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도 없는 주제에 나는, 늘 요란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것 같다. 뭔가 파티를 하거나, 남자친구와 근사한 저녁을 먹거나, 콘서트 장에 가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그날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1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삼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얼마간 살게 되었을 때,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대는 뉴욕에서, 11월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에 둘러싸여 숨이 막힐 것 같은 그 나라에서는, 정작 크리스마스를 그 언제보다 조용히 보내고 싶어졌다. 친구도, 전화도, 인터넷도 하지 않는 채. 그런 순간 언제나 우리 곁을 변함없이 지켜주는 가장 믿음직한 친구는, TV다.

그 해 나의 크리스마스는 ‘채널13’ (중간광고 없는 완벽한 채널이다)에서 해주는 <닥터 지바고>와 함께였다. 작은 TV 수상기 앞에 의자를 바짝 갖다 붙여놓고 화장실도 안가고 집중해서 보게 된 그 영화는 여전히 시리도록 아름답다, 는 진부한 표현을 반복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던 오마 샤리프는 그 오래된 필름 속에서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모습으로, 이집트인이라는 이 남자의 근원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히 러시아 산 지식인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197분. 영화가 끝나고 나는 태평양을 건너 배달 되어온 <씨네21>을 읽다가, ‘빵 굽는 타자기’로 밀린 기사를 쓰고, 조만간 봐야 될 영화 스케줄을 체크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해먹고, 설거지를 하고, 비스킷을 구워먹고, 핫초코를 마시고, 낮잠을 자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나쁘지 않았다. 그 겨울 가장 조용한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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