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넘어 배운 단어 중에 가장 유용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길티 플레저’다. <꽃보다 남자>를 음소거로 보는 찌질한 수단까지 동원하면서도 놓지 못할 때(지금은 그마저도 포기했다) 스스로 자책하며 저 단어를 되뇌었다. 그리고 내가 보는 일본 방송 중에도 이런 ‘길티 플레저’가 있다. 바로 TV아사히의 <런던 하츠>다. 가능하면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본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일본 방송에 대한 글을 쓰면서 <런던 하츠>를 빠트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아오키 사야카가 대활약 하던 2005년 즈음 이후론 <런던 하츠>를 거의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최근 다시 <런던 하츠>라는 죄악의 구렁텅이로 내 발목을 잡아 끈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5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세기의 착각남, 카노 에이코’다.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방송 1위

<런던 하츠>는 화요일 밤 9시에 방송되는 TV아사히의 간판 버라이어티 쇼로 유려한 입담을 자랑하는 타무라 아츠시와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 타무라 료로 구성된 개그 콤비 ‘런던 부츠 1호2호’가 진행한다. 특히 주로 진행을 도맡는 아츠시의 재담과 기발하고 대담한 기획력이 <런던 하츠>의 힘이다. 일본의 버라이어티 쇼들이 대개 우리나라와 비교해 자극적이고 가학성이 강한 편이지만 특히 <런던 하츠>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간 ‘일본 학부모회가 선정한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방송 1위’를 차지했을 만큼 이 분야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연애 불변의 법칙>과 표절 시비가 있었던 ‘블랙 메일’, ‘트라이앵글’, ‘아이돌 트랩’, 조혜련도 출연한 적 있는 ‘순위 매기는 여자들’ 등은 <런던 하츠>의 대중적 인기를 견인한 간판 기획인 동시에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는 표적이기도 하다.

올해로 방송 10주년을 맞은 <런던 하츠>는 지금까지 다양한 기획들을 선보였지만 무엇보다도 <런던 하츠>의 정수는 ‘돗키리 카메라’(몰래 카메라) 기획들이 아닌가 싶다. 특히 타깃을 속이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단적인 예로, 2005년에 방송된 아오키 사야카의 파리 콜렉션 도전 돗키리는 무려 8000만 엔의 예산을 들인 기획이었다. 사실 스케일 면에서뿐만 아니라 타깃이 된 연예인을 속이는 방식의 가학성도 놀라운 수준이라 때로는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돗키리의 대상이 되는 건 프로그램이 주는 최고의 애정 표현’이라는 아오키 사야카의 말처럼 <런던 하츠>표 돗키리 기획의 타깃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화제성과 인기를 담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오키 사야카의 뒤를 이어 <런던 하츠>의 이 가학적인 애정을 받고 있는 이가 바로 ‘카노 에이코’다.

무지막지 착각쟁이가 뿜어내는 막말의 향연

2008년 일본에서 가장 주목 받은 개그맨 중 한 명인 카노 에이코는 한 마디로 말해 ‘극강의 나르시시즘으로 무장한 착각쟁이’다. ‘라멘 츠케멘 보쿠 이케멘’이라는 캐치 프라이즈로 활동하는 그는 전형적인 호스트복장을 하고 나와 스스로 ‘잘생긴 남자(이케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소 부담스러운 외모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잘난 척 하는 태도 때문에 주위에서는 ‘기분 나쁜 남자(키모맨)’이라 불린다. 카노는 <런던 하츠>의 2008년 가을 스페셜 방송에서 여자 그라비아 아이돌을 이용한 아츠시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과정에서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언행을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 카노에게 <런던 하츠>는 올해 2월 TV아사히 50주년 기념 방송에서 또 한 번의 대형 돗키리 기획을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개그맨이 되기 전 뮤지션을 꿈꿨다는 그에게 음반 발매와 가수 데뷔를 시켜준다고 속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실제 레코드사 관계자가 적극 가담했음을 물론, 각종 프로모션 방송과 라이브 무대까지 마련하며 최고의 스태프과 1000여 명의 엑스트라까지 동원되었다.

이 방송은 기획의 스케일도 스케일이지만 여기에 임하는 카노의 언행이 역시 최고의 관전 포인트다. 말도 안 되는 자작곡 퍼레이드(심지어 ‘인도의 우유 가게 아저씨’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다)부터 시작해 콘셉트가 아니라 진심이라면 무서울 정도의 나르시스트적 발언들, ‘이제 개그맨을 관두고 음악 한 길을 걷겠다’는 폭탄 선언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속이는 사람들에게 희열을 안겨주는 그의 모습은 간만에 맛 본 최고의 ‘길티 플레저’다.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그래서 때로는 저급하기도 한 <런던 하츠>지만 그 기발한 기획들과 이를 위해 들이는 노력은 박수를 보낼 만 하다. 불량식품도 이만큼 정성 들여 만들면 역시 손이 갈 수 밖에 없다는 건 비단 나만의 비겁한 변명일까?

글. 김희주 (칼럼니스트)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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