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당신 인생의 드라마는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세상에는 좋은 드라마도 많고, 기억 할 만한, 가치를 인정해야 할 훌륭한 드라마 역시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순간, 그 질문의 답은 어쩔 수 없이 가장 사적인 추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의 회랑 끝에는 늘 그가 서있습니다. 케빈. 케빈. 케빈 아놀드.

80년대 KBS를 통해 국내방영 되었던 미국 ABC 드라마 <케빈은 12살>은 저에게 단순히 드라마 한편이 아니었습니다. 케빈과 위니 그리고 폴. 그들은 나의 국민학교(‘초등학교’라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랄까요) 방과 후의 일상을 함께해 준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는 원제 ‘The Wonder Years’처럼, 그 ‘놀라운 유년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가장 충실한 리마인더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가장 서글펐던 에피소드는 바로 ‘하퍼 숲’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기였습니다. 친구들이 함께 뛰놀던 동네 숲이 쇼핑몰 개발 때문에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케빈과 위니 그리고 폴은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그러나 결국 아이들은 불도저의 무자비한 굉음 속에 추억의 나무둥치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른들의 미래의 편의는 그렇게 무심하고 간단하게 아이들의 유년의 흔적을 지웁니다. 물론 그들이 함께 술래잡기를 하고, 첫 키스를 나누었던 소중한 기억들은 누구도 훼손 할 수 없는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겠지만요.

지난 일요일 밤 방영된 ‘거리의 선생님들’편은 ‘일제고사’라는 이 정부의 불도저가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서 무엇을 앗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케빈들’이 뛰어 놀 숲을 지켜주겠다고 나선 선생님들. 그러나 교육당국은 결국 그들에게 해임과 파면이라는 불명예로 대응했습니다. 이미 성적조작 같은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는 이 무식한 지역별 줄 세우기와 등수 매기기는 벌써 아이들에게 커다란 생채기 하나를 남겼습니다. 기억하세요. 눈이 부시게 찬란한 유년의 순간들은 인생에서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당신들이 아련하게 추억하는 그 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하게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P. S.
<10 아시아>가 새로운 연재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매주 월요일, 춤바람보다 더 무섭다는 TV와 흥겨운 바람이 났던 ‘TV 자유부인’ 정석희씨가 이번 주부터 안방으로 돌아가 TV 속 누군가에게 편지를 고이 적어 보냅니다. 때론 어머니의 마음으로, 때론 날카로운 친구의 시선으로, 때론 소녀의 심장으로 매주 써내려 갈 그녀의 ‘TV 전상서’를 한 장 한 장 떨리는 마음으로 펼쳐 봐 주세요. 또한 <4월의 파리>의 아티스트 ‘센(sen)’이 스케치북으로 전하는 독특한 도쿄여행기가 매주 화요일 독자 여러분 앞에 펼쳐집니다. 이 엄청난 ‘엔고의 시대’에 저도 모르게 여행사이트에 접속해 일본 행 항공편을 알아보게 될지도 모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첫 장을 열어주세요. 비록 몸은 황사 자욱한 하늘 아래 있지만, 당신의 영혼은 화창한 5월의 동경 골목을 신나게 누비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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