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순이: Thinkin` how you did me wrong / and I grew strong / And I learned how to get along (당신이 내게 한 잘못된 행동들을 생각하면서 / 나는 강해졌죠 / 그리고 살아가는 법을 배웠죠)
– 인순이가 MBC <우리들의 일밤>의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난 괜찮아’의 가사 일부
김양배: 인순이의 어머니.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순이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랐고, 혼혈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특히 자랄수록 주변에서 혼혈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다르게 보는 시선이 힘들었고, 동생은 결국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인순이의 어머니는 그에게 “세상의 편견에 당당히 맞서 싸워라”라고 가르쳤고, 건강이 악화된 뒤에도 딸에게 직접 음식을 해주는 사랑을 보여줬다. 인순이는 이런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기 위해 가수를 시작한다. 훗날 인순이는 시청 앞에서 열린 대형 무대에 오르기 직전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고, 공연을 취소하고 어머니에게 가려다 “그건 어머니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끝까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희자매: 인순이가 데뷔 당시 소속돼 있던 그룹. 김완선의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가 제작했다. 당시 인순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했지만 혼혈이라는 이유로 취직조차 어려웠고, “돈을 준다”는 말에 가수를 시작했다. 인순이는 한백희가 자신을 발탁한 것에 대해 “남하고 다른, 튀는 내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고. 희자매는 197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 출연하는 등 높은 인기를 누렸고, 인순이는 가족을 책임질 수 있게 됐다. 당시 인순이는 “어떻게 얻은 가수라는 직업인데 순간의 일탈이나 게으름으로 놓치고 싶지 않”아 “노래로 도를 터보겠다는 생각”으로 노래 연습에 매진하며 현재의 실력에 대한 초석을 다져 놓는다.
김정택: 인순이의 대표곡 ‘밤이면 밤마다’의 작곡가. 1970년대 후반 승승장구하던 인순이는 1980년대 초반 대학 가요제 등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 각광받으면서 슬럼프가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방송사 출연이 어려워졌을 정도. ‘밤이면 밤마다’는 그 시절을 견디게 해줬다. 당시 인순이는 나이트클럽 등 이른바 ‘밤무대’에 열심히 나갔고, ‘밤이면 밤마다’는 밤무대에서 최고의 인기곡이 됐다. 인순이는 밤무대 활동에 대해 “나는 고상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대중 가수다. 콘서트는 대도시와 일부 사람들만 갈 수 있다. 소도시 업소에 가서 대중과 만나 희로애락을 나눈다. 그곳에서 대중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인순이는 취객들이 가득한 밤무대 활동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을 익혔고, 1997년경 이틀에 7~8백만원까지 출연료가 올랐다. 인순이가 KBS <열린음악회>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건 밤무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진영: 인순이의 ‘또’를 작곡한 뮤지션.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하면서 인순이는 가창력에 있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 이른바 ‘국민 가수’가 됐다. 하지만 <열린 음악회>는 당시 30대이던 인순이에게 무거운 이미지를 부여했고, 젊은 세대와는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인순이는 ‘또’를 통해 자신의 폭발적인 소울 보컬을 드러냈고, 얼마든지 격렬한 댄스 음악을 소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또’는 대중적으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그는 이후 후배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무게감있는 ‘국민 가수’이자 젊은 층에도 고루하지만은 않은 ‘젊은 언니’의 이미지를 함께 유지할 수 있었다. 한 의류 브랜드에서 “전 연령대가 입을 수 있는 브랜드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인순이를 모델로 기용하고, 때론 무대 위에서 파격적인 의상을 입을 수 있는 이유. <열린 음악회>든 파격적인 의상이든, 인순이의 현재는 계속된 시도와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다.
조PD: 보다 젊은 세대의 음악을 받아들이려는 인순이의 노력은 조PD와 함께한 ‘친구여’에서 결실을 거둔다. 형식상으로는 조PD의 노래에 인순이가 피처링을 한 것이었지만, 인순이의 존재감은 노래 전체를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친구와 인생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는 가사는 인순이의 보컬이 더해지면서 ‘친구여’가 랩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대에 걸쳐 히트하도록 만들었다. ‘또’를 발표하던 당시 “사회 전체적으로 조로화 현상이 심해지는 게 안타까웠다. 마흔도 안 돼 원로가수 취급을 받기도 싫었다”며 “모든 중년을 대표해 나섰다”는 자신의 다짐을 실천한 셈. 그리고, 결정타.
김동률: 인순이가 리메이크한 ‘거위의 꿈’을 작곡한 뮤지션. 김동률과 이적이 함께 부른 ‘거위의 꿈’이 모든 것이 불안한 청춘의 절실한 외침이었다면, 인순이의 ‘거위의 꿈’은 그 모든 시절을 지나, 자신의 SNS에 “태어날 때 가난한건 나의 선택이 아니지만 죽을 때 가난한건 나의 선택이다”라는 말이 와 닿았다고 할만큼 치열한 노력으로 한 세상을 산 사람이 모든 세대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다. 원곡이 가진 청춘의 정서는 희석됐지만, 대신 모든 사람들이 ‘거위의 꿈’을 알고, 불렀다. 원래 ‘거위의 꿈’은 인순이가 콘서트에서 부를 노래를 찾던 중 “‘마이웨이’를 부르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한 와중에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라는 가사가 생각”나서 김동률과 이적의 허락을 받고 ‘거위의 꿈’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젊은 친구들보다 나이는 많지만 아직 인생을 정리할 시기는 아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의 정서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또래들에게도 들려준다. 인순이가 독보적인 자리를 지키는 건 단지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자기 세대가 이루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박경배: 인순이의 남편. 인순이는 故 이주일이 경영하던 나이트 클럽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경리를 담당하던 그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는 그 때부터 일만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만큼 가족은 그에게 중요한 존재였고,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가족을 지키려 했다. 인순이는 딸을 미국에서 출산하며 원정출산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나를 닮은 딸 아이를 낳아서 딸이 놀림감이 되면 어쩌지”하는 걱정을 하던 인순이는 딸이 외국인학교라도 가면 그런 고민을 덜할 것 같아 그런 선택을 했다고.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머리 모양 때문에 모자를 쓰고 다니거나 혼혈이라는 이유로 동경 가요제 출전 기회를 놓쳤다. 그의 행동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인순이가 예술의 전당 출연을 계속 시도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집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다른 피부색의 한국인으로 산 인순이에게 예술의 전당 출연은 자신이 세상에 인정받는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역시 동의하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다. 인순이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다문화 가정을 위한 봉사활동을 쉬지 않았다.
박정현: 인순이의 ‘나는 가수다’ 첫 출연을 함께한 가수. 함께 공연하고 싶은 후배 가수로, “함께 노래했을 때 ‘팽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인순이는 첫 무대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무대 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특유의 폭발적인 가창력 대신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순이의 모습은 마치 그 모든 괴로움을 내려놓은 어른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오른 가수는 무대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불렀고, 무대 위에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그리고, 21세기의 <열린 음악회>일지도 모를 ‘나는 가수다’를 통해 계속 수많은 대중과 호흡하고 있다. 그는 최근 “후회에는 해본 후회와 안 해본 후회가 있다. 전자는 결과가 있어서 미련이 없다”며 뮤지컬 <캣츠>에 도전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이후 온전한 자신의 노래로 히트를 하지는 못하는 아쉬움은 있다. 또한 가끔은 논란의 대상도 됐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인순이는 대중의 한복판에서, 무대 위에서 노래했다. 그리고, 인정받고 있다.
– 인순이가 MBC <우리들의 일밤>의 ‘나는 가수다’에서 부른 ‘난 괜찮아’의 가사 일부
희자매: 인순이가 데뷔 당시 소속돼 있던 그룹. 김완선의 이모이자 매니저였던 한백희가 제작했다. 당시 인순이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어떻게든 일을 하려고 했지만 혼혈이라는 이유로 취직조차 어려웠고, “돈을 준다”는 말에 가수를 시작했다. 인순이는 한백희가 자신을 발탁한 것에 대해 “남하고 다른, 튀는 내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고. 희자매는 197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 출연하는 등 높은 인기를 누렸고, 인순이는 가족을 책임질 수 있게 됐다. 당시 인순이는 “어떻게 얻은 가수라는 직업인데 순간의 일탈이나 게으름으로 놓치고 싶지 않”아 “노래로 도를 터보겠다는 생각”으로 노래 연습에 매진하며 현재의 실력에 대한 초석을 다져 놓는다.
김정택: 인순이의 대표곡 ‘밤이면 밤마다’의 작곡가. 1970년대 후반 승승장구하던 인순이는 1980년대 초반 대학 가요제 등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 각광받으면서 슬럼프가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방송사 출연이 어려워졌을 정도. ‘밤이면 밤마다’는 그 시절을 견디게 해줬다. 당시 인순이는 나이트클럽 등 이른바 ‘밤무대’에 열심히 나갔고, ‘밤이면 밤마다’는 밤무대에서 최고의 인기곡이 됐다. 인순이는 밤무대 활동에 대해 “나는 고상하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대중 가수다. 콘서트는 대도시와 일부 사람들만 갈 수 있다. 소도시 업소에 가서 대중과 만나 희로애락을 나눈다. 그곳에서 대중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인순이는 취객들이 가득한 밤무대 활동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을 익혔고, 1997년경 이틀에 7~8백만원까지 출연료가 올랐다. 인순이가 KBS <열린음악회>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건 밤무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진영: 인순이의 ‘또’를 작곡한 뮤지션.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열린 음악회>에 출연하면서 인순이는 가창력에 있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 이른바 ‘국민 가수’가 됐다. 하지만 <열린 음악회>는 당시 30대이던 인순이에게 무거운 이미지를 부여했고, 젊은 세대와는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인순이는 ‘또’를 통해 자신의 폭발적인 소울 보컬을 드러냈고, 얼마든지 격렬한 댄스 음악을 소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또’는 대중적으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그는 이후 후배 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무게감있는 ‘국민 가수’이자 젊은 층에도 고루하지만은 않은 ‘젊은 언니’의 이미지를 함께 유지할 수 있었다. 한 의류 브랜드에서 “전 연령대가 입을 수 있는 브랜드를 지향”한다는 이유로 인순이를 모델로 기용하고, 때론 무대 위에서 파격적인 의상을 입을 수 있는 이유. <열린 음악회>든 파격적인 의상이든, 인순이의 현재는 계속된 시도와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이다.
조PD: 보다 젊은 세대의 음악을 받아들이려는 인순이의 노력은 조PD와 함께한 ‘친구여’에서 결실을 거둔다. 형식상으로는 조PD의 노래에 인순이가 피처링을 한 것이었지만, 인순이의 존재감은 노래 전체를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친구와 인생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는 가사는 인순이의 보컬이 더해지면서 ‘친구여’가 랩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대에 걸쳐 히트하도록 만들었다. ‘또’를 발표하던 당시 “사회 전체적으로 조로화 현상이 심해지는 게 안타까웠다. 마흔도 안 돼 원로가수 취급을 받기도 싫었다”며 “모든 중년을 대표해 나섰다”는 자신의 다짐을 실천한 셈. 그리고, 결정타.
김동률: 인순이가 리메이크한 ‘거위의 꿈’을 작곡한 뮤지션. 김동률과 이적이 함께 부른 ‘거위의 꿈’이 모든 것이 불안한 청춘의 절실한 외침이었다면, 인순이의 ‘거위의 꿈’은 그 모든 시절을 지나, 자신의 SNS에 “태어날 때 가난한건 나의 선택이 아니지만 죽을 때 가난한건 나의 선택이다”라는 말이 와 닿았다고 할만큼 치열한 노력으로 한 세상을 산 사람이 모든 세대에게 보내는 위로와 격려다. 원곡이 가진 청춘의 정서는 희석됐지만, 대신 모든 사람들이 ‘거위의 꿈’을 알고, 불렀다. 원래 ‘거위의 꿈’은 인순이가 콘서트에서 부를 노래를 찾던 중 “‘마이웨이’를 부르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한 와중에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라는 가사가 생각”나서 김동률과 이적의 허락을 받고 ‘거위의 꿈’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젊은 친구들보다 나이는 많지만 아직 인생을 정리할 시기는 아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의 정서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또래들에게도 들려준다. 인순이가 독보적인 자리를 지키는 건 단지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자기 세대가 이루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박경배: 인순이의 남편. 인순이는 故 이주일이 경영하던 나이트 클럽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경리를 담당하던 그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는 그 때부터 일만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만큼 가족은 그에게 중요한 존재였고, 자신이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가족을 지키려 했다. 인순이는 딸을 미국에서 출산하며 원정출산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나를 닮은 딸 아이를 낳아서 딸이 놀림감이 되면 어쩌지”하는 걱정을 하던 인순이는 딸이 외국인학교라도 가면 그런 고민을 덜할 것 같아 그런 선택을 했다고.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머리 모양 때문에 모자를 쓰고 다니거나 혼혈이라는 이유로 동경 가요제 출전 기회를 놓쳤다. 그의 행동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인순이가 예술의 전당 출연을 계속 시도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집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다른 피부색의 한국인으로 산 인순이에게 예술의 전당 출연은 자신이 세상에 인정받는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역시 동의하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는 있다. 인순이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다문화 가정을 위한 봉사활동을 쉬지 않았다.
박정현: 인순이의 ‘나는 가수다’ 첫 출연을 함께한 가수. 함께 공연하고 싶은 후배 가수로, “함께 노래했을 때 ‘팽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인순이는 첫 무대에서 ‘아버지’를 부르며 무대 위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특유의 폭발적인 가창력 대신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순이의 모습은 마치 그 모든 괴로움을 내려놓은 어른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돈을 벌기 위해 무대에 오른 가수는 무대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한 노래를 불렀고, 무대 위에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그리고, 21세기의 <열린 음악회>일지도 모를 ‘나는 가수다’를 통해 계속 수많은 대중과 호흡하고 있다. 그는 최근 “후회에는 해본 후회와 안 해본 후회가 있다. 전자는 결과가 있어서 미련이 없다”며 뮤지컬 <캣츠>에 도전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이후 온전한 자신의 노래로 히트를 하지는 못하는 아쉬움은 있다. 또한 가끔은 논란의 대상도 됐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인순이는 대중의 한복판에서, 무대 위에서 노래했다. 그리고, 인정받고 있다.
Who is next
인순이가 특별 출연한 영화 <미녀와 야수>의 주연 류승범과 SBS <화려한 시절>을 함께 찍은 지성의 아버지로 SBS <보스를 지켜라>에 출연 중인 박영규
인순이가 특별 출연한 영화 <미녀와 야수>의 주연 류승범과 SBS <화려한 시절>을 함께 찍은 지성의 아버지로 SBS <보스를 지켜라>에 출연 중인 박영규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