전도 있었다. 그런 거다. 상황과 감정의 흐름에 맞게 유연하게 여러 가지 버전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악역에 대한 매력을 느끼는 거다.
10. 이정재와의 장교 클럽 장면에서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깊었다.
이범수: 사실 ‘인천상륙작전’에서 아쉬운 장면이 두 군데 있다. 장교 클럽 장면이 그 중 하나다. 장학수와 둘도 없는 단짝처럼 흥겨울수록 극적인 느낌이 배가되기 때문에 내가 러시아어로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편집이 돼서 개인적으로는 되게 아쉽다.
다른 하나는 탱크신이다. 그 신만 2주 동안 촬영했다. 결국 영화에는 20초 나오는데.(웃음) 원래는 시나리오에 흙더미가 흔들리면서 림계진이 탱크 위에 올라타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림계진 최고의 백미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게도 디렉터스 컷으로 봐야 된다.
10. ‘인천상륙작전’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범수: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고 평소에 전쟁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우리나라 작품이든, 외국 작품이든. 그래서 전쟁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전쟁 블록버스터 기회가 왔고, 심지어 우리의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도 재밌고 하니까 잘 됐다고 생각했다.
10. ‘신의 한 수’에 이어 또 다시 아주 강렬한 악역을 맡았다. 소감이 어떤가.
이범수: 오히려 부담감이다. 하지만 악역을 또 해야 되니까 하지 말아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구분선을 잘 지어서 또 다른 차이점을 만들면 되니까. 나는 그런 도전 혹은 모험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다.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은 모르겠지만 즐기는 것은 사실이다. ‘짝패’의 깡패두목, ‘신의 한 수’의 살수와 차별점을 두려고 노력했다.
‘신의 한 수’의 살수는 날렵하고 말수도 없는 뱀 같은 이미지였다면 림계진은 좀 더 능글맞고 아주 기름진 캐릭터로 잡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을 드렸다. 살도 찌워야겠다고 생각해서 찌웠다. ‘몇kg 찌워야지’하고 정해놓은 것은 없고 일단 찌웠다. 촬영할 때는 후덕함이 어울렸는데 내가 너무 멀리 온 것 같더라. 막상 살이 찌니까 부끄럽고 게으른 배우같고.(웃음) 속도 상하고. 나는 열심히 한 건데. 살을 서서히 빼야겠다 싶어서 2~3일 동안 촬영이 없을 때 뺐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첫 테이크가 끝나자마자 살 뺐냐고 물어보더라. 능글맞고 기름지게 잘 가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웃음) 또 그게 현장에서는 맞는 말이라 오케이하고 쭉 찌웠다. 결론적으로 7kg 찌웠다. 정확히 6kg 빠졌다. 인바디 검사를 해보니 체지방은 20kg까지 빠졌고, 근육은 십여kg가 늘어났다.
10. 아무리 직업이라고 하지만, 대단하다. 어떻게 한 건가.
이범수: 찌울 때는 다시는 안 뺄 것처럼 신났지.(웃음) 빼야할 그 날이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더군다나 감독님이 찌우라는데.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조금만 찌울 걸’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찌울 때는 몸, 아니 입이 편하지. 입은 신나고 정신은 힘들고. 살을 뺄 때는 몸이 힘들고 정신은 성취감이 들고.
이범수: 림계진으로 몰입하다 보니까 예상치 못한 문제점에 봉착했는데, 그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내가 맡은 역이 납득이 안되는 거다. 림계진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폭력까지 불사하는 공산주의잔데, 림계진을 연기하는 이범수는 그게 아니라 갭(gap)이 느껴지는 거다. 그래서 그 간극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타협점을 본 건, 내 스스로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으니 변형된 형태로 민족주의자로서의 림계진을 표현하자는 거였다. 림계진은 아마도 ‘잘 먹고 잘 살자는 건데’라는 생각으로 생각과 사상을 합리화하는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의 작품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면을 느껴보게 된 거다.
10. 과거 작품에서 림계진만큼 힘들었던 캐릭터가 있었나.
이범수: ‘오! 브라더스'(2003)의 오봉구.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서 처음 제안받았을 때 사실 김용화 감독에게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내가 혼자 다 뒤집어 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소 같은 눈, 그 눈에서 나오는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한다고 하더라. 칭찬을 받으니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웃음)
그 작품같은 경우에는 내가 지금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내면에 가지고 있는 순진함과 천진난만함을 억지로 찾아서 증폭시킨 거다. 그 당시 살고있던 집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이 등하교하는 모습을 한 달 동안 지켜보고 수업도 참관했다. 뛰어가는 모습도 많이 보고 순박한 면을 캐치해서 확장하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했다. 도전을 해보고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다행히 시사회 때 내가 내 연기를 보고 눈물이 났다. 욕먹는 연기를 한 것은 아닌지 객관적으로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진 거다. 특히 상우(이정재)에게 “아빠가 돈 남겨준 거, 이거 형이랑 나랑 나눠가지라고 돈 준거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뭉클했었다. 그때서야 ‘내가 갑자기 빠져들었네. 부끄럽게. 어느정도 설득력은 있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10. 연기를 한 지도 27년차다. 슬럼프를 대하는 당신의 자세가 궁금하다.
이범수: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연기가 직업임과 동시에 놀이고, 게임이고, 취미고, 오락이고, 여행이다. 하고 싶은 것이고 칭찬받고 싶은 것이다. 또 뻔한 것보다는 새롭게 해보고 싶더라.
예를 들어 ‘태양은 없다’ 때 내가 했던 단발머리처럼. 나는 그 머리를 선택한 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다. 몇 년 전에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는데, 극중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머리가 내가 했던 머리랑 똑같더라. 그 머리만큼은 내가 선배다.(웃음)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와 그 머리를 보고 나서야 ‘태양은 없다’ 때 병국을 본 이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조폭하면 스포츠 머리’라는 공식이 되게 싫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조폭 영화에 출연한다면 절대 깍두기 머리를 안 할 거다,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기회가 찾아온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명 신인이 참 당찬 거였다. 사실 내가 아주 무섭게 생긴 택시 기사님이 그런 머리를 하신 것을 보고 나름 영감을 받은 거다. 택시에 탔는데 내릴 수도 없고 얼마나 강렬했던지.(웃음)
10. 연륜이 있다 보니까 현장에서의 책임감도 있었을텐데.
이범수: 총격전을 벌일 때 신인 배우들이 경험이 많이 없다 보니까 위치를 잘 못찾아서 지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나도 무명 단역부터 시작한 배우로서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북한군 패거리랑은 대화의 자리를 많이 가졌다. 내가 절대 잘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커뮤니케이션해야 NG도 줄어들고 빨리 끝나니까. 먼저 나한테 자꾸 물어보기도 하고.(웃음) 호흡이 잘 맞아서 장학수 패거리가 부러워했다. 우리가 동선 연습하면 구경오고. 뒤에 와서 우리편 하라고 장난치고 그랬지.(웃음)
⇒ 인터뷰②에서 계속
김수경 기자 ksk@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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