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네 명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있다. 준문은 영화감독이고, 병권은 청년한의사회에서 일한다. 영수는 충정로에서 파스타 집을 운영하고, 욜은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이들은 모두 게이다. 이 한 가지의 사실로 인해 그들은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사람일 수 없다. 장편영화를 준비 중인 준문은 이성애자 스태프들 속에서 움츠려든다. 현장에서 터지는 사건 사고도 모두 자기 탓처럼 느껴지고, 누군가 ‘감독님’ 하고 불러도 ‘게이야’라고 부르는 것만 같다. 퇴근 후 동성애자인권연대로 출근하는 병권은 “세상에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넘보지 말아야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안다. 동료들에게 애인을 소개시켜주고 축복받는, 어쩌면 가장 당연하고 평범한 일들 말이다. 시골에서 자란 영수는 종로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인생의 진짜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다.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친구들을 만나고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게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욜에게는 1000일 동안 사랑을 나누어 온 애인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HIV/AIDS 감염인인 애인과 하루아침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위험을 안은 채 쌓아온 기적 같은 천일이다.
4명의 게이, 그들의 ‘섹스 앤 더 시티’ 당신에게 종로는 어떤 공간인가? 비둘기와 노인들로 가득한 지루한 동네, 이십대의 토악질을 쏟아내던 질펀한 아스팔트, 혹은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졸린 눈으로 찾던 새벽의 영어학원일지도 모르겠다. 1가부터 6가까지 뻗어있는 서울의 중심가, 한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가 흩어졌다 해서 운종가(雲從街)가 불렸던 이 동네에는 어느 날부터 ‘이반`(異般)’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조용히 몰려들었다. 그리고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한 밤의 종로 3가는 이제 이태원과 동시에 대표적인 게이커뮤니티이자 그들만의 은밀한 ‘로맨스타운’으로 자리 잡았다. 오는 6월 2일, 세상을 향해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종로의 기적>은 그렇게 종로라는 공간이 잉태한 특별한 게이들 혹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젊은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작은 밤의 해방구에서 피어난 눈물 나게 행복하고 지독하게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이기도 하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2003년부터 진행해오던 커밍아웃 인터뷰 프로젝트를
이혁상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발전시킨 <종로의 기적>은 “사느냐 아니면 이렇게 죽느냐에 대한 문제”를 안고 사는 대한민국 동성애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서를 케이스별로 펼쳐 놓는다. 물론 이성애만이 ‘일반’이자 ‘정상’으로 인정받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극영화도 아니고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를 들쳐 업은 <종로의 기적>은 기획의도부터 짐짓 비장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구호를 외치고, 일상을 양보해 단체 활동을 하고, 공연비도 못 벌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은 혁명가의 피가 끓어올라서가 아니다. 타고난 정체성이 꿈꾸는 일의 열정을 의심받는 요소가 될 때, 달콤해야 할 연애가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한 결심이 될 수밖에 없을 때, 한 인간이 선택 할 수 있는 가장 당연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일 뿐이다. 애인이 HIV감염인 이라는 것을 알고도 어떻게 사귈 결심을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욜의 대답처럼 말이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스타일인데 안 사귀면 어떻게 할 거야? 어디서 그런 애를 만나겠어. 그렇게 키 작고, 수다스럽고, 뚱뚱한 애를!”
<종로의 기적>은 삶에 대한 영화이자 죽음에 대한 영화다. 연대의 영화이자, 연애의 영화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죽을 결심을 해야 하는, 연애를 하기 위해 연대해야 하는 사람들의 즐겁고 처절한 생존수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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