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공주’를 연출한 이수진 감독.

이 사람, 뜨겁다. 국내를 넘어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트로피를 수집 중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마리옹 꼬띠아르 등 세계적인 감독과 배우의 거짓말 같은 찬사도 들린다. 아직 4월이지만, 벌써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로 꼽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괴물 신인 감독의 등장에 충무로가 환호 중이다. 영화 ‘한공주’ 그리고 이수진 감독이다. ‘한공주’는 학원 성폭력을 소재로 했다. 맞다. 기존에 많이 다뤄졌던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수진 감독은 그 안에서 새로움을 찾아냈다. 한공주(천우희)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희망을 노래했다. 분노와 공분보다는 공감과 미안함의 정서로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 여운, 상당히 길다. 그 어느 때보다 이수진 감독이 궁금했다.

Q. 첫 장편 영화인데 굉장한 임팩트를 안기는 중이다. 좀 이른 이야기지만, 이수진 감독의 차기작 소식이 들리면 그 관심은 엄청날 것 같다.
이수진 감독 : 이렇게 상을 많이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그리고 부담감은 주변에서 주는 거다.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닐뿐더러 중요한 건 어떤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잘하고 있느냐 같다. 다음 영화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게 사람들한테 잘 전해져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Q. 해외에서 계속해서 수상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언론은 몇몇 멘트 정도만 전해지고 있는데, 실제 해외 영화제에서 ‘한공주’를 바라보는 반응과 분위기를 전해 달라. 인상 깊었던 말 등등.
이수진 감독 : 우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나한테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데 한국 가서 이야기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다’고 했더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그러면 나하고 같이 사진 찍자’고 했을 정도다. 마라케시영화제 때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누군가 갑자기 오는 거다. 굉장히 아리따운 유럽 아가씨들이 대뜸 와서 ‘한공주’ 감독이냐며 인사를 한 다음에 자기들이 느꼈던 감상을 이야기해주더라.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공주’ 이야기가 해외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론 나도 다른 곳에서 영화를 보면 이 아가씨들처럼 먼저 이야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웃음). 다른 영화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팜스프링스영화제 당시 첫 GV 때인데 시간 내에 질문을 못 한 사람들이 끝나고 나서도 물어 왔다. 그중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느낌을 이야기하던 어떤 아주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또 인터뷰 역시 기억에 남는다. 어떤 한 기자가 ‘한국에서 이런 일이 많아’라고 묻더라. 그래서 ‘많고 적음의 기준이 없다. 당신이 생각하게 많은 게 어떤 거고, 적은 게 어떤 거냐’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자는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던 것 같다. 인터뷰를 길게 했는데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다른 질문 하다가도 결국 그 질문으로 돌아오는 거다. 그 기자가 덴마크 기자였는데, 그래서 ‘영화 ‘헌트’를 보고, 덴마크 전체 사회가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한공주’도 마찬가지다. 한국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다.

Q. 처음엔 제목만 보고 이런 생각 들었다. 극 중 이름이라곤 생각 못 하고, ‘쟤, 한~공주 하네.’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집단 따돌림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다.
이수진 감독 : (웃음). 그런 생각까진 못했다. 극 중 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싶었고, 공주란 이름이 이상적이었다. 또 공주라는 이름인데 오히려 사람들에겐 외면당하는 아이러니함도 가지고 있다.


Q. 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엔 여자 감독이라서 여고생의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남자 감독이라서 조금 놀랐다. (웃음)

이수진 감독 : 흔한 경우다. 부산에서 ‘한공주’ GV를 했는데 ‘남자야’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은행에서 ‘이수진 고객분’ 외칠 때 내가 일어설 때 반응도 그렇다. (웃음) 재미난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해외 영화제에서 어느 한 분이 ‘만약 여자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했다. 그래서 그 기자한테 ‘내 이름이 이수진인데, 한국에서 이 이름은 여성적으로 읽힌다. 이것도 당신이 가진 하나의 선입견 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편으론 이름 덕을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Q. 그리고 필모를 보니 허진호 감독의 ‘행복’ 연출부를 했더라. 허진호 감독의 영향이 있을까.
이수진 감독 : 어느 정도라고 계량화는 못하지만, 당연히 있지 않을까. 특히 인성적인 부분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다. 이 영화 할 때도 도움 많이 주셨다.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모니터를 많이 안 하는데 허진호 감독님께는 보여드린다. 길게는 아니더라도 요소요소 이야기해주시고, 수상할 때마다 직접 전화 주셔서 축하 말을 해주신다.

Q. ‘한공주’가 다루고 있는 게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알고 있다. 그 사건을 가져온 게 맞나.
이수진 감독 : 모호하다. 왜냐하면, 영감을 받고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어떤 사건을 재현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과거의 이야기로 재조명되는 영화가 되길 바라지도 않았다.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봐주길 원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어떤 고민을 하면 이런 것들이 줄어들지 근원적인 부분에 관해 이야기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또 모든 캐릭터가 허구로 만들어졌는데 실존인물로 생각하면 큰 오류가 발생한다. 그래서 애매하고, 모호하다는 의미다.

Q. 이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었나.
이수진 감독 : 성폭행 사건, 왕따 등 너무 많다. 그게 매우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생각한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 30대 남자로서 봤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마다 분노했다. 잊힐만하면 사건이 또 터지고, 또 터지고. 분노를 막 하다가 하루는 나 스스로 되물어봤다. 만약 내 주변에 피해자든, 가해자든 관련된 사람이 온다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 봤던 것 같다. 선뜻 답이 안 나오는 거다. 참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었고, 그동안 쉽게 분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기존에 있었던 유사한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이 영화가 만들어질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피해자, 가해자를 가늠하는 영화가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 있는 소녀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 지독한 성장 이야기 그리고 소녀를 둘러싼 나와 우리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했다.


Q. 처음 이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이수진 감독 : 주위에 말하는 단계가 시나리오 초고가 완전히 나오고 나서인데, 그러기까지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 많았다. 왜 이 이야기를 하려는지 계속된 질문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 걸까, 하지 않는 게 옳은 걸까. 또 영화를 만드는 게 맞을까, 만들지 않는 게 맞을까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하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해 만들게 됐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나선 영화진흥위원회 등 지원을 냈던 것 같다. 그리고 단편 ‘적의 사과’를 같이 했던 스태프들에게 시나리오 보고 할 마음 있으면 같이 하자고 했다. 재미없다는 사람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음악감독이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Q. 보통 이 같은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의 공통된 정서가 분노에 가깝다. 그런데 ‘한공주’는 분노보다 미안함이나 반성의 정서가 강하다. 얼마든지 분노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수진 감독 : 분노라는 게 표피적이라고 느꼈다. 또 분노는 일으키는 영화는 많았다. 그래서 굳이 또 분노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근원적인 고민, 이 친구한테 미안함 등이 있으면 했다.

Q. 그래서인지 직접적인 소재를 꺼내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생각이다. 소재를 모르고 봤을 때 미안함과 반성이 더욱 크게 다가올 것 같다.
이수진 감독 : 영화에서도 성폭행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나중에 공주가 바라보는 신문에서만 그 단어가 나온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은연중에 단어에 대한 부담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Q.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굉장히 흥미롭다.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이수진 감독 : 구조에 대한 고민보다 피해자, 가해자를 가늠하지 않고 소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 순서로 가면 어떤 누구는 나쁜 놈이 되고, 어떤 누구는 피해를 당한 아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해 과거로 갔다가 다시 현재에서 끝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해당 사건이 시선을 많이 끌긴 하지만, 현재 이 소녀가 하는 행위들에 과거가 감성적으로 같이 따라올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고민이 있었다. 또 큰 사건도 없고, 소녀의 감성과 주변 사람 에피소드로 가는데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 리듬이 끊일 것 같았다. 하나의 호흡으로 가야 했고, 영화를 보면 과거인지 현재인지 아리송한 부분이 있다. 물론 과거, 현재를 명확하게 알지 않아도 극을 따라가는 데 있어 무리 없게 했다.


Q. 천우희, 정인선, 김소영 등 캐스팅이 일품이다. 마치 그 배우들을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우희는 정말 한공주 같았고, 정인선은 은희 같고, 김소영은 화옥 같다.

이수진 감독 : 어린 친구들 모두 오디션을 통해 뽑았다. 천우희는 오디션 볼 때도 인상적이었지만, 배웅할 때도 공주에 대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속으로 ‘이 녀석 봐라. 똘똘한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끼기엔 동물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공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잡혀 있었다. 흡수도 빨랐다. 정인선은 내가 고마워하는 경우다. 갑자기 은희 역을 맡은 친구가 못하게 되면서 공석이 됐다. 일주일 안에 배우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정인선은 프리 단계에서 (오디션을) 보자고 했는데 학기 중이라서 안 보겠다고 했었다. 그래도 다시 연락해보자고 해서 하게 된 건데 오디션을 보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날 바로 캐스팅했다. 예전에 안 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니 그런 적 없다고 하더라. 어디선가 전달이. (웃음). 은희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본래 성격도 밝고, 활달하고. 김소영은 성격만 봤을 때 딱 화옥이었다. 이야기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해피바이러스’를 지녔다. 무엇보다 세 명의 조화가 굉장히 좋았다. 좋은 환경은 아니었으나 본인들이 그 환경 안에서 열심히 해준 것 같다.

Q. 배우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이수진 감독 : ‘가식적이지 않게 하자’였던 것 같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프리 단계에서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랬던 것 같다. 고등학교 생활, 친구들과 다툼, 좋아하는 친구들하고의 스킨십 등 세세한 부분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첫 촬영 날 가장 어려운 신을 찍었다. 영화는 현재에서 시작하지만, 과거의 아픔이 있고 난 다음이다. 그런데 그걸 상상만으로는 아픔이 있고 난 다음의 감정을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물론 영화라서 실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걸 느껴보는 것과 생각만 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나를 비롯한 스태프 역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Q. 가해자 남학생들도 문제지만, 그들의 부모, 즉 86명의 어른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아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란 생각을 많이 했다. 막상 지금은 냉정하게 말하겠지만, 영화 속 상황이 내게 닥치면 또 모를 일이다.
이수진 감독 : 그게 중요한 지점인 것 같다. 사회를 움직이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학부형이고, 그러므로 아이들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Q. 한공주는 재능이 많은 아이인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짠하다. 자기 이름을 내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고.
이수진 감독 : 공주가 강한 친구였으면 했다. 선천적으로 강한 게 아니라 불우하지만, 자신을 지킬 수 있고, 하나하나 잘 만들어나가는 아이로 그리고 싶었다. 극 중 음악은 공주에게 버팀목이기도 하고, 자기 꿈이기도 하고, 위로받을 수도 있는 장치다. 짠한 마음이 생기는 건 그 뒤로 그런 감정이 쌓이는 부분인 것 같다.


Q. 결말이 궁금하다. 공주가 수영을 배우지만, 한강 다리에서 떨어지는 건 수영을 배우는 것과 무관한 일이다. 물론 수영을 배우는 것에 대해 ‘혹시 다른 생각이 들면 살아야 하니까’란 느낌의 말을 한다.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하여튼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은 애매한 결말이다.

이수진 감독 : 살아 있다. 시나리오에서부터 공주는 살아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공주를 연호하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돼 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걸로 묘사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된 부분이 있었다. 재촬영을 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는데 이 영화의 중요한 지점은 끝나고 난 뒤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공주들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1분 28초 한 컷인데, 그 한 컷 때문에 111분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먼저 생각한 장면이 엔딩과 ‘전 잘 못한 게 없는 데요’라고 말하는 첫 장면이다.

Q. ‘한공주’가 저예산 영화이지 않나. 만약에 넉넉한 예산이 있었다면, 좀 더 표현하고 싶었던 게 있나.
이수진 감독 : 원망하지 않을 정도로 월급을 좀 더 줬을 것 같다. (웃음) (다른 부분은 만족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착취라고 할 수 있다. 한두 달 몰두하면서 생활하는 데 있어 열악한 환경이다. 그런데도 예산을 줄일 수 있는 건 인건비밖에 없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다. 상을 받을 때 스태프나 배우 칭찬이 있을 때마다 더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고 나면 전화해서 ‘누가 너 이렇게 칭찬했어’라고 이야기도 해주고.

Q.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궁금하다.
이수진 감독 :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정말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니’라고 항상 되물어본다. 그게 명확하게 설 땐 어떻게든 그 영화를 만들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고민 끝에 나올 수도 있고, 어느 순간 가지고 있는 마음과 만나는 지점에서 올 수도 있고. 다음 작품이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빨리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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