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오려내 스크랩해둔 청춘만화의 한 페이지를 펼쳐보는 것만 같다. 소녀는 동급생 소년과 공유했던 작은 떨림의 순간을 되뇌고, 그 마음을 뒤늦게 고백한다. 비밀스럽게 닫아둔 일기장에도, 친구와 무심코 주고받는 노트 위 낙서에도 소년의 이름만이 가득하다. ‘잊고 싶지 않은 너의 그 느낌 너의 눈빛 / 밤이 되면 꺼내보는 내 맘속 기억들 네 기억들’이라고 속삭이는 걸스데이의 ‘나를 잊지마요’는 수줍은 소녀의 노래다. 무대 위에선 떠올리기만 해도 간질간질해지는 첫사랑의 느낌을 전하는데다, Mnet 에선 몰래카메라에 속아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걸스데이 역시 청춘물 속 여주인공 같을 거란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다만, 멜로를 발판 삼아 성장하는 소녀들이 아닐 뿐이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쉴새없이 재잘대고, 서로를 놀려대다가 스튜디오가 울릴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에 바쁜 네 명의 멤버들은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야심이 아닌 순리를 따르는 소녀들
만화의 첫 장이 등장인물들의 소개로 시작되듯, 각자 다른 캐릭터는 인터뷰 초반부터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귀여움의 최대치를 보여주었던 ‘반짝반짝’ 시절에 대해 묻자 “진짜로요, 제가 모니터를 해봤거든요. 아무리 귀여운 걸 그룹이 나와도 저희만큼 귀여운 팀이 없더라고요”라 말해놓고 민망한지 “우헤헤헤헤헷!”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민아에겐 장난기가 다분하다. 거기에 “당시엔 ‘귀척(귀여운 척)’한다는 말이 상처였거든요. 그런데 왜, 악역 맡으신 분들 기사에 악플이 달리면 연기를 잘했다고 하잖아요. 저희도 그런 것 같아요. 이젠 멘트 할 때도 ‘여러분이 싫어 죽겠을 만큼 귀엽게 할 거예요’ 라고 마음 먹었죠. 하하하” 라고 덧붙이는 소진은 리더답게 제법 당돌하고 야무진 성품을 갖췄다. 이어 “그렇다고 거울 보고 따로 표정 연습을 하진 않았던 것 같고요” 라 답하는 막내 혜리는 “멤버들 중 가장 여성스러운” 외모와 달리 무던한 사내아이 같고, “죄송합니다. 했습니다” 라며 동그란 눈에 힘을 주고 거울 보는 시늉을 하는 유라에겐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엉뚱함이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라면, 원대한 야심보다는 저절로 생겨나는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치른 첫 단독콘서트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단순하게 ‘앗싸, 콘서트 한다!’ 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준비했다는 이야기는 걸스데이를 둘러싼 파릇파릇한 분위기의 근원을 짐작케 한다. 데뷔한 지 2년. 아직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쉬지 않고 에너지를 쓰”며 달려 나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이들은 조바심을 내어 발을 구르지 않는다. “욕심을 낸다고 그걸 당장 다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굉장히 원하면 얻게 될지는 몰라도,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아는 친구들이에요. 가진 만큼 누릴 수 있는 게 있고, 잃는 것 또한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조금씩, 흘러가는 대로 맞춰서 가게 되는 것 같아요.”(소진) 한창 반응이 좋았던 때를 회상하다 “사람들이 ‘너네 잘 되지?’ 그래도 잘 몰랐어요. 아- 그때 인기를 좀 느껴봤어야 하는 건데! 친구도 많이 사귀어놓고 말이죠”(민아)라 눙치며 배시시 웃을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내년엔 더 멋진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몰라보게 훌쩍 자라는 건 청춘물의 주인공들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일. 자는 동안 키는 조금씩 크고, 꿈꾸는 동안 가능성의 크기도 한 뼘씩 커진다. 그 사실을 아는지, 리더 소진은 “내년엔 진짜 멋있는 앨범을 내고 싶어요. 분위기를 확 바꿔 봐도 좋겠고,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더 멋진 걸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내년엔 혜리가 미성년자에서 봉인 해제되기도 하니까 마음껏 멋있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새해맞이 소원을 내놓는다. 그 위론 “1월 1일로 넘어갈 때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요. 뭐, 성인이 돼도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걸요” 라는 혜리의 바람과 “하아, 한창 꿈이 많을 나이에. 난 그 나이 때 진짜 하고 싶은 거 많았는데” 라는 스물한 살 민아의 푸념이 겹쳐진다. 마지막으로 유라가 “우리 바다 펜션 가자는 것도 만날 말만 했지 약속이 안 됐어” 라고 투정을 부리자, 나머지 멤버들은 “내년엔 진짜 가자”고 다짐한다. 다가오는 해에도, 걸스데이가 그려낼 페이지에는 청춘의 흔적들이 가득할 것 같다.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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