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화장품 사장 김형준(이선균), 국내 최고의 명문대를 나왔다는 이 남자가 살아가는 1990년대는 누추하기 이를 데 없다.

짱짱한 대기업을 다니다 호기롭게 나와 화장품 회사를 차린 그. 그러나 어느 날 불어닥친 IMF 금융위기 탓에 채권추심원의 협박을 받기 바쁜 처지다. 미스코리아를 배출해내면 투자를 해주겠다는 투자사의 제안을 받은 그는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오지영(이연희)을 찾아간다.

10년 전에는 눈조차 마주치기 어려웠던 지영.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절 기적처럼 지영과 알콩달콩 순수한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감정을 나누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의 낭만은 과거에만 묻어둬야했다. 엘리베이터 걸로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는 지영의 처지 조차 형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먹고 살기 빠듯해서다. 어떻게 해서라도 지영이 미스코리아가 돼 투자를 받아내야 한다는 욕심이 더 앞섰다.

어느 날 갑자기 다시 찾아와 “내 눈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라며 미스코리아가 되어 달라는 프러포즈를 하는 김형준이 지영의 눈에 동화 속 왕자일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처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욱 누추한 속물일 뿐이다. 급기야 형준이 데려간 자리에서 만난 투자자 이윤(이기우)은 지영에게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싸구려 제안을 한다. 그러니 지영에게 형준은 다시 찾아와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앉은 얼룩진 첫사랑이다.



그런데도 이 남자,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

상금 500만원을 타 빚을 갚겠다며 제주 감귤아가씨 선발대회에 죽자살자 지영을 내보내더니 막상 무대에 오른 지영의 힐굽이 부러져 발목이 위험해지자 지영을 덥썩 안고 내려오질 않나, 이제는 자신이 도리어 미스코리아가 꼭 되어야 겠다며 가슴수술까지 하겠다는 지영에게 “수술하면 나한테 죽어!”라며 “작은 가슴이 절대 치부가 될 수 없어. 가슴 없이도 미스코리아 만들어줄게”라고 말한다.

자기의 회사를 살려내기 위해 미스코리아가 되어 달라고 제안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 무섭지 않느냐며 만류하는 이 남자의 이중성은 참 슬프다.

그 시절 그 누가 그러지 않았을까. 누구나 심장이 말하는대로, 가슴이 말하는대로 살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었던 시절. 초라한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럼에도 손목 발목 다 묶인 처지 탓 밖에 할 수 없는 누더기 같은 처지.

그런데 말이다. 그것이 과연 1990년대만의 일일까? 추억이라는 것, 기억이라는 것은 결국 미화되기 마련. 아무리 힘들어도 그 시절을 견뎌내고나면 그 시절 나름의 가치를 되새기기 마련인데, 형준의 아픔, 지영의 상처가 없었던 시절 나름의 낭만으로 다가오지 않고 여전히 쿡쿡 쑤시는 것은 그것이 2014년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 아닐까.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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