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환 감독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
곽정환 감독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
만약 한국 사극에서 BC/AC를 나눈다면, 그 기준은 KBS 가 되지 않을까. 어떤 단어 하나로 정의 내리기 쉽지 않은 이 사극은 스타일리시한 영상 속에 사회 변혁에 대한 고민을 집어넣었고, 퓨전사극과 같은 현대적인 분위기 속에 그 시절 민초들의 삶을 철저하게 고증해 내는 독특한 지점에 도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는 이 모든 것들을 대중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가 만들어낸 가장 큰 사건은 이 본 적 없는 사극이 30% 내외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KBS 과 로 한국 사극에 잊히지 않을 무엇을 남겨 놓은 곽정환 감독에게 가 바꾼 시대에 대해 들어봤다.

가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어떤 기분인가.
곽정환 : 막 끝났을 때는 마냥 서로 기뻐하고 축하했는데, 갈수록 멍하다. 내가 뭘 했나, 도대체 내가 어떤 작업을 한 걸까 싶고.

왜 그런가.
곽정환 : 촬영하는 동안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막 달렸는데, 지금은 내가 제대로 드라마를 연출한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솔직히, 대중성이라는 게 과연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는 무엇을 깨닫느냐보다 자각의 과정을 그렸다”
어떤 대중성을 말하는 건가.
곽정환 : 시청률은 높았다. 대중성을 위한 전략들도 성공했다. 액션, 코믹, 남자 배우들의 비주얼 같은 것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에 재미와 의미가 있다면, 재미를 받아들인 분들과 의미 있게 받아들인 분들이 다른 층위에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을 끝나고 나서는 보다 대중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에서 더 많은 대중과 소통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대중과 무엇을 소통했느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당신이 전달하고 싶은 게 무엇이었나.
곽정환 : 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건 명쾌하다.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가 과연 이 역사를 조금이라도 다시 새로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결론으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였는데, 의 모든 캐릭터들은 그 과정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깨달아 간다. 예를 들면 대길이(장혁)가 언년이(이다해)를 만나는 과정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알아나가는 거다.

그래서 마지막 회의 결론으로 자각을 제시한 게 인상적이었다. 업복이(공형진)를 통해서 혁명의 한 순간만 그리는 게 아니라 업복이가 다른 노비들에게 자각을 주며 끝났다.
곽정환 : 내가 에서 보다 진일보한 이야기를 담았다면, 그건 희망에서 끝나지 않고 희망을 실현시키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무엇을 가졌기 때문일 것 같다. 그걸 한 단어로 의지라고 하고 싶었고, 그 의지는 자신이 역사의 주인으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치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는 계속 그런 의지를 어떻게 갖고, 무엇을 하느냐를 질문했던 것 같다.
곽정환 :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가졌던 건 아니다. 는 무엇을 깨닫느냐보다 자각의 과정을 그렸다. 자각 시점은 엔딩으로 맞춰져 있었고, 자각 전까지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괴롭히고, 이용한다. 대길과 태하(오지호), 철웅(이종혁)이 서로를 괴롭히는 사이에 저자거리에서는 천지호(성동일)가, 또는 오포교(이한위)가 사람을 괴롭힌다.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상인들은 술에 물을 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진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일상성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각을 하는 순간 시대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거다. 그런 의지를 갖는 과정까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가 가장 어려웠다.

그런 고민은 철학적인 부분이다. 반대로 는 몸이 강렬하게 부딪치는 부분에서 대중성을 얻었다. 그 조율이 어렵지 않았나.
곽정환 : 각자의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고뇌 끝에 자각을 하는 건 드라마 시작부터 천성일 작가와 잡아놓은 거라 다른 논의가 필요 없었다. 그런데 천성일 작가가 12부에서 16부 정도로 생각한 이야기를 24부로 늘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회당 스토리를 짜는데 거기에 넣어야할 내용들에 공백이 생기면서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다.

“만들다 보니 보고 자란 한국 남자들은 어쩔 수 없더라”
곽정환 감독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
곽정환 감독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
중반까지는 대길의 추격전과 저자거리의 이야기가 맞물렸는데 어느 순간부터 추격전이 많아지고 다른 이야기가 풍부하게 전개되지 못했던 것 같다.
곽정환 : 엔딩에서 모든 사람들의 자각이 총체적으로 이뤄져야 하니까 어느 한 그룹만 먼저 자각시킬 수도 없고, 자각의 순간을 늘일 수도 없었다. 내 잘못이긴 한데, 을 하면서 사극의 제작비 문제를 여실히 깨달았다. 사극은 규모의 경제라 횟수가 늘어날수록 평균 제작비가 떨어지면서 회당 제작비 규모를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는데, 이런 부분에서 작품성을 훼손하지 않았나싶다. 대중성을 선택하면서 작품성을 훼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방송분량이 늘어나면서 대길이와 태하, 언년의 관계가 진전되지 못하고 멈춘 채로 늘어진 것 같았다.
곽정환 : 태하와 언년이의 이야기는 대중성의 측면에서 깊게 들어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 부분이 있다. 그 상태에서 몇 회가 진행되면서 이야기가 느슨해졌는데, 그건 내 실수다. 그리고 대길이는 저자거리의 다른 사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것과 언년이에게 집중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래서 장혁과 토론을 했는데, 좀 더 장혁이 원하는 감정선에 맞춰서 언년이에게 집중했다. 말 그대로 이대길은 장혁이었고, 장혁이 대길에 대해 훨씬 더 깊이 알고 사고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머리로 생각한 대길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잡고 유지해온 연기자가 선택한 대길이가 옳다고 판단했다.

그런 점에서 를 하면서 큰 덩치의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것에 대해 많이 배웠을 것 같다.
곽정환 : 은 내가 마지막 신까지 인물들이 전체의 그림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확하게 잡고 갔다. 그런데 는 천성일 작가의 대본에 인물들의 갈 길이 결정 돼 있었고, 나는 천성일 작가와 가야할 방향에 합의한 뒤에는 그것을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천성일 작가가 대사를 통해 무엇을 전달한다면 각각의 장면에서 감정의 균형을 맞추는 건 내가 했다. 천성일 작가의 대본은 한 부분의 대사를 수정하면 그 후의 장면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수정하기도 조심스러웠고. 급하게 찍은 뒤에 다 보고나서야 신의 의미가 전달된 것도 있었다. 그런 점은 대본을 완전히 이해하고 찍은 과의 차이다. 후반에는 편집도 내가 다 못해서 조감독과 상의해서 조감독이 담당한 부분도 있다. 촬영의 상당 부분은 함께 연출한 기민수 감독이 참여하기도 했고. 철웅과 왕손이의 대결이나 업복이의 신 중 상당부분을 기민수 감독이 찍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렇게 각자가 역량을 발휘한 의 모든 스타일은 남성적인 비장미로 집약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곽정환 : 의도적으로 남성 영화의 느낌을 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최대한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마초적인 것과 거리가 먼데, 만들다 보니까 보고 자란 한국 남자들은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웃음) 대본에서 표현한 지문들이 어느 부분은 무협소설의 느낌도 나는데, 이런 맛을 살리려다보면 나도 모르게 남성적인 느낌이 났다.

왠지 마니악한 남성들이 만드는 드라마 같기도 했다. 대길이 패거리가 먹는 밥의 양까지 그 시절 사람들이 밥을 먹는 양을 계산한 것 같더라.
곽정환 : 사진 보면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마니아적이기보다는 제작진이 작품을 만드는 태도가 달랐던 것 같다. 모두 관습적인 촬영 관행은 굉장히 싫어했다. 예를 들어 촬영 감독은 다른 드라마에서 했던 식의 액션 신은 찍지 말자고 하고, 의상 팀에서는 촬영할 때마다 의상에 다시 때 칠을 하면서 사람들한테 이렇게 준비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예전에 했던 버릇을 버리고 우리 팀만의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엔딩에서 제시된 여성성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
곽정환 감독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
곽정환 감독 “역사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
만들고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른 세대라고 할 수도 있을까.
곽정환 : 내가 고증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이런 질문을 받게 되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어디든 접속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터넷에서 밀리터리 사이트를 가보니까 조선시대 좌포도청의 몇 년도에 무기고 재고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걸 보면 당시에는 삼지창이 거의 없다고 나온다. 그래서 그걸 다시 확인해봐서 사실이니까 당연히 그걸 드라마에 반영한다. 그리고 사극에서 며느리가 불씨를 꺼뜨리면 쫓겨난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는 사극에서 그 불씨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방마다 화로를 놔뒀고.

그 점에서 권력이 저자거리로 나간 것 같다. (웃음) 시작 직후 마니아적인 취미를 가진 남성들의 커뮤니티에서 반응이 빠르게 오고, 그게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걸 보면 만드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세대가 변한 것 같다.
곽정환 : 그렇다.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아도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되는 거니까. 당장 우리 팀의 막내 조연출만 해도 밀리터리 마니아라 조선시대에 총을 속사로 쏘려면 (빠르게 쏘려면) 꼬질대를 쓸 수 없다고 얘기 하더라. 그걸 쓰고 나면 총을 쏘고 나서 어디에 둘지도 난감하지 않나. 그러면서 사실은 탄환을 재고 개머리판을 쳤다고 얘기해준다. 이런 걸 고민하고 연구한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 를 만든 것 같다.

그런데 비장미 넘치던 남성 영웅 태하가 필부가 되고, 평범한 노비 업복이는 영웅이 돼서 죽는다. 남성적인 영웅의 시대가 끝나는 기분이랄까.
곽정환 : 천성일 작가와 기본적으로 대길이와 업복이의 죽음 이후 설화(김하은)가 남은 시대를 살고, 은실이(주다영)와 초복이(민지아)의 엔딩으로 가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에서도 결국 기생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의 여성성이야말로 대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 그 시대의 개혁과 변혁이라는 특유의 한국적인 상황을 다뤘고, 는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뤘다고 본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지배자와 피 지배자의 구도는 어느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니까. 약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항상 현실은 그렇게 거대하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것 아닐까.

그 점에서 는 드라마 내외적으로 변화를 시도했고, 어느 정도 대중을 바꿨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 업복이가 그런 것처럼, 의 스타일과 메시지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예전보다 많을 테니까. 그리고 몇 년 뒤에는 더 많아질 거고.
곽정환 : 그렇다. 를 본 시청자의 반응이 드라마를 만들 때 다시 영향을 줄 테니까 그렇게 될 것 같다.

시즌 2는 정말 나올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의 화질에 반한 마니악한 남자들이 블루레이 출시에 대해 궁금해 하더라. (웃음)
곽정환 : 우선 블루레이 출시는 불가능 하다고 하더라. 수요가 워낙 없어서 해외에서 블루레이를 원하게 되면 그 때나 가능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시즌 2는 회사에서 이야기가 나온 건데, 천성일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많은 부분이 결정될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단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에 대해 생각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