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재벌 2세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장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중파 3사는 미니시리즈는 물론 아침, 일일, 주말 드라마 시간대에 모두 재벌 2세가 등장하는 드라마들을 배치해 놓았고, 재벌들의 이야기인 KBS <꽃보다 남자>와 MBC <에덴의 동쪽>은 미니시리즈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심지어 SBS <아내의 유혹>의 바보 같은 남자 교빈(변우민)마저도 중견 기업 오너의 후계자다. 대체 왜 우리는 드라마에서 재벌을 보기를 원하는가.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이 소비되는 방식과 끊임없이 보고 또 보는 ‘재벌 2세 드라마’의 특징들, 요즘 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의 로맨스를 엿볼 수 있는 기회와 재벌 그룹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재계 서열까지, (드라마 속) 재벌에게 궁금했던 모든 것을 공개한다.

당신이 여자라면 백화점 탈의실로 들어가라. 탈의실 안으로 재벌 2세가 들어와 당신의 입을 막을 것이다. 열 받아 한 대 치면 그는 당신의 노예. 당신이 대기업 여사원이라면 커피를 들고 모퉁이를 돌아라. 밤 12시라도 당신 앞에는 명품 와이셔츠에 커피를 흘렸다며 화내는 사주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열 받아 한 대 치면 그는 역시 당신의 노예.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나한테 이러는 건 니가 처음이야!”

테리우스 재벌2세와 그의 후예들

믿지 못하겠다면, TV를 틀어라. KBS <꽃보다 남자>의 서민 여고생 잔디(구혜선)는 날라차기 한 번으로 신화그룹 후계자 준표(이민호)의 관심을 얻었다. 채널을 돌리면 신화그룹 같은 재벌의 탄생사를 담은 것 같은 MBC <에덴의 동쪽>이 방영중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 2세를 서민 여고생보다 더 찾기 쉬웠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은 전문직 드라마를 비롯한 장르 드라마와 대하 사극들이 ‘재벌 2세물’ 못지않게 제작됐다. 반면 2009년은 재벌 2세들이 다시 드라마를 장악했다. 공중파 3사의 월화 미니시리즈, 아침, 일일, 주말 드라마가릴 것 없이 재벌 2세들이 등장한다. ‘명품을 원해 내가 다 쏟아 붓지 구두부터 백까지 넌 돈이 굳지’라는, 심장마저 오그라들 라임의 노래 ‘재벌 2세’는 드라마 속의 재벌 2세 자체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캐릭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귀여니의 소설 이후 읽을거리가 없었던 초등학생들의 방학 때문일 수도 있고, 극심한 경제 불황이 시청자들에게 막대한 부에 대한 판타지를 키운 것일 수도 있다. 신데렐라 스토리만큼 잘 먹히는 이야기도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꽃보다 남자>를 비롯한 요즘 재벌 2세는 과거 재벌 2세들과는 또 다르다. <꽃보다 남자>의 재벌 2세들은 MBC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와 MBC <이브의 모든 것>의 장동건 같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재벌 2세의 후예들이다. F4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잘 생기고, 악기 연주나 노래도 잘하며, 여자친구를 위해 이벤트를 벌인다. 이들은 199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문법이 재벌을 소재로 하며 생긴 새로운 캐릭터였다. 1980년대만 해도 재벌 드라마는 재벌 2세와 평범한 여사원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KBS <욕망의 문>은 한 재벌 그룹의 역사를 치밀하게 관찰했고, MBC <사랑과 야망>이나 KBS <야망의 세월>에서 재벌은 능력은 있지만 가난한 남자가 언젠가는 쟁취하고픈 대상이었으며, KBS <훠어이 훠어이>는 스스로 재벌이 되고자 했던 패기만만한 청년들의 꿈과 좌절을 보여줬다. 트렌디 드라마는 재벌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제거하고, 대신 재벌 2세들을 <캔디>의 테리우스나 안소니로 만들었다.

이 땅으로 내려온 신데렐라와 왕자님 이야기

그러나 <꽃보다 남자>가 ‘나쁜 남자’ 준표와 그의 친구들이 이끄는 이야기인데 반해, 당시 트렌디 드라마들은 여주인공이 보다 능동적으로 묘사됐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 SBS <토마토>, <이브의 모든 것>등은 모두 직장 여성이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일과 사랑을 얻는 이야기였다. <토마토>에서 두 여자 사이의 경쟁을 촉발 시키는 역할을 하는 남자 주인공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그 당시 남자 주인공은 선/악의 여주인공들이 경쟁에 이겨 쟁취해야할 전리품이었다. 1990년대의 ‘엄친아’ 재벌 2세가 2000년대의 ‘나쁜 남자’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여주인공이 능력만으로 재벌 2세와의 사랑을 얻기 힘들어지면서다. SBS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여자는 일로 성공하는 대신 ‘어린 시절의 불행으로 마음에 상처가 있는’ 망나니 재벌 2세를 사람 노릇하게 만들면서 사랑에 빠졌다. MBC <현정아 사랑해>가 직접적으로 보여줬듯, 서민 여성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재벌 2세와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재벌 2세가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차가운 도시 남자’가 된 건, 그래야 그들이 부모와 싸울 수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SBS <파리의 연인>에서 재벌 2세는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했고,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은 결혼 대신 연애에서 마무리를 지으며 재벌 2세 어머니의 반대를 피해갔다. <파리의 연인>과 <꽃보다 남자>의 남자 주인공들이 여주인공의 집에 와서 츄리닝을 입는 것은 상징적인 공통점이다. 그들이 그렇게 ‘내려’와야 그나마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재벌가문의 부모가 드라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여주인공의 성품 하나를 보고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올드스쿨’이다. <꽃보다 남자>부터 KBS <너는 내 운명>까지, 평범한 여자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갈등을 각오해야 한다. 가장 판타지적인 <꽃보다 남자>에서조차 준표의 어머니(이혜영)는 ‘70만 명의 인생’을 책임지는 자리에서는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재벌이 여주인공에게 그저 행복을 주는 ‘천국의 계단’이 된 것은 지나가 버린 환상이다. 우리는 이미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재벌 가문 안에서 비극적인 인생을 산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재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시청자들은 오히려 재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시청자들은 인터넷으로 재벌 가문의 일원이 사는 현실을 알지만, 동시에 초현실적이라 해도 좋을 재벌의 생활상도 알게 된다. 인터넷을 통해 한 번 쇼핑에 억대를 쓰기도 하는 패리스 힐튼의 생활상을 접하고, 에이미는 올리브TV <악녀일기>와 미니홈피를 통해 ‘좀 사는’ 집의 자식들이 무엇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보여준다. <꽃보다 남자>에서 F4가 준표의 전용기를 타고 뉴칼레도니아에 가는 것은 그다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과장스러운 건 준표가 무엇 때문에 잔디를 데려가느냐는 것이다.

당신에게 뺨을 내밀 재벌 2세는 없다

그래서 지금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 2세’는 평범한 시청자들을 위한 완벽한 ‘볼거리’ 역할을 한다. 재벌은 <에덴의 동쪽>에서는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을 휘두르고, <꽃보다 남자>에서는 수많은 명품과 여행지를 구경시켜주며, SBS <유리의 성>에서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벌 가문의 사생활을 엿보게 한다. 특히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가 거의 불가능한 한국 드라마 산업에서, 재벌은 제작자들이 가장 손쉽게 상상력을 펼칠 수 있고, 시청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다. MBC <신데렐라>는 10여년 전에 부유한 남자가 평범한 여자에게 극장을 통째로 빌리는 이벤트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고, 2009년의 <꽃보다 남자>는 잔디와 준표의 로맨스 못지않게 F4의 화려한 생활상이 부각된다. 또한 ‘5천억 위자료’를 요구할 수 있는 그들의 실제 사생활은 재벌인 남편과 이혼하며 위자료 1천억의 이혼 소송을 건 여배우의 이야기인 MBC <대한민국 변호사>의 상상력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2009년에 재벌은 한국의 모든 드라마와 섞인다. <꽃보다 남자>는 물론, KBS <미워도 다시 한 번>, SBS <유리의 성>은 ‘재벌 2세물’에 가족 간의 갈등을 부각시키는 홈드라마를 결합한 중년 대상의 드라마고, KBS <미우나 고우나>, <너는 내 운명>은 일일 드라마에 재벌 가문과 평범한 서민 가정의 갈등을 집어넣었다. <에덴의 동쪽>은 1980년대식 재벌 성장사다. 현실이 그러하듯, 드라마에서도 재벌이 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재벌은 그렇게 현실과 판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만큼 시청자들에게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꽃보다 남자>가 준표의 힘을 보여주는 시각적 쾌락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떻게 한 개인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생략하는 것의 문제만은 아니다. 재벌의 삶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고, 신분상승의 판타지를 즐기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현실을 돌아볼 기회를 잃는다. <꽃보다 남자>에서 잔디의 가족들이 원작보다 더 노골적으로 준표의 경제력을 원하는 것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연출과 대본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꽃미남 재벌 2세의 멋진 모습을 극대화시키며 생기는 부작용이기도 하다. 정말로, 서민 시청자들은 그 모멸감을 참으면서까지 재벌 드라마의 쾌락을 즐길 것인가. 고민하나 안하나 고단한 삶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하자. 현실에서 당신에게 뺨을 내밀 재벌 2세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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