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의 엔딩은 무엇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아마 그것도 엔딩이라기보다는 한 순간일 거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거라면 재미있는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현재를, 순간을 산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유아인은 순간을 산다. 그는 자주 웃고, 격앙되어 떨리는 목소리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매 순간 고민하고 질문하고 타인을 질책하기에 앞서 자신을 의심한다. 그러니 이 선명하고 치열한 불꽃이 오랫동안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 ‘가장 보통의 존재’라 말하는 유아인은 결코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배우로서는 물론, 인간으로서도.일을 시작하기 전, 한 10년 전의 나는 어땠던 것 같아요?
유아인 : 지금의 나와 비슷했던 것 같아요. 찌질하고 평범하고 같은 교실 안 4, 50명 안에 잘 묻혀 있는 아이였지만 디테일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과거의 증거를 보면 참, 사람에겐 천성이라는 게 있고 쉽게 안 변하는구나 싶어요. (웃음) 열네 살 때쯤 도덕 시간 수행평가로 썼던 글을 우연히 다시 본 적이 있어요. ‘나는 내 꿈을 이렇게 해서 이룰 것이다’ 라는 내용이 써있는데 그게 “무엇이 되겠다”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게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였어요. 그 때는 오로지 그것만 생각할 수 있을 때였으니까, 학교라는 사회는 세상에 비하면 아주 안정되고 작은 사회였구요. 물론 학교도 그리 맘에 들진 않았지만. (웃음)
“내 마음의 뿌리를 지킬 수 있어서 부끄럽지 않아요”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들었어요?
유아인 : 당연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니까. 나한테 벌어지는 모든 일 중에 내가 선택한 건 하나도 없는데 당연한 것처럼 이뤄지는 거예요. 물론 교육의 의무가 있으니까 엄마가 학교에 보낸 거고 안 보냈다면 그 또한 큰일이었겠지만. (웃음) 그런데 생각하는 것, 사고하는 법을 학교에서 전혀 안 가르치는 거 같아요. 글을 쓸 때도 생각해요. 미니홈피에 쓰는 글은 나 자신만을 위함이 1번이라면 트위터는 소통이 1번인데, 거기서 정답을 찾으라고 쓰는 건 아니거든요. 혹은 정답을 찾고자 하더라도 그걸 너무 쉽게 바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한 글을 보고 단 한 번, 5분의 고민도 없이 “어려워. 뭔지 모르겠어. 쉽게 얘기해 주세요”라고 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보자마자 답이 나와 버리면 그게 재밌을까요? 쉽게 쓰고 쉽게 공유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적어도 저에게 관심을 갖고 굳이 찾아와 주시는 분들이라면 쉽게 정답을 찾고 단정 짓기보다는 나를 통해 본인의 정답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나 자기가 1번이니까.
그럼 어쨌든, 열네 살 때 꿈꿨던 미래의 내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진 않은 것 같아요?
유아인 : 하하, 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상관없지만 그 때 가졌던 내 마음 밑바닥의 뭔가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거니까 아주 만족스러워요. 만족스럽다는 건, 더 좋은 걸 갖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1층에 있는 뿌리를 지킬 수 있어서 부끄럽지 않다는 뜻이에요. 만약 십년 후 내가 수십억을 벌고 온 아시아로 팔려나가는 배우가 되어 있더라도 내 1층이 텅 비어 있으면 부끄러울 거예요. 물론 이런 말 하면 또 그래요. “야, 일단 수십억 벌고 나서 얘기해. 1층은 무슨!” (웃음)
그렇다면 10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이면 좋겠다고, 막연히라도 떠올리는 게 있어요?
유아인 : 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존재한다면……그 때 내가 스물다섯의 나를 돌아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존재만 되어 있다면 진짜 멋있는 인간일 것 같아요. 지금 내가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서른다섯의 어른, 내가 지나간 길이 나와 비슷한 아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내 공간이 있는 게 중요하거든요” 예전에 소통 없는 인터뷰나 방송 출연처럼 원치 않는 걸 억지로 하게 되면 병드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누구나 살면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지만 그런 문제와 부딪혔을 때 유독 민감하게 상처입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면역이 생겼나요, 여전한가요?
유아인 : 여전히 힘들어요. 그런데 예전에는 발언에 조금의 힘도 없는 애가 “어디 건방지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라는 논리에 반항했던 거라면 지금은 같은 상황에서도 “좀 떴다 이거지?”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마치 ‘초심’을 잃은 것처럼. 난 예전부터 그랬는데. (웃음) 그런 점에서 매니지먼트와 가장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지금 회사는 감사하게도 저를 많이 인정해주고 계시고, 저 역시 서로 동등하게 일해 나가고 싶어 하는 타협점을 많이 찾은 것 같아요. 사실 그것도 ‘떠야’ 되는 일인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떴다는 게 아니라 이번 한 작품을 하면서 회사에서 저를 이해해주는 폭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넓어진 것 같아서. (웃음)
그런 면에서 이 유아인이라는 배우에게 남긴 것 중 하나는 현실로부터의 보다 많은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아인 : 네, 저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거예요. 스물한 살 때쯤 제가 제일 많이 얘기했던 단어는 청춘보다도 자유였어요. 스무 살 전까지, 서울에 올라와서 일하고 생활했던 3년 동안 자유에 대한 결핍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정말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사회인이 된 사람들의 자유란 자기 안의 것들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전까지 내가 열 개 중 다섯 개만 통제할 수 있었다면 이젠 여섯 개를 통제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건 나에게 중요한 것 하나를 더 통제할 수 있는 자유죠.
내가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자유, 그 시간과 공간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떤 곳이에요?
유아인 : 집 자체는 평범해요. 사실 어떤 집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공간이 있는 게 중요하거든요. 같은 공간은 지겨워서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요. 정말 귀찮죠. (웃음) 예전과 달라진 건, 요즘에는 친구들도 자주 왔다 갔다 하고 며칠씩 눌러있기도 해요. 꼭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혼자 있어야만 내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함께 있어도 내 걸 할 수 있게 된 거죠. 적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편안해진 것 같아요.
어릴 때 아버지가 엄하셔서 갈등이 있었고 연기하는 데도 반대가 있으셨다는 얘길 한 적이 있어요. 혹시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이해의 폭이 조금 넓어지기도 했나요?
유아인 : 대개의 경우 아들에게 아빠는 너무 불편한 존재잖아요. 심지어 경상도의, “밥 뭇나, 자자” 하는 가정의, (웃음) 존댓말을 쓰는 관계에서는 어려워요. 하지만 서로 더 많이 보여주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긴 했어요. 저도 남들 다 겪는 가정불화를 겪었던 애인데, 이제 아버지를 더 많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격한 애정 표현은… 미쳐버릴 것 같아요” 미니홈피에 쓴 글 가운데 동네 편의점 아주머니의 친절과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가게가 문 닫던 날에야 후회했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호의나 유명인에 대한 찬사를 여전히 어색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아인 : 네, 미쳐버릴 것 같아요. (웃음) 요즘 드라마를 많이 보셔서 더 그렇게 됐는데, 못 견디겠는 거예요! 물론 배우로서 연예인으로서 기분 좋고 우쭐해하는 부분도 있어요. 식당 아줌마들이 오셔서 “사인해 주세요. 딸이 좋아해요” 하시면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 근데, 그 이상은 불편해요. 어후, “아인 씨, 너무 멋있어요”라는 말도 안 하면 좋겠고 “잘 봤어요” 정도면 좋겠어요. 막, “여자들이 모이면 니 얘기만 해” 이런 얘기 들으면 죽겠는 거예요! 뭐라 대답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감사합니다” 하기도 그렇고, 혹은 더 뻔뻔하게 “멋있었죠?” 해야 되나? 으으, 아무튼 격한 표현은 감당이 잘 안 돼요. 저는 배우로서 뿐 아니라 그냥 사랑에도, 내 연인에게도 그런 점에서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는 애라서 좀 불편함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그런 불편함이 좀 더 늘어날 수도 있어요.
유아인 :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은 게 아니라, 존중 안 해도 난 사생활을 지켜 나가는 애니까. 내 사생활인데 남이 존중하든 말든… (웃음) 사실 전 밖에 되게 쉽게 나다니는 애고, 모자 안 쓰고 명동 다니고 그런 앤데 이제는 그런 게 더 큰 불편함을 야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좀 편하면 좋겠는데. 하지만 사실은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고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에서 종대가 기수(김병석)에게 “형이 생각하는 제일 먼 미래는 언제냐”고 묻잖아요. 아인 씨가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먼 미래는 언제인가요.
유아인 : 형이 말한 것처럼, 정말 내일인 것 같아요. 나는 언제라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매일매일 그런 생각에 휩싸여 살았던 적이 있어요. ‘죽고 싶어’가 아니고, 그냥 이렇게 잠이 들면서 내일 눈 뜨지 않아도 돼. 내일 일어나서 이 세상을 다시 보지 않아도 크게 나쁘거나 슬플 것 같지 않다고 살았던 시간이 있어요. 절망의 시기였죠. 그 시간을 무사히,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웃음) 무사히 보내고 눈을 떠서 오늘도 또 세상에 있지만 내일 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이 시간이 더 소중하고 10년 뒤에 뭘 하겠다는 것보다 내가 지금 이걸 하고 있다는 게 더 소중한 거예요. 그 시간을, 그 시절을 보내고 나서야… 그걸 알게 됐어요.
스타일리스트. 지상은/ 고양이 모델. 둥둥이
글. 최지은 five@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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