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담이 나타났다. 훗날 역사가 MBC <선덕여왕>에 대해 기록한다면, 이 한 줄은 아마도 가장 의미심장한 문구로 남을 것이다. 미실(고현정)의 버려진 아들, 국선 문노(정호빈)가 길러낸 제자, 덕만(이요원)의 친구에서 적이 되고 훗날 ‘비담의 난’을 일으키는 인물이라는 복잡한 설정의 무게를 더하지 않더라도, 비담은 사극에서 보기 드문 강렬한 캐릭터다. 그는 명분과 실리, 선과 악으로 나눠지기 쉬운 대하 사극의 구도에서 그저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움직인다. 허허실실 어슬렁거리다가도 닭고기 하나 때문에 야차처럼 돌변해 피를 뒤집어 쓴 채 씨익 웃고, 모두 ‘신국의 앞날’을 걱정할 때도 “신라? 나 그딴 거 상관 안 하는데?”라며 한 발 비껴 선다. 유신(엄태웅)이나 알천(이승효)같은 화랑들이 화랑의 법도를 목숨처럼 여긴다면, 그는 오직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짓말과 살인마저 태연하게 행한다. 모두가 도덕과 윤리, 혹은 각자 속한 조직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덕여왕>에서, 속세의 모든 룰 바깥에 있는 비담은 덕만과 미실 양쪽을 휘저으며 긴장감을 일으킬 미지수다.

김남길을 알린 비담, 비담을 만든 김남길

그리고, 비담과 함께 김남길이 ‘돌아왔다’. 김남길이 한 달 사이 TV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가 된 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비밀병기’ 비담의 인기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비담은 ‘돌아온’ 김남길에 의해 완성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제작진은 영화 <미인도>에서 신윤복의 연인 강무를 연기한 그에게서 비담의 모습을 발견했고, 김남길은 만화 <슬램덩크>와 <배가본드>, <열혈강호> 등을 참고해 천진난만함과 잔혹함, 경박함과 명민한 두뇌를 가진 비담을 탄생시켰다.

특히 출생의 비밀과 태생적 콤플렉스에 휩싸이며 점차 어두워지는 비담의 내면이 김남길이 가진 고유의 아우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나타난’ 것이 아닌 ‘돌아온’ 배우이기에 가능하다. 김남길이 이한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줬다. 그는 SBS <연인>에서 좀처럼 말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보스의 부하 태산이었고, 영화 <강철중>에서는 머릿속에서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지 모를 조직폭력배 문수였다. 특히 영화 <후회하지 않아>에서 약혼녀가 있는 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재민과 KBS <굿바이 솔로>에서 평생 동안 무거운 비밀에 짓눌려 사는 지안은 그가 비담이라는 캐릭터에 어떤 색깔을 덧 입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 비담은 온갖 무협 영화의 멋진 남성 주인공들의 특징을 모아 놓은 것처럼 생각될 만큼 멋있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지나온 10년, 그리고 스타가 된 이후

김남길은 여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깊은 내면을 비담의 캐릭터에 끌고 들어왔다. 비담이 점차 자신의 출생에 관해 알아가면서 ‘다크 비담’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캐릭터의 전형적인 선악 변화로만 그려지지 않는 것은 김남길이 캐릭터 내면의 고민을 보다 깊게 표현할 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남길은 미실과 비담이 재회하는 순간, 가면에 가려진 얼굴 때문에 미묘한 음성 톤의 변화와 눈빛만으로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표현해 낼 수 있는 진지한 감정 연기와 다른 주인공들이 대업을 이야기할 때 장풍으로 촛불을 끄려 애쓰는 코믹한 애드리브가 모두 가능한 배우다. <선덕여왕>이 기존의 영웅 사극, 혹은 주인공들이 숙제 풀듯 과제를 해결하는 미션사극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순간, 김남길처럼 보다 어둡고 복잡한 표정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들이 사극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자칫하면 만화적인 안티 히어로로만 남을 수 있었던 비담은 “장난 좋아하고 사람들과 잘 놀고 호기심 많은 점이 비담과 비슷한” 김남길을 통해 ‘인간’으로 다가온다. 그건 김남길이 비담처럼 우리 앞에 돌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친구 집을 전전했던 십대 시절을 지나, 대중과는 다소 떨어진 위치에서 충실하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법을 익히던 때를 지나, 그는 오랫동안 준비한 ‘김남길’의 모습을 비담을 통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동안 단 한 번도 쉬운 길을 가지 않았고 세련된 예명 ‘이한’으로 얻었던 인지도마저 버린 채 김남길로 돌아온 그에게서는 비담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재기와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겠다는 뚝심이 함께 느껴진다. 스타의 메커니즘 밖에서 성장했지만, 데뷔 10년을 넘겨 드디어 스타의 길에 선 김남길. 이제 그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할까. 짐작컨대 앞으로 김남길의 선택은 변해 갈 비담의 모습만큼이나 흥미로울 것이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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