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더러 연희 같은 여자가 되라고 하셨다. 그녀는 독일장군 이연희도 왕년의 여배우 우연희도 아닌 <퇴마록>의 연희다. 12개 국어에 능통하며 심연의 눈을 가진 서연희. 그녀는 살벌한 퇴마사들 사이에서 한 떨기 수선화였고, 역사적 지식까지 겸비한 엘리트였다. 톡 쏘는 승희보다 여성스러웠고, 이미 죽은 사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할 정도로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 어머니가 빌려오신 그 해의 베스트셀러는 이후로도 중학교 시절 책꽂이의 상석을 차지했다. 국내편-세계편-혼세편-말세편에서 <왜란종결자>에 이르기까지 누우면 현암의 사자후가 들리고 동네 성당의 신부님들은 죄다 박 신부로 보이던 때가 있었다. <퇴마록> 신간이 나오면 사춘기 시절 늘 살얼음을 걷던 어머니와의 사이도 부드러워지고 집안에는 정말로 웃음꽃이 피었다. 작가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퇴마록>은 읽는 재미 외에도 한 가정의 화목을 도모했다.

<왜란 종결자>를 끝으로 이우혁 작가의 책을 읽진 않았다. 그건 책꽂이의 상석을 시드니 샐던과 스티븐 킹을 지나 하루키, 줄리언 반스 등이 차지했던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무료한 토요일 오후에는 아무 권이나 꺼내 들어 아무 페이지나 넘겨본다. 어디를 펼쳐도 으슬으슬 스펙터클했던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다만 요즘은 어머니가 <아내의 유혹>에 빠져 계시는 게 불안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더러 애리나 은재가 되라고 하시면 어쩌지? 뭐 소희가 되라고만 안 하시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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