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잠언을 실제로 말한 사람은 의사 히포크라테스다. 그리고 그가 말하려 했던 건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영원하다)’였다. 그 시대에 의술 혹은 기술을 뜻하던 테크네란 단어는 예술을 의미하기도 했다. 더 정확히 말해 예술은 일종의 기술이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가뜩이나 심오한 질문이 애매하기까지 한 건 그래서다. 사춘기 문학 소년의 마음으로 ‘감동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건 모두 예술’이라 대답하고선 고정 관념을 벗어난 자신의 열린 마음에 뿌듯해 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작품의 역사에서 감동과는 별개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한 둘이 아니다. 알타미라 동굴의 생동감 넘치는 들소 그림은 사냥을 위한 주술의 일종이었고,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들은 손재주 좋은 ‘육체노동자’였다. 최근의 동시대미술 중 몇몇은 감동보단 놀라게 하거나 놀리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예술의 의미가 유동적인 만큼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도 그 때 그 때 다를 수밖에 없다. 최근 진행 중인 ‘읽는 사진, 느끼는 사진’展이 이런 제목을 택하게 된 건 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할 다양한 의도의 사진들을 전시하기 때문이다. 가령 ‘예술가의 방’ 섹션에 있는 육명심의 박동진 명창 사진에선 얼마나 대상의 인생이 묻어나오는가가 감상의 포인트일 것이고, ‘만드는 사진’ 섹션 김준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테크닉을 통해 얼마나 기묘한 형상을 만들어냈는지를 확인하며 경탄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때론 책에서 정보를 읽어내듯, 때론 손끝으로 미풍을 느끼듯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예술 자체가 다양한 목적의 작품들로 만들어진 울창하면서도 미로와 같은 숲이기 때문이다.

<아임 낫 데어>
2008년, 토드 헤인즈 감독

잘 알려진 대로 밥 딜런의 서로 다른 정체성을 7명의 다른 인물로 그려낸 작품이다. 시인, 로커, 선지자 등 그들은 모두 밥 딜런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면이지만 당연히 밥 딜런의 모습을 온전히 그려내기엔 부족하다. 때문에 사람들이 ‘밥 딜런은 이렇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는 그곳에 없다. 비교적 단일하게 서술될 수 있을 것 같은 ‘나’라는 주체를 해석하기 위해서도 이토록 다양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토록 많은 작품들이 느슨한 연결고리로, 혹은 생판 남처럼 모인 예술이란 개념을 어떤 한 가지로 정의하고, 어떤 방식의 감상법이 옳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란 걸 알 수 있다. 이성적 비평이 최고라거나, 마음으로 느끼는 게 최고라고 말하는 순간 작품 역시 그곳에 없다.


1991, 너바나

너바나의 두 번째 앨범이자 실질적으로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앨범이다. 얼터너티브라는 이름으로 너바나의 음악을 당시 하드록/헤비메탈 신의 어떤 대안처럼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의 음악은 헤비리프를 입힌 펑크록에 가까웠다. 즉 곡은 좋았을망정 새로운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기타 명가 아이바네즈의 제작자도 인정했듯 커트 코베인의 기타 연주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어떤 장르의 음악가라도 연주할 땐 꼭 지키는 룰을, 즉 튜닝 맞추는 것을 하지 않았다. 거친 노이즈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밴드의 탁월한 연주력만이 록음악의 왕도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잔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세잔을 비롯한 전 세대 후기 인상파와는 전혀 다른 작품과 전혀 다른 감상의 지점을 만든 피카소의 경우처럼 새로운 형태의 실험이 생기면 새로운 형태의 감상법도 뒤따라 생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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