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현재,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미스터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 많던 충직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동물로 치자면 개(犬)에 비견할만한 남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리 곁에 남은 건 고양이 과(科) 남자들뿐이다.

그런가 하면 2008년 12월 현재, 나 개인의 가장 심각한 미스터리는 이 고양이 과 남자들이 밉기는 해도 싫지는 않다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싫기는커녕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들이 매력적인 이유?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 우선, 대부분의 고양이들은 야리야리한 몸매와 부들부들한 피부를 갖고 있다. 그러한 몸매와 피부를 갖지 못한 나로서는 그 앞에서 하릴없이 무릎을 꿇을 수밖에.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없이 도도하게 굴다가 가끔씩 ‘당신 없인 못 살아요’ 류의 신호를 보낸다. 도저히 그 마음을 알 수 없는데다 노력해도 가질 수 없으니 영심이 쫓아다니는 왕경태처럼 한심해보이리라는 걸 알면서도 푹 빠져들게 된다.

고양이들에게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목소리

물론 리트리버 형(‘개 과’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으니 이렇게 표현하련다) 남자와 달리 고양이 과 남자들을 만날 때는 몇 가지 문제가 뒤따른다. 자존심을 버려야 하며(고양이는 절대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돈이 많이 들고(고양이는 자신의 매력이 지갑을 열지 않아도 될 만큼 값지다는 걸 안다), 자꾸만 말투와 행동이 터프해진다. 더불어 고양이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누나만 믿어!” “누나가 누군지 몰라?” 식의 허풍 섞인 멘트가 시시때때로 튀어 나온다. 결국, 이 ‘멘트’가 멘트로만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일터로 달려가고, 고양이들이 그 동안 체육관과 피부과를 들락거리며 윤기 흐르는 털을 가꿔 더 매력적인 고양이로 재탄생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내게 남는 것? 나날이 거칠어지는 손마디와 일취월장하는 생활력 정도. 그러다 지치면? KBS 2FM<미스터 라디오>를 듣는다. <미스터 라디오>에는 이훈이 있으므로.

<미스터 라디오>의 DJ 이훈은 내가 근자에 발견한 최고의 리트리버다. 어쩌면 21세기에 남은 유일한 ‘순종’ 리트리버인지도 모르고. “전 여동생 생기면 진짜 잘 해줄 것 같아요. 저 안 먹고, 안 입고 아낀 돈으로 여동생 맛있는 거 사주고, 예쁜 옷 사주고, 남자 친구 생기면 운동 가르쳐주고…. 물론 그러다 내 동생 배신하면 그 남잔 나한테 죽지.” 믿기나? 이건 1970년대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읊은 대사가 아니라 이훈이 12월 3일 <미스터 라디오>에서 한 멘트다. 이러니 고양이 발톱에 생채기 난 마음에 보드라운 새살이 돋을 밖에….

고양이 VS 리트리버

따지고 보면 이훈은 포지셔닝 자체부터 특이한 DJ다. 대다수의 라디오 DJ들이 청취자의 다정한 친구를 지향하는 것과 달리 그는 구박의 대상을 자처한다. 자신의 실수와 약점을 쉴 새 없이 드러냄으로써 청취자보다 낮은 자리로 임하는데 그런 DJ로 말미암아 청취자들은 졸지에 ‘잘난’ 사람의 자리로 승격한다. 그리고 그건 이 프로그램이 갖는 최대의 미덕이다. <미스터 라디오> 청취자들이 보내는 문자메시지는 대개 이훈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구박하거나, 욱 하는 성격을 나무라거나, 부정확한 발음을 놀리는 내용이지만, 우리의 충직한 리트리버는 주눅이 들긴커녕 걸걸한 목소리로 “OOO님, DJ 놀리면 혼납니다!” 외치고는 껄껄 웃을 뿐이다. 그럼 우리의 리트리버 이훈은 무얼 입고 다니나?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추리닝’이다. 스스로도 “제가 한 가지는 자신 있습니다. 연예인 중에 저보다 트레이닝복 많은 사람은 없을 걸요?” 라고 이야기할 정도니 오죽할까. 그런데 신기하다. 그게 나빠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파트너 지현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훈과는 정반대로 그는 전형적인 21세기형 고양이 과 남자니까. 무엇보다 비싸게 구는 점(드라마 녹화 때문에 종종 DJ 석을 비운다), 이훈처럼 자신의 빈틈을 노출하지는 않는 대신 적재적소에서 기타를 친다거나 노래를 부름으로써 매력을 발산하는 것, 자신의 연약함을 애써 숨기지 않는 태도까지(어느 날인가 11월 말의 추위를 견디지 못한 지현우가 바지 속에 검정 ‘쫄쫄이 바지’를 입고 나타났을 때, 이훈이 아무리 놀려대도 그는 한없이 의연했다) 뭘로 보나 그는 고양이다.

그 많던 리트리버들은 어디로 갔을까

<미스터 라디오>의 웹사이트를 보면 두 사람의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TV가 아닌 라디오다 보니 둘 다 평상복 차림인 사진들이 게시판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이 두 남자의 ‘편한 차림’은 종류와 차원이 다르다. 이훈이 아래 위 세트로 된 트레이닝 팬츠에 립조직 라운드넥 티셔츠를 받쳐 입는, 진짜 편한 스타일이라면 지현우는 같은 트레이닝 복이라도 맨투맨 티셔츠의 로고와 모자의 로고 디자인까지 고려하며 골라 입은, ‘편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까칠하게 고른’ 스타일이다. 같은 운동화라도 이훈이 관절 보호를 위해 무뚝뚝하게 생겼지만 기능은 좋은 ‘에어’ 운동화를 신을 스타일이라면, 지현우는 전세계에 딱 50켤레만 존재하고, 발바닥에는 고유번호가 새겨진 리미티드 에디션 하이톱 스니커즈를 신을 스타일이다.

문득 고양이 과 남자들이 득세하는 현상은 남자들이 컬러 로션을 바르고, 남자의 성공은 곧 옷차림과 직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세상에 뿌리내리면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이 추리닝을 추리닝으로 입던 시절, 남자들이 “아휴, 오빠(또는 자기야)! 옷 좀 신경 써서 입어!”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던 시절이야말로 우리 여자들에겐 ‘봄날’이었던 게 아닐까? 허구한 날 추리닝만 입고 돌아다닌다는 남자에게서 위안 받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그나저나 정말 그 많던 리트리버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주변에 리트리버 있는 여자분들, 분양 좀 하십쇼. 분양 문의 redcat47@hotmail.com!

심정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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