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하디 독한 SBS <아내의 유혹>이 끝나고 나면,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주려는 듯 MBC <사랑해, 울지 마>가 시작한다. 극 초반에는 버럭 연기나 극적인 변신, 불륜 대신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착하고 성실한 자식들, 자상한 부모님, 기품 있는 어른의 면모를 보여주는 할아버지 등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그러나 출생의 비밀, 예상치 못한 임신, 불륜 등의 클리셰와 납득 불가능한 캐릭터들이 불안요소로 불거지더니 흰 쌀밥 같던 드라마의 매력도 점차 찾기 힘들어졌다. <10 아시아> 위근우 기자와 김은영 TV평론가가 음모와 외마디 비명, 재벌이 판을 치는 TV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지만 여전히 불편한 지점을 가진 <사랑해, 울지 마>를 얘기한다. /편집자주
글. 김은영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드라마에서 결혼은 식상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재다.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는 언제나 아름답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특히 양가 부모)들의 욕망과 숨겨진 사연은 복잡한 권력관계와 길고 질긴 시련을 낳는다. 긴 호흡이 필요한 연속극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장기흥행이 보장된 소재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모험을 할 것인가. 흥행과 독창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최근 작품들이 선택한 전략은 자명하다. 혼인시련 서사구조에 재혼가정의 화합이나 장기기증 같은 공익적 소재를 덧입히는 것. MBC <사랑해, 울지 마>는 한부모가정 출신 남녀가 대안가정을 이루는 줄거리를 통해 이 일거양득 전략에 동참한 드라마다.
공감가던 그 사람들은 어디 갔나요?
사실 <사랑해, 울지 마>는 식상한 혼인시련극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작품이었다. 엄마의 헌신 속에 오순도순 살아가는 미수(이유리)네 모계 가정은 미수를 따스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게 했고, 부모 없이 자란 영민(이정진)의 성장배경은 아들 준이(김진성)를 보듬게 했으며, 현명하고 인자한 ‘왕할아버지’와 그를 연기하는 이순재 선생의 존재는 드라마 속 인물들이 기어이 옳은 길을 선택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느 악녀들과는 달리 영민을 붙잡기 위해 타협을 시도하고, 고집스런 침묵과 냉정한 자기주장으로 상대를 장악하는 서영(오승현)의 태도에는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정당성이 있었다. 어린 미수를 두고 사라졌던 신자(김미숙)가 훗날 미수를 데려가려 했었다는 설정 또한 그녀의 모정에 일말의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쉽게 편들 수 없으면서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오묘한 균형감각. 이것이야말로 여느 ‘막드’에서는 찾기 힘든 <사랑해, 울지 마>만의 미덕이요 개성이자 재미였다.
훈훈하게 흘러오던 드라마가 상식 밖의 무리수를 두기 시작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KBS <너는 내 운명>이 종영하면서부터다. 연약한 어린 생명을 위해 영민에게 미혼부의 길을 선택하게 한 이 드라마는, 극적 전개를 위해 또 다른 생명을 잉태시켰다가 제거함으로써 드라마의 세계관을 뒤엎고 말았다. 서영의 난데없는 임신으로 영민은 경솔한 ‘정자왕’이 되어버렸고, 그런 연인까지 이해하는 미수의 바다 같은 포용력과 애처로운 눈물바람과 자신을 짝사랑하는 현우(이상윤)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너무 착해서 민폐였던 옛 여주인공들을 닮아갔으며, 서영의 거짓말에 휘둘린 영옥(김미경)은 손찌검도 서슴지 않는 몰상식한 훼방꾼으로 돌변했다. 중년의 귀여운 반항쯤으로 넘어갔으면 좋았을 대성(맹상훈)와 신자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순재 선생에게까지 “이 결혼, 없던 일로 하자”는 구태의연한 대사를 읊게 했다. 사랑으로 눈물을 닦아준다던 드라마가 사람 가슴에 대못 박는 치정극으로 변해버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막드’가 떠난 자리에
지금 <사랑해, 울지 마>는 흥행과 독창성 어디에도 자신 있게 ‘올인’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주인공 커플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절대사랑을 말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하자”는 다짐밖에 할 일이 없는 그들의 데이트는 단조롭고 공허하다. 또 하나의 대안가정이 될 미선(이아현)-파블로(마르코) 커플 묘사는 예쁘지만 피상적이고, 새 연인에게 뜨겁지는 않아도 성실하게 다가가는 모습이 오히려 참신했던 현우의 사랑법도 서영의 재등장과 미수의 눈물 앞에 어그러질 전망이다. 이 드라마가 대안가정의 대안이 되기 위해 진짜 필요한 이야기는 결혼 이후 미수-준이의 친절한 동네 이모 말고 진짜 모자관계 또는 사실상 고부간이 될 미수-영옥의 상호 이해 과정일 터이나, 울다 지쳐버린 지 오래인 가족들에겐 그럴 의지도 여력도 없어 보인다. 어쩌다가 <사랑해, 울지 마>는 초반의 뚝심을 지켜내지 못하고 지리한 사건사고의 늪을 헤매게 되었을까. 분명 이 드라마는 한때나마, 등장인물 개개인에게 맥락과 개연성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는데.
글 김은영
MBC <사랑해, 울지 마>는 그 제목 안에 작품 속 인물들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가 널 사랑하니 울지 말라’라는 말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상대방의 행동을 강제할 뿐,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물론 그 말 자체는 좋은 의도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좋은 의도의 발화가 올바른 소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일방통행 소통불능의 비극
영민(이정진)과 미수(이유리)의 사랑은 만남부터 결혼 준비까지 한 번도 순탄하지 않았다. 재밌는 건 순간순간 암초처럼 엮여 둘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들 중 서영을 제외하곤 특별한 악인은 없단 사실이다. 서영(오승현)의 경우도 미수를 실직시키고, 태섭(김영재)의 교수 임용을 걸고 협박하는 몰염치한 행동보다 소통불가의 태도가 더 문제다. 싫다는 영민에게 “얘기했잖아, 내가 온다고”라 말하며 자신의 차에 태우려는 모습은 서영이 종종 보이는 일방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랑해, 울지 마>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악인과 거리가 먼 반면 이런 일방통행적인 대화를 한다. 영옥(김미경)은 자식처럼 기른 영민의 행복을 바라지만 영민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서영과의 결혼을 재촉하고, 수자(김창숙)는 영옥의 지위를 인정해주기 위해 따로 혼수 이야기를 꺼내지만 되레 영옥의 심기만 불편하게 한다. 심지어 미수조차 현우(이상윤)의 진심을 모르면서 “넌 하려고 하면 다 순탄하게 잘 되잖아”라는 말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 선배(장영남)가 서영을 가리키며 했던 ‘미숙아’라는 표현은 등장인물 대부분에게 해당하는 말일지 모른다.
평탄하기만 하던 영민의 삶을 흔든 첫 번째 사건이 아들 준(김진성)의 등장이라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재희(김유미)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영민에게 일방적으로 준을 맡기는 상황은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것과 동일하다. 영민이 자신의 친자식이란 걸 알면서도 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그냥 내뱉어진 말들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악의에 가득 찬 말은 없어도 듣는 이는 상처받고, 말한 사람은 결핍을 느낀다. 문제는 당사자 중 누구도 이렇게 엮인 불만을 제대로 풀어 원만한 대화로 연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준의 입적부터 영민과 미수의 혼수 문제까지 규일(이순재)이 조커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건 가장 현명해서가 아니라 집안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고르디우스 매듭의 일화처럼 맺힌 매듭을 풀지 않고 단칼에 베는 식이다. 자신을 망신 줬다며 미수네에 대한 원망을 더 키우는 영옥에서 알 수 있듯 제대로 풀려 상대방과 연결되지 못한 말의 잔여물들은 언제고 다시 엉킬 수밖에 없다.
갈등, 대화로 풉시다
SBS <아내의 유혹>처럼 양립할 수 없는 욕망의 대립 때문도 아닌, 등장인물들의 미숙한 대화 때문에 엉키며 만들어지는 갈등은 사실 긴박감보다는 짜증을 고조시킬 뿐이다. 하지만 현재 <사랑해, 울지 마>는 영민과 미수의 사랑에 애틋함을 더하기 위해 꼬인 갈등은 뒤로 한 채 두 사람 대 야속한 가족들의 이분법 구도를 부각하고 있다. 영민과 미수는 대성(맹상훈)과 신자(김미숙)의 불륜으로 결혼준비가 엉망이 된 상황에서조차 서로의 사랑만을 굳게 재확인할 뿐이다. 여기서 모든 건 풀어야할 문제가 아닌, 넘어야할 장애물이 될 뿐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미수 사랑합니다”라는 영민의 말에 대한 수자의 대답처럼 사람 사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지고지순한 사랑만을 주장하며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하면 이미 엉킨 소통의 실타래는 더욱 단단히 묶일 뿐이다. 갈등이 풀리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이 천사처럼 착해질 필요는 없다. 정말 필요한 건 결혼을 체면의 문제라 여기는 영옥이나, 당사자들의 문제라 여기는 순자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지점까지 이끄는 대화의 과정이다. 이렇게 세심히 풀어내야 할 부분은 그냥 둔 채 안일한 신파적 구도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야 말로 시청자를 상대로 한 드라마의 일방적 태도는 아닐까.
글 위근우
글. 김은영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