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안 오고, 꼼짝도 하기 싫은, 늘상 하던 대로 리모콘만 괴롭히던 어떤 날, 우연히 <세이빙 그레이스>를 발견했다. 그 드라마에서 정작 내 눈길을 잡아 끈 것은 주인공 홀리 헌터가 아니라, 법의학자 로라 산 지아코모였다. <프리티우먼>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의 친구, “돈 많은 남자 만나서 팔자 고친 년? 아, 신데 퍼킹(Fucking) 렐라!” 시원스레 내 뱉던, 그녀 말이다.

<프리티우먼>이 개봉했을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몇 반의 아무개가 보러 갔다가 극장 앞에서 손들고 벌을 섰다는 괴담이 돌던 시절, 나는 그런 배짱은 못 돼서, 남몰래 비디오 출시를 기다렸다. 그렇게 만났던 <프리티우먼>은 아,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처음 보는 여배우, 그러니까 줄리아 로버츠는 어떻게 저렇게 신나게 웃을까 싶었고 리차드 기어가 적정한 농도로 느끼해서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프리티우먼>은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영화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일부러 찾아 보지는 않지만 케이블 TV에서 해주면, 중간부터라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건 전적으로 비비안 때문이다 자, 이제 세루티의 땡땡이 드레스를 입는 순간이다. 경비행기로 오페라를 보러 갈 땐 빨간 이브닝 드레스를 입겠지. 에드워드가 목걸이 함 뚜껑을 확 닫을 때는 비비안의 입이 귓가에 걸리듯 찢어지는 미소를 볼 수 있을꺼야. 하루 이틀 지날 때마다 사랑은 깊어지고, 드레스는 멋져졌다. 잠깐의 위기가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해피엔딩. “(그런 일은) 다 할리우드에서나 일어나는 기적이죠” 라고 영화 속 행인은 지껄이지만, 아무래도 좋다. 허무맹랑 언감생심 해피엔딩에 무작정,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은 그런 날에는. 그 노래들은 또 얼마나 좋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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