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기너스’ 스틸

아직 그녀의 이름이 낯설다 해도 놀랄 것은 없다. 혹시 당신의 연애세포가 죽었다면 그녀의 긴급 처방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파리지엔의 특별한 사랑법을 엿보고 싶다면 그녀에게 주목하자.

영화 ‘비기너스’ 스틸

그녀는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수첩에 적어서 한 남자에게 질문한다. ‘비기너스’(2010)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올리버(이완 맥그리거)는 귀요미 개 아더에게 말을 가르칠 정도로 외로운 남자다. 그는 프로이드 복장을 하고 파티에 갔다가 우연히 배우 안나를 만난다. 그녀는 후두염이 있어서 말을 못한다면서, 귀엽게 수첩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그녀는 올리버의 슬픈 눈을 알아보고,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 파티에는 왜 왔냐?”고 질문한다. 아무 대사 없이, 계속 수첩에 질문을 적는 그녀가 바로 멜라니 로랑이었다. 첫 등장부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더욱 신비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프랑스 무성영화에 튀어나온 뮤즈 같았다. 그녀는 올리버와 섹스 후, 마치 문신을 새기듯이 그의 왼팔을 깨물고 이빨 자국에 키스한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이완 맥그리거는 멜로드라마에서 늘 나오는 흔하디흔한 대사를 날린다. 즉 “우리는 어떻게 될까?”라고 묻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영화의 오프닝처럼 그녀가 침묵을 지키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눈부셨던 것은 이 영화가 처음도 아니다. 이미 ‘사랑을 부르는, 파리’(2008)에 출연해 파리 여대생에 대한 판타지를 급상승시켰다. 그녀는 롤랑 교수가 첫눈에 반한 여학생 래티시아로 등장했다. 롤랑은 마치 롤리타에게 빠져든 험버트처럼 집착하며, “아니, 그녀는 왜 저렇게 예쁘지?”라고 탄성을 자아냈다. 하지만 시크하고 자기중심적인 래티시아는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스틸

새침데기 멜라니에게 청순한 미소를 발견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1998년 ‘아스테릭스’ 영화현장에 방문한 그녀는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권유로 연기와 인연을 맺었다. 제라르는 직접 연출한 ‘연못 위의 다리’의 단역을 주었다. 그 후 연기자의 길을 걸었고,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2006)에서 쌍둥이 형제를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릴리를 연기해 세자르에서 신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신세대 스타의 탄생을 알리기에 충분했으나, 이 영화에선 신경쇠약 직전의 그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재미난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그녀의 진가를 알아 본 일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에서 극장 주인 쇼산나 역을 맡은 그녀는 잔혹한 나치 한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에 맞서 당당한 연기를 펼친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쇼산나는 필름으로 극장을 불태워서 히틀러와 수하들을 전멸시킬 계획을 세우지만, 열혈청년 프레드릭(다니엘 브륄)에게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가 총을 맞는다. 피를 흘리는 영사실에서의 최후는 비극적이지만, 곧 유령처럼 스크린 속(영화 속 영화)에 나타나 “유대인의 얼굴을 선물하겠다. 유대인의 복수다”라고 외친다. 극장 안이 불바다가 될 때 그녀의 웃음이 마치 오즈의 마법사나 마부제 박사처럼 울려 퍼진다. ‘킬 빌’의 우마 서먼처럼 ‘복수의 화신’으로 나온 멜라니는 가녀린 여인이 용감해지는 방법을 강의하는 듯 했다. 그나마 ‘더 콘서트’(2009)에서 도도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앤 마리로 등장할 때는 차가운 얼굴(무표정)과 강렬한 눈빛이 시선을 끌었다.

영화 ‘나우 유 씨 미:마술사기단’ 스틸

2011년에는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마린’을 선보였다. 한참 주목 받는 여배우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뜻밖이지만, 결코 뛰어난 영화는 아니었다. 리사가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진 동생 마린 덕분에 점점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이야기다. 언니 리사로 나온 멜라니의 연기는 다분히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의 속편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여전히 엄청난 스타는 아니다. 지금껏 꽤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지만, 영화 흥행을 좌우하는 파워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니, 욕심나는 배역을 맡기 위해선 스스로 연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루이스 리터리어 감독의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에도 합류하면서 나름 자신의 주가를 올렸다. 여기서 알마 역할은 ‘비기너스’의 안나에 비하면 비중이 작지만, 마술사 포 호스맨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딜런(마크 러팔로)을 위해서는 그녀가 꼭 필요했다. 파리의 퐁데자르(예술의 다리)에서 멋지게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려면 역시 파리지엔의 숨결을 빌려와야 하니까 말이다. 여기서 그녀의 미소를 조금 맛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그녀 덕분에 연애세포가 조금이라도 살아난 것에 만족한다. 최근에는 ‘에너미’와 ‘크라이/플라이’의 촬영을 마친 상태다. 얼마나 좋은 연기를 보여줄지 아직 짐작할 수 없지만, 차기작을 구경하기까진 ‘비기너스’의 파티 장면을 PC 모니터에서 무한 반복해서 돌려볼 수밖에 없다. 아직은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있던 모습으로 충분하다. 이런 미소는 누벨바그 세대의 여신들이나 간직한 것이었다.

글. 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 기명균 kikiki@ten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