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이은호 기자]
불혹. 40세를 이르는 말로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지난해 불혹을 넘긴 정재욱은 “겁나는 것도, 무서운 것도 없다. 상처도 크게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복면가왕’에서 탈락한 뒤, 그는 2주 동안 두문불출하고 술만 마셨단다. 의외의 심약함(?). 정재욱은 은근히 귀엽기까지 했다.

28일 정오, 정재욱의 신곡 ‘찡하고 짠하게’가 발매된다. 지난 2011년 세 장의 싱글 앨범 발매 이후 약 4년 만의 컴백. 유독 운이 따르지 않던 시간이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마음이 맞지 않았고 심지어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자의에 의한 공백이 아니었기에, 정재욱의 아쉬움은 더욱 컸다. “시간이 아까웠다”고 거듭 말하던 그는, 인터뷰 말미 “활동을 많이 안 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써먹을 게 있으니까”라며 웃어 보였다. 그래. 그 미소는 필시 ‘불혹’의 경지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정재욱
정재욱


Q. 무척 오랜만이다. 공백기가 상당히 길었다.
정재욱 : 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안 됐다. 사람들을 잘못 만나서 시간 낭비를 많이 한 거지. 아무것도 안 한 채 몇 년씩 지나가 버렸다. 사기도 당했고. 그 때 회의감이 들어서 음악이 아닌 다른 일을 할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다 올해 5월 지금의 소속사를 만나게 됐다.

Q. ‘복면가왕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정재욱 : 싱글앨범 준비를 하던 중 섭외가 들어왔다. 앞으로 열심히 활동을 해야 하니,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결과가 안 좋아서…(웃음)

Q.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정재욱의 탈락을 아쉬워하더라. 선곡을 지적하는 반응도 있었고.
정재욱 : 속상해서 모니터도 못했다. 녹화하고 방송이 될 때까지 2주 동안 두문불출했다. 누군가와 겨뤄서 떨어진다는 것에서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사실 ‘썸’이라는 노래가 내 장점을 보여줄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라이브를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의외로 음이 높은데다가 힘을 다 빼고 불러야 한다. 어려운 노래다.

Q. ‘불후의 명곡은 어땠나? ‘복면가왕은 정해진 곡을 부르지만, ‘불후의 명곡은 원하는 대로 편곡을 할 수 있잖아. 자신의 스타일이나 장점을 보여주기 좋았을 텐데.
정재욱 : 그 때 역시 선곡 운이 없었다. 가수들끼리 원하는 곡이 겹치면, 추첨을 통해 우선권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 회사 직원이 가장 마지막 순번에 걸린 거다. 또 빠른 곡을 하게 됐지. 그게 좀 아쉽다. 약간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Q. 그럼 경연 프로그램 출연에는 회의적인 편인가?
정재욱 : 그렇지는 않다. 프로그램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계속 출연할 거고. 다만, 탈락한 뒤에 상실감이 생기는 게 문제다. 앞으로 잘 극복해 나가야지. 그건 내가 할 몫이다. 그리고 사실, 경연 프로그램이 아니면 나갈 곳이 없다. 앨범 내고 집에서 기타나 튕겨야지, 뭐. (웃음)

Q. 하긴. 예전엔 공중파 3사마다 심야 음악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젠 유희열의 스케치북만 남았다. 예능 포맷 없이는 음악프로그램 제작이 불가능해 보인다.
정재욱 : 일단 시청자들이 자극적인 포맷을 원하니까, 그에 맞춰 제작이 되는 것 같다. 자기 노래를 할 무대가 없어진 게 아쉽기는 하다.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내 노래를 보여줄 무대가 많이 없기는 하다. 반면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사람이 주목을 받지 않나. 그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Q. 그러나 프로그램을 통한 재조명이, 과연 그 가수의 향후 행보로도 이어질까? 대중의 관심이 가수의 음악적 세계관이나 메시지가 아닌, 가창력에만 국한되는 것 같다.
정재욱 : 노래를 잘 만들어야 한다. 사실 아이돌이 아닌 이상, 자기 뜻대로 시장을 이끌어가기가 어렵다. 환경적으로 선구자적인 음악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잖아. 예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요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접점을 찾을 수 있게끔 영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재욱
정재욱


Q. 신곡 찡하게 짠하게는 영리하게 잘 만들어진 노래인가?
정재욱 :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Q. 무척 오랜만에 발표하는 곡인데 소감이 어떤가?
정재욱 : 너무 오랜만이다. 그래서 곡 작업을 할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옛날 가수 느낌을 없앨까 고민을 많이 했다. 편곡이나 창법도 요즘 스타일로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옛날 스타일대로 하면 촌스럽잖아.

Q. 하지만 예전 스타일에 대한 요구도 있지 않나? ‘‘잘가요너무 좋아요. 그 노래 같은 거 불러주세요라고 말하는 팬들도 있을 텐데.
정재욱 : 그런 스타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예전 스타일만 고집하는 건 내가 싫다. 잘 하는 것만 하면 개인적인 성과도 없고 발전도 없다. 계속해서 다른 스타일을 시도해야지. 자꾸 옛날 스타일대로 할 거면, 예전 노래를 리메이크 하는 게 낫지 않겠나. 히트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을 하는 게 재밌어야 한다.

Q. 음악적인 감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노력했나?
정재욱 : 트렌디한 음악을 많이 들었다. 빌보드, 브리티쉬 차트도 계속 검색해서 듣고. 요즘 음악들은 어떤 스타일이 많은지, 스펙트럼이 어떻게 넓어지는지 알아놓고 익히려고 했다.

Q. 제목이 특이하다. ‘’ ‘처럼 센 발음의 제목을, 발라드에서는 많이 안 쓰잖아.
정재욱 : 솔직히 나올만한 가사는 다 나왔다. 사랑 노래도 굉장히 많고. 임팩트 있는 제목이나 가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곡 쓰는 친구와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특이한 제목이지만 마음에 든다.

Q. 사랑 노래 말고 다른 가사를 써볼 법도 한데.
정재욱 : 가장 어려운 게 가사 작업이다. 나도 메시지를 주는 음악을 하고 싶다. 그런데 환경적으로 쉽지 않다. 잘못하다가는 심의에서 다 잘려버리니까. 하지만 사랑과 관계없는 가사,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가사를 나도 쓰고 싶다. 인생 전반에 대한 가사도 좋고, 무엇보다 사회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Q. 그러면 장르가 바뀔 수도 있겠다. 보통 그런 가사는 록 음악에서 많이 쓰지 않나?
정재욱 : 꼭 록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장르를 구현하려고 한다. 안 그래도 이번에 미니 앨범을 내려고 하거든. 지금 곡 작업 중이다. 10~11월 쯤 낼 생각이다. 최대한 잘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마 내 자작곡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Q. 어떤 사람은 나이 대에 맞는 노래가 있다고도 하더라. 사랑노래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정재욱 : 글쎄. 불렀을 때 어울리면 상관없는 것 같다. 60대도 사랑하는데, 뭐. 훨씬 깊이가 있겠지. 오히려 나는 젊을 때 록처럼 ‘핫’한 거 하고, 나이 먹어서 분위기 있는 노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최백호 선생님 봐라. 너무 멋지잖아. ‘부산에 가면’. 촤아악. 어우, 너무 좋다. 꼭 한 번 들어봐라. 정말 좋은 노래다.

정재욱
정재욱


Q. 어느덧 마흔을 넘은 나이가 됐다. 마흔을 불혹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도 불혹의 상태가 됐나?
정재욱 : 많이 그렇다. 겁나는 것도, 무서운 것도 없다. 엄청나게 큰 상처를 받아도 끙끙 앓는 게 없다. 어지간한 감정은 이미 최고치까지 경험해봤거든. 이제 여유로워지는 거다. 화가 날 일도 어느 정도 컨트롤이 된다. ‘이 정도 가지고? 허허’하며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거지.

Q. 어릴 땐 40대가 무척 많은 나이 같았는데, 한창 일할 나이라고들 하더라.
정재욱 : 글쎄. 나 같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30대에 하던 일을 이제 시작해야 하니 부담스럽기는 하다. 쉰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예전에 35~6세에 바짝바짝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33세 이후로 제대로 일한 적이 거의 없거든. “에라 모르겠다. 다 놓자’ 생각하려던 차에 좋은 기회가 찾아와 앨범도 다시 내게 됐다.

Q. ‘잘가요’ ‘가만히 눈을 감고등 히트곡이 많은 것도 도움이 됐겠다. 사람들이 금세 기억하고 받아들이잖아.
정재욱 : 그렇다.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르고 댓글도 달리는 걸 보면서 ‘아직까지 나한테 관심이 많이 있구나’ 라는 걸 알았다. 번외가 된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예전의 위치로 돌아가는 게 생각보다 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Q. 히트곡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담감은 없나? ‘예전 곡만큼 잘 돼야 해같은.
정재욱 : 예전에는 히트에 대한 강박이 굉장히 강했다. 그런데 ‘히트칠 거야’라고 기 쓰고 작업을 하다보면, 나 같은 경우는 잘 안 되더라. 반대로 ‘평타만 치자’고 했는데 잘 될 수 도 있고. 그건 모르는 거다. 알면 신(神)이지. 그래서 항상 우리 팀한테도 얘기 하는 게 80퍼센트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거다. 100퍼센트 열심히 하면 큰 좌절감을 겪을 수도 있다. 꾸준히 평균 이상으로 열심히 하면 데미지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Q. 나머지 20퍼센트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 같은 건가?
정재욱 : 안전장치라기보다는, 기 쓰고 열심히 해봐야 차이가 없다. 내가 100퍼센트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결과가 100퍼센트로 나오는 게 아니잖아. 80퍼센트로 한다고 해서 80퍼센트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노력만 하면 된다. 노력을 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Q. 아하. 그 20퍼센트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지점이라는 뜻이군?
정재욱 : 그렇다. 후회가 없을 정도로 노력하면 된다. 100퍼센트는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것 아니겠는가. 그건 안 좋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넉넉하게 생각해야지. 그리고 음악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세다. 나도 센 편인데, 고집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남 얘기를 많이 들으려고 하지. 나도 편곡이나 멜로디라인에 있어서, 나름대로 스타일이 있지 않겠나. 그렇지만 작곡자에게도 자기의 영역과 생각이 있다. 그걸 존중해줘야 한다. 그래야 나도 시너지를 얻어서 현대적인 뮤지션이 될 수 있다. 항상 남 얘기를 들을 귀가 남아 있어야 한다.

Q. 개인적으로는 뮤지션의 고집에 대한 동경이 있다.
정재욱 :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나는 여러 가지, 색다른 음악을 하는 게 좋다. 그런데 고집 있게 한 우물만 파다보면 색깔이 하나잖아. 그게 싫은 거다.

Q. 에이. 변화에 대한 고집도 고집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넌 하던 걸 해야 해라고 말해도, 새로운 음악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정재욱 : 그러다 망한다.(웃음) 남 얘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깊게 개입하면 안 된다. 내가 전체적인 색깔을 만들거나 구성을 짜는 건 좋다. 하지만 혼자 다 하려고 하면 망한다. 나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맡길 수 있는 건 맡기는 거고. 각자의 분야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들끼리 만나, 그 역량이 합쳐지는 게 좋지 않겠나?

정재욱
정재욱


Q. 많은 사람들이 정재욱을 정통 발라드 가수로 지칭한다. 그런데 뭐랄까, 요즘엔 발라드가 홀대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정재욱 : 홀대를 받는 게 아니라 발라드 시장이 없다. 차트를 봐도 100위까지의 노래 중 발라드는 한 두곡 정도다. 그나마도 일등은 절대 못한다. 그렇다고 그 노래들을 찾아서 들어보면, 별로 좋지도 않아. (Q. 통속적이라는 건가) 그렇지.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음악이 될 수도 있다. 잘하는 게 있다고 해서 그것만 고집할 게 아니라, 여러 가지를 결합시키는 게 중요하다.

Q. 그렇다면 정재욱은 어떤 것들을 결합시키려고 하는가?
정재욱 : ‘꼭 누구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건 없고, 여러 가지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최신 곡들을 들으며 ‘요즘은 이렇게도 부르는 구나’ 배우는 거지. 연습을 해두면 나도 나중에 써먹을 수 있잖아. 사실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똑같을 수 있다. 정재욱이 노래 부르는 거지, 뭐.(웃음) 그런데 부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내공이 있다’고도 하는데 내공도 연구를 계속 해야 느는 거다. 쌓여있는 걸 계속 써먹을 수는 없다.

Q. 소모되지 않아야 한다는 건가? 아직도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나 보다.
정재욱 : 남자 가수들이 가장 많이 연습하는 게 제임스 잉그램이다. 그냥 죽어라 파는 거다, 제임스 잉그램만. 그러면 그 사람과 되게 비슷해지긴 하는데, 다른 건 못한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제임스 잉그램도 해보고 조지 마이클도 해보는 거다. 다 열심히 해봐야,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내가 되는 거다. 다 흡수를 해야 한다.

Q. 요즘 가요 시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혹자는 90년대를 가요계 르네상스라고 하는데, 요즘도 굉장히 다양하지 않나? 아이돌 시장도 있고, 알엔비도 잘 되고. 힙합이나 밴드 씬도 커졌다.
정재욱 : 그래야 한다. 예전에는 댄스랑 발라드 밖에 없었잖아. 훨씬 낫다. 들을 것도 많고. 앞으로도 스펙트럼은 계속 넓어질 것 같다. 그 안에서 각자 자신의 색깔을 발하는 거다.

Q. 그러면 정재욱은 그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어떤 위치에 포지셔닝하고 싶나?
정재욱 : 그들 중 한명이고 싶다. 옛날 사람, 속된 말로 ‘꼰대’가 아니라. 그래서 방송하면서도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한다.

Q. 1999년 데뷔했으니, 이제 16년 차다. 그간 활동에 대해, 스스로에게 점수를 준다면?
정재욱 : 어유. 한 40점? 16년 동안 16집을 냈어야 하는데. (Q. 에이, 16년 동안 16집 못 낸 가수가 더 많다) 그래도 10집은 내야할 것 아니냐. 그런데 나는 정규 앨범이 4장정도 되나. 활동을 너무 안 했다. 시간이 아깝다. 하긴, 16집까지 안 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써먹을 게 있으니까.(웃음) 이제부터 부지런히 해야지.

Q. 가수, 언제까지 하고 싶나?
정재욱 : 내가 하는 음악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감을 가지지 않을 때까지. ‘쟤는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나’라는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

이은호 기자 wild37@
사진. 아레스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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