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가 잘생기고, 섹시하다는 건 1+1=2 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 당연함만큼 우리는 그가 그 얼마나 많은 영화와 캐릭터를 통해 그런 공식을 정식화했는지, 또 그 공식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매력을 보여줬는지 쉽게 잊은 것도 사실이다. 브래드 피트는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지금과 같은 판타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그 시계를 잠시 거꾸로 돌려보도록 하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
세상에는 중후한 멋을 풍기며 나이 들어가는 숀 코너리와 조지 클루니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조니 뎁이나 브래드 피트처럼 도무지 나이 먹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70세 먹은 노인 역할을 맡은 브래드 피트의 연기는 잘 하느냐, 못 하느냐를 떠나 우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야 할 만큼 충격적이다. 얼굴 전체에 퍼진 주름과 듬성듬성한 흰 머리, 유약한 몸과 선량하다 못해 희미하게 느껴지는 눈빛까지, 늙은 얼굴의 벤자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브래드 피트에 대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배반한다. 늙은 브래드 피트라니, 그건 형용모순 아닌가?

<바벨>의 리처드
<바벨>의 리처드는 영웅이나 로맨티스트 같은,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쏜 총에 아내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때 단지 발을 동동 구르고, 대사관을 향해 어서 빨리 조치해달라고 울부짖는 보통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자신을 돕는 모로코인에게 욕까지 퍼붓는 참으로 허약한 존재로서의 보통사람. 그래서일까. 회색빛 머리칼과 수염, 짙은 주름 등 리처드의 모습은 브래드 피트의 나이라면 원래 가져야 할 만한 요소들이다. 평소의 그보다 리처드가 나이 들어 보이는 건 그만큼 브래드 피트의 동안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로이>의 아킬레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타가 되고, 탁월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브래드 피트가 정색하고 액션 히어로 역할을 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트로이>의 아킬레스는 그런 얼마 되지 않은 경우 중 하나다. 신화 속 영웅이 현실로 존재했으면 이러하리라는 상상을 실현하는데 브래드 피트만큼 좋은 배우가 있을까? 하지만 용기와 절제가 어우러진 헥토르(에릭 바나)에 비해 브래드 피트의 아킬레스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영웅이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함. 그것은 훨씬 전 전혀 다른 느낌의 두 영화 <가을의 전설>과 <칼리포니아>에서부터 존재해온 브래드 피트만의 매력이다.

<오션스 일레븐>의 러스티
조지 클루니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대등한 위치에 서서 의견을 교환하고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는 카드의 달인 역을 캐스팅해야 할 때 과연 어떤 캐스팅 디렉터가 브래드 피트를 1순위에 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조지 클루니와 함께 <피플>지에서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배우’에 두 번 뽑혔고, <조 블랙의 사랑>에서 보여준 단정하고 핸섬한 모습과 <스내치>에서 연기한 촌구석 건달 미키의 모습 모두를 가지고 있는 배우다. <오션스 일레븐>의 러스티는 이런 모습들이 종합된 가장 젠틀하고 신선한 양아치다. 물론 그의 가장 귀여운 모습은 <오션스 13>에서 <오프라 윈프리쇼>를 볼 때서야 확인할 수 있지만.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은 파이트 클럽에 대해 ‘처음에 올 땐 누구나 비계지만 몇 주 후면 근육질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파이트 클럽의 좌장 격인 타일러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의 군살 하나 없는, 하지만 보디빌더의 그것과는 다른 근육질 몸매를 통해 완벽하게 형상화된다. 성형외과에서 지방흡입 수술로 빼낸 인간의 지방을 재료 삼아 비누를 만들어 팔고, 싸움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말하는 타일러는 <칼리포니아>의 얼리 다음으로 가장 거칠고 파격적인 인물이다.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얼굴의 피를 뿌리면서 ‘나는 에이즈 보균자’라고 낄낄대는 장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또라이’ 연기를 잘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가을의 전설>의 트리스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나 항상 기대하는 브래드 피트의 어떤 원형을 간직한 영화다. 어릴 때부터 퇴역 군인인 아버지(앤서니 홉킨스)와 인디언 원 스텝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트리스탄은 곰과의 싸움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남자답고, 동생의 연인 수잔나(줄리아 오몬드)가 보고서 한 눈에 강한 끌림을 느낄 만큼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자신이 수잔나의 관심을 끈만큼 자신 역시 그녀에게 끌린다는 사실에 불안해하고, 또 그러면서도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완벽한 얼굴과 몸매가 부서지기 쉬운 순수한 정신과 만날 때 얼마나 매혹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칼리포니아>의 얼리 그레이스
이 영화의 화자인 브라이언(데이비드 두코브니)은 얼리를 이렇게 평가한다. ‘백인 쓰레기라는 표현이 있으면 그게 바로 그일 것’이라고. 그는 연쇄살인마지만 한니발 렉터처럼 자신만의 살인 미학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단지 통제라는 것을 모르고, 조금은 모자라 보일 정도로 도덕적 개념이 없다. 가령 ‘높은 곳에서 돌을 떨어뜨리면 사람이 맞아 죽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면 그대로 실천해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한 인물이다. 영화 내내 눈에서 분노와 광기를 번뜩이는 브래드 피트는 섹시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마음속의 브레이크가 망가져 대체 어디까지 일을 벌일지 모르는 불안함은 이후 다른 영화들에서 변주되며 그만의 매력을 형성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제이디
이곳이 종착지다.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에서 유부녀 델마(지나 데이비스)의 호감까지 덤으로 얻고, 비가 오는 날 모텔 앞에서 ‘당신이 생각나서 왔다’고 말하는 핸섬하고 풋풋한 느낌의 사기꾼 제이디, 혹은 기막히게 잘생겼지만 조금은 풋내기 같고, 잘빠졌지만 남자다운 단단함과는 거리가 있는 몸매를 가진 젊은 시절의 브래드 피트가. 그는 ‘당신이 범법자의 마음을 훔쳤다’며 여자의 마음을 잔뜩 흔들어 놓고선 그녀의 전 재산을 몽땅 훔쳐가는 개자식이지만 그 천진할 정도의 미소는 델마 뿐 아니라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우리는 그토록 우월한 존재, 브래드 피트의 탄생을 예상하진 못했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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