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말해서, ‘선덕여왕 파’가 ‘미실 파’를 때려 부수는 이야기예요.” 5월 25일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MBC 창사 48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선덕여왕>의 박상연 작가는 장장 50부작으로 펼쳐질 이 복잡하고 기나긴 드라마를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신라 천 년의 심장부이자 삼한일통의 허리를 강화했던 시대, 진흥왕에서 시작해 27대 선덕여왕이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기까지. 이 다단한 역사 속으로 돋보기를 들이대는 <선덕여왕>은 이제 막 천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작가전문집단 ‘케이피앤쇼(KP&SHOW)’의 일원이자 MBC <히트>, KBS <최강칠우>에 이어 <선덕여왕>을 함께 집필하고 있는 김영현, 박상연 작가를 옛 신라의 땅, 고도 경주에서 만나 <선덕여왕>의 그 흥미진진한 서문을 전해 들었다.

공개된 영상만 보아도 밀도가 꽤나 높고, 전투 신에 중국 사막 로케이션까지 드라마 초반의 스펙터클이 굉장하더라. 짧지 않은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느낌이 어떤가?
박상연:
촬영은 4부까지 마친 것 같고, 대본은 10부쯤 나왔다. 50부작이니까 11월쯤 끝난다. 거의 군대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웃음) 그 사이 아무 일도 못할 테니까.

“이요원은 의외로 씩씩하고 껄렁한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나 정사 속 선덕여왕의 업적보다는 김대문의 <화랑세기> 같은 책에 더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것 같다.
김영현:
<삼국유사>, <삼국사기>도 참고했고, 이종욱 교수님이 풀어 쓴 <화랑세기>도 봤다. 그 외에 신라 사학회에서 나온 책들도 모두 소스로 삼았다. 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화랑의 구체적인 삶이 없다. 그 부분의 묘사를 두고 <화랑세기>를 빌려 상상한 건 맞지만 <화랑세기>를 원전으로 만든 드라마라고는 볼 수는 없다.
박상연: 특히 이 드라마에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미실(고현정)은 정사에 기록이 아예 없다. 그게 <화랑세기>에 가장 많이 빚진 부분일 것이다.

미실은 타고나고 훈련된 ‘색공’을 여러모로 잘 활용한 여자였다. 그래서 교태롭고 섹시한 캐릭터로 등장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 했는데 고현정이 그리는 미실은 그보다 강인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더라. 이건 작가들이 처음부터 생각한 미실의 모습인가. 아니면 고현정이라는 배우를 만나서 만들어진 새로운 그림인가.
김영현:
캐스팅되기 전에 대본이 나왔으니까 1, 2부의 미실을 고현정 씨를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다. 진흥왕 말기부터 시작되지만, 실질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진지왕 폐위부터니까 미실이 색으로 남자를 홀릴 시기는 이미 지났다. 그래서 ‘색기’보다는 권력의 정점에 있는 여자로서의 ‘강인함’이 더 많이 부각된 것 같다. 이토록 강한 미실을 쓰러트리는 것, 그것이 <선덕여왕>의 중심 줄기가 될 꺼다.

이요원이 연기하는 선덕여왕이 과연 상대편에 있는 고현정의 강력한 포스를 이겨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미실은 캐릭터만으로도 워낙 센데다가 기존 이요원의 이미지는 그다지 강인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박상연:
나 역시 이요원 씨를 여성스럽고 차분한 이미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의 느낀 이 배우는 의외로 씩씩하고, 심지어 껄렁껄렁한 면도 있더라. (웃음) 대중적인 이미지와 실재 이미지가 다른 배우들은 오히려 작가에게 많은 상상력을 준다. 캐스팅 결정 전에도 대본을 좀 써놓긴 했는데 이요원으로 결정되고 나서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있어 서로 도움 받은 면이 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텐데 여하튼, 까마귀가 갑자기 나타나는 신이 있는데, 그 장면을 상상할 땐 이요원 말곤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김영현: 박 작가는 완전히 주인공에게 빠져있는 상태다. (웃음) 결국 여배우의 힘으로 끌고 가야 하는 드라마인데 이요원 씨가 그런 힘이 있을까 걱정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걱정이 없다. <선덕여왕>을 통해 이요원은 시청자들이 알고 있는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배반할 거다.

“미실은 왕의 애첩이지만 꽃 같은 여자는 아니다”

보통 ‘여인천하’형 사극의 경우 여자들이 패를 가르고 반목하는 내용이 전형적이었다. 그러나 이 두 여자, 미실과 덕만(이후 선덕여왕)의 관계는 조금 다른 길을 찾은 것 같다.
박상연:
미실은 초반에 덕만으로부터 많은 것을 빼앗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덕만은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미실을 원한다. 미실을 제외한 미실의 모든 것을 원하는 거다. 내가 갖고 싶은 걸 쟤가 다 가지고 있으니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천하는 여전히 미실의 뒤에 있다. 미실을 넘지 않고선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거다. 덕만은 어느 순간부터는 미실을 닮아간다. 사람들은 점점 ‘너 많이 변했어’라고 얘기할 거다. 언뜻 닮아 보이지만, 그러나 두 여자가 꿈꾼 마지막 지점은 달랐다. 그 천재적인 지략과 힘과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도 미실이 원한 건 고작 황후의 자리였다. 하지만 덕만은 왕을 꿈꾼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해낸다. 그것이 미실이 끝내 덕만을 이기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덕만과 천명(박예진)이 쌍둥이라는 설정이 의외였다.
박상연:
엇갈리는 사료가 만들어낸 의외의 산물이다. <삼국유사>에는 천명이 언니로 되어있고, <삼국사기>에는 덕만이 언니다. 그런 기록을 보면서 왜 이렇게 됐지? 혹시 이 둘은 쌍둥이 아니었을까 한 거다. 쌍둥이라는 건 작가 입장에서는 명확하게 ‘라인’이 나오는 설정이다. 또한 쌍둥이가 같이 자라면 재미가 없고 왠지 따로 자라야 할 것 같고. (웃음) 그런 설정이 이후 많은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좋은 단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렇게 가도 될까, 고민을 했는데, 김영현 작가님이 ‘가자!’ 고 하셔서. 나는 그저 따랐을 뿐이다 (웃음).
김영현: 이거 참. 아니다. 박상연 작가가 우겼던 거다. (웃음)
박상연: 나는 단지 ‘쌍둥이 설정으로 가면 <선덕여왕> 같이 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웃음)

쉽게 말하면 남자 다루는 솜씨가 능한 여자, 정도로 알고 있던 젊은 미실과 시청자들의 첫 대면은 꽃처럼 예쁜 후궁으로서가 아니라, 투구를 벗고 드러나는 땀이 맺힌 거친 얼굴이다. 이 짧은 장면만으로도 진흥왕과 미실의 관계를 보는 색다른 접근이 느껴졌다.
김영현:
사료들을 봤을 때도 미실은 전혀 꽃 같은 여자는 아니었다. 물론 그 출중한 미모와 색에 진흥왕이 특별히 그녀를 총애했지만 당시 화랑이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던 시점인데, 아무리 애첩이라 해도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로 넘어간 시점에 다시 원화(화랑의 전신)를 부활시켜 미실에게 권력을 안긴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자기 옆에 두고 보는 꽃이 아니라 정치적 후원자로 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후 덕만에게 미실은 거대한 장애물, 도달해야 될 지점, 넘어야 될 산 같은 존재다. 결국 미실은 그 등장부터 굉장히 견고한 이미지로 구축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마침내 덕만이 미실을 이겼을 때 ‘아이고, 너 그 정도면 왕 해도 되겠다’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

“화랑도를 둘러싼 이야기는 거의 다 작가들의 상상”

쌍둥이라는 설정처럼, 고증보다는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부분도 많을 것 같다.
박상연:
사료를 보면 화랑들이 얼굴에 분칠했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상상을 해봤다. 남자들이 왜 화장을 왜 했을까, 혹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나설 때 결의를 다지기 위해 했던 건 아닐까.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쟁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화랑들도 화장을 했다면 아마 죽음을 각오하는 일을 앞두고가 아닐까. 결국 화랑들이 단장을 한다는 말인 ‘낭장(郎粧)’을 만들었고, 죽음을 각오하고 행하는 그 의식을 ‘낭장결의’라고 이름 붙였다. 역사적 사실은 없는 만들어진 이야기다.
김영현: <화랑세기>에 화랑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임무가 있었는지, 어떻게 생활 했는지에 알 수는 없다. 화랑도를 둘러싼 이야기는 거의 다 우리 상상으로 묘사한 거라고 보면 된다. 평소에는 그냥 압구정동 날라리들 같다가, 전투에 나가면 치열하게 싸우고 결국 그 전투에서 살아온 놈들만 남겨서 키워진 집단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 신라의 모든 정치를 좌지우지하게 될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박상연: 꽃 ‘화(花)’에 사내 ‘랑(郞)’, 말 그대로 ‘꽃남’의 원조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냥 예쁜 아이들이 아니라 사실 정말로 무서운 애들이었을 것이다. 관창과 반굴의 에피소드만 봐도 사실 ‘잔혹극’이다. 그런 예쁜 애들이 항상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설정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드라마 안에서 잘 살려보려고 한다.

아무래도 강한 여자들이 중심인 드라마니 그 와중에도 꽃미남을 원하는 여성 시청자들을 위한 민원해결의 장이 되겠다. (웃음)
박상연:
나 말고 같이 일하는 이 세 분들(김영현, 김지운, 김진희 작가)이 너무 원하고 있다. 항상 캐스팅을 점검하고. (웃음)
김영현: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미실만 보아도 7대 풍월주 설화랑(전노민)을 애인으로 삼고, 남편인 세종(독고영재)도 풍월주가 되었다. 결국 미실의 권력확장에 화랑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거라는 상상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극에서 화랑의 중요도를 높이게 된 거다.

이후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 어린 시절 타국에서 자라고, 거의 남장여자처럼 화랑 안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김유신과 묘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김영현: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결혼 하게 된 과정에서 묘하게 선덕여왕이 끼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김유신-김춘추-선덕여왕 셋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한 게 아닐까 상상하게 되는 고리들이 있었다.

“역사상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실은 굉장한 캐릭터다”

이처럼 창의적인 설정이나 해석도 많지만 기존 한국 사극의 전형화된 패턴도 눈에 띈다. 강보에 싸여 버려진 아이가 결국 자신을 버린 땅으로 귀환하여 왕이 되는 식의 구도도 그렇고.
박상연: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글로벌한 영웅설화가 원형일 것이다. 특히 쌍둥이란 설정을 했을 때 이미 그런 행로는 정해졌던 것 같다. 하나는 어딘가에서 자라다 돌아올 거란 생각. 1, 2부는 <맥베스> 느낌을 많이 썼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불길한 예언이 진짜 벌어지는 상황, 버려진 아이가 왕이 될 운명을 안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오히려 익숙한 설정이라 장점이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변주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김영현: SBS <서동요>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웃음) 앞부분을 굉장히 쉽게 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썼던 게 사실이다. 결국 익숙한 코드를 가져가되 어떻게 새롭게 풀고 다른 의미로 가져가느냐를 고민했다. 쌍둥이인 천명과 덕만을 서로 질투하거나 대립하는 상대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쌍둥이 둘이 연대를 해야만 미실을 이길 수 있다는 식의 코드로 잡았다. 실제로 천명(박예진)은 아들(김춘추, 유승호)을 왕으로 만들었지만 본인은 왕좌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고, 덕만은 결혼을 했지만 사실 아기를 낳지 않았고 결혼했다고 볼 수도 없는 사람이다. 현대적으로 봤을 때 덕만은 일에 더 몰두한 여성의 상징이고, 천명은 사랑이나 가족을 택한 여성의 상징으로 보았다.

결국 드라마는 어떤 이를 주인공으로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탐을 냈을 만큼 ‘미실’은 정말로 드라마틱한 캐릭터인데 왜 ‘미실’이 아니라 ‘선덕여왕’을 선택했을까.
박상연:
미실의 다양한 매력은 공중파에서는 활용이 불가능 할 거다. (웃음)
김영현: 역사상 이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미실은 굉장한 캐릭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미실은 실패한 인물이다. 50부작을 이끌고 가는 공중파의 드라마 주인공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봤다. 사료를 보면 지증왕 때 ‘삼한일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 얘기는 국가적인 아젠다를 지증왕이 제시 한 이후 법흥, 진흥, 진지, 진평, 선덕, 진덕, 무열왕으로 넘어가면서 이 국가 프로젝트를 신라는 정말 꾸준히 추진했다. 진흥이 영토를 넓혔다면 선덕은 인재들을 꾸렸다. 결국 선덕이 만들어놓은 인물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이끈다. 그런 면에서 선덕이란 인물의 위대함에 확신이 섰고, 이 작품을 해도 내가 민망하거나 쪽 팔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덕이 어떻게 사람들을 얻어가고 그들을 연합시켜서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할 것이냐가 드라마의 후반부를 장식할 것이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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