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 우리에게 흔히 삼국시대라 불리는 시기는 이들 나라가 가야, 부여와 같은 인접 국가들을 침략해 병합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렇게 우리에게 잊혀진 역사 중 하나가 낙랑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에게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라는 짧은 이야기로만 남아있는 나라 낙랑을 상상력을 통해 부활시킨 SBS 대하사극 <자명고>의 제작발표회가 2일 오후 4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이번 제작발표회에는 SBS 드라마국의 허웅 책임프로듀서와 제작사 크리에이티브그룹 다다의 이한호 대표, 극본을 맡은 정성희 작가와 연출을 맡은 이명우 감독, 그리고 배우 정려원, 정경호, 박민영, 이주현, 문성근, 성현아, 홍요섭, 김성령, 이원종, 이한위가 참석했다.

“시도하기 어려운 무협 멜로 장르”

<자명고>는 흥미롭게도 얼마 전 끝난 KBS 사극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 대무신왕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절대군주가 된 대무신왕과 그에 반해 적국 낙랑에 대해서도 연민을 가진 호동왕자가 고구려의 축이라면, 호동에 대한 사랑보단 나라가 우선인 자명과 사랑을 위해 나라도 버릴 수 있는 낙랑공주가 낙랑의 축이다. 이 중 주인공 자명은 설화 속 자명고가 어떤 인물에 대한 상징일 거라는 가설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다른 사극과 달리 주인공부터 가상의 인물인 만큼 상상력을 부릴 공간은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팩트가 별로 없는 대신, 알려진 현상과 그 이면 사이를 직조하는”(정성희 작가)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시도하기 어려운 무협 멜로 장르”(이한호 대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과연 <자명고>는 퓨전 사극의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며 “방송사가 명운을 걸고 자신 있게 시청자에게 권하는 작품”(허웅 책임프로듀서)이 될 수 있을까.

나라를 지킬 운명을 타고난 왕녀 자명고, 정려원
다른 누구도 아닌 정려원이 사극의 주인공을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녀의 연기력이나 열정의 문제가 아닌, 호주 교민 출신으로서의 핸디캡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호주에서는 영국 히스토리를 배웠고, 한국에 와서도 국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청률 50% 짜리 국민 사극이 방영할 때 내가 바로 안 보는 50%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그런 그녀가 “액션보다 힘든 사극 대사 톤”에 도전하게 된 바로 구국의 운명을 타고난 자명고라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다. “롤모델이 없는 미지의 역이지만 그 때문에 누군가와 비교 당할 걱정도 없다. 예지력을 비롯한 다양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라 <삼국지> 속 제갈량을 떠올리며 연기하고 있다.”

낙랑의 두 왕녀의 마음을 뺏는 마성의 왕자 호동, 정경호
이번 제작발표회가 독특했던 건 배우들이 극 중 인물의 의복 그대로 나와 짧은 패션쇼를 펼쳤다는 것이다. 모두들 어색해서, 혹은 재밌어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유독 남자 주인공 호동왕자 역 정경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강국 고구려 대무신왕의 첫째 아들이지만 부여 출신 어머니의 핏줄 때문에 왕위 계승권이 불확실한 호동 캐릭터의 어려움 때문일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낙랑공주를 이용해 낙랑을 무너뜨리는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살기 위해 왕이 되어야 하고, 왕이 되기 위해 사랑을 배반하는 이 캐릭터는 심지어 이름의 뜻조차 ‘잘생긴 사람’인 매력의 소유자니 사극 초유의 옴므파탈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멸할 운명을 타고난 왕녀 낙랑공주, 박민영
다른 나라 왕자와의 사랑 때문에 자기 나라를 팔아먹는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고뇌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무너진 낙랑의 백성들에게 낙랑공주는 변명의 여지 없는 악녀가 아닐까. 자칫 시청자에게 비호감 캐릭터로 낙인찍힐 수 있는 역을 연기하는 것은 박민영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여태 찍은 분량 중 웃는 장면 하나 없이, 항상 오열하거나, 술 마시고 힘들어하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분노하는” 연기 때문에 감정 조절 역시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결핍된 안티 히어로의 매력을 살릴 수 있다면 낙랑공주는 자명 이상으로 시청자의 공감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전 포인트
<자명고>를 이끄는 주요인물은 역시 국운을 건 위험한 삼각관계를 펼치는 자명, 호동, 낙랑공주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정말 화려한 건 요소요소에 배치된 조연 라인업이다.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해 카리스마 대무신왕을 연기하는 문성근과 상대편 낙랑의 왕 최리를 연기하는 홍요섭, 최근 MBC 에서 보여준 탄광촌 억척어멈의 모습 대신 팜므파탈적 매력의 왕비를 연기하는 이미숙 등 무게감 있는 역부터 “배우의 명예를 걸고 비밀을 보장한다 약속하고” 변검술을 배운 이원종, 왕족이지만 단순 무식한 무장의 연기를 보여줄 이한위처럼 약간 코믹한 감초 역까지, 이들 연기파 조연들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자명고>를 보는 큰 재미일 것이다. 이 탄탄한 조연들의 연기는 3월 10일 화요일 <자명고> 1, 2회 연속 방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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