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은 벽에 걸어놓고 그리워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더운 손을 부여잡고 볼을 부비고 싶은 인간이다. 설치미술에서 샤이니 멤버까지 관심의 촉수가 안 뻗친 곳이 없고, KBS <개그콘서트>의 열혈 시청자로서 다져진 유머의 기본기에, “심심하면 이도 뽑는다잖아” 같은 감칠맛 나는 표현을 대화 중간에 끼워 넣는 정감 넘치는 화술의 소유자. 이런 여자를 우아한 안방마님으로 방치하는 건 단연코 재원낭비일 테다. 겨울의 트랙 위에서 봄의 꿈을 꾸는 배우. 어렵게 거머쥔 자신만의 모래시계를 쥐고 고현정은 지금, 현재를 달린다. 몸이 더워진다. 봄이 멀지 않았다지금까지 고현정이라는 여자가 걸어온 인생의 행로는 어쩌면 굉장한 멜로드라마인데, 선택하고 있는 작품들은 일부러 그런 멜로드라마를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고현정: 많이 비껴가죠? (웃음)
5월에 방영되는 차기작 MBC <선덕여왕>의 경우도, 결국 시대나 캐릭터라는 ‘코스튬’을 입고 가잖아요.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고현정: 음.. 사실 다양한 시나리오가 많이 안 오는 걸요. (웃음) 제 나이가 좀 애매하기도 하고, 약간 주인공 아닌 역할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요. 이걸 욕심이라고 얘기하긴 좀 그런데, 내가 중심이 되면 화살을 너무 맞으니까 약간 비껴서 있고 싶기도 했고요. <선덕여왕>은 아무래도 선덕이 주인공이니까. (웃음)
“오로지 사람에 대한 호기심만 있어요”
캐스팅 뉴스를 보고 모두 고현정이 ‘선덕’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실 역이라서 좀 놀랐어요. ‘미실’이라는 여자의 어떤 캐릭터에 끌린 걸 까요.
고현정: 그 시대에 똑똑한 걸로는 제일인 여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건 누구한테 들은 말인지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선덕은 왕이 되려고 했던 여자고, 미실은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는 여잔데 사랑을 원했다고 해요. 저도 그걸 선택할 여자고.
끝날 때 끝나더라도 일단은 가보자? (웃음)
고현정: 올인 하는 거죠 (웃음). 저는 좋아하는 마음을 일부러 컨트롤 하지는 않아요. 특히 남녀간에는 오히려 확 먼저 다가가서 망치는 스타일이죠. (웃음) 어머나, 당신!, 여보세요,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오오, 장난 아닌데? 하면서 달려든다니까요. 전 남편을 만날 때도 그랬고, 누군가 궁금해지면 그걸 별로 안 숨겨요. 티를 내죠.
호기심이 많은가 봐요.
고현정: 다른 호기심은 없어요. 오로지 사람에 대한 호기심만 있죠. 특히 남자! (웃음). 어릴 때부터 너무 여자인 애들은 못 만나겠어요. 귀찮고 성가셔서. 계속 챙겨줘야 하고 나한테 뭐 자극을 주는 것도 없고. 여자들도 약간 보이쉬 한 사람이 좋고. 남자가 편해요. 너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그냥 잘생긴 남자애들 보면 흐뭇하고 좋지 않나요? (웃음)
그러니까 이런 저런 오해가 생기잖아요.
고현정: 그런 오해는 괜찮다니까요. 오히려 말이 씨가 되면 좋겠고. (웃음) 제가 싫은 건 다른 오해에요. 나는 그냥 웃자고, 이 자리가 좀 덜 지루했으면 해서 한 말인데 누가 상처받으면 그거 정색하고 풀기도 어렵고. 다시 더 유쾌한 농담으로 해줄 능력도 안 되고. 아우… 그런 게 좀 힘들어요.
몇몇 인터뷰를 봐도 그렇고, 지금도 ‘지루하다’는 표현을 자주 써요. 그건 역으로 스스로 늘 지루할 까봐 염려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고현정: 부인 못하겠어요. 인생이 지루할까 봐 늘 걱정이에요. 공부를 했으면 더 좋은 표현이 있겠지만. (웃음) 어차피 내 인생이 40년 가까이 이렇게 왔는데 웬만한 건 억지로 포장하지 말자고 생각해요. 그러면 좀 덜 지루해지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서 저랑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나 배우들을 사석에 만나도 점수 따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 관계들이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옛날에 제가 원했던 것과 달리, 양이 아니라 질의 관계.
“전생에 전 아마도 켈트족의 전사였을 것 같아요”
쓰는 어휘나 표현력도 남다르지만, 상대방에게서 얘기를 끌어내는 능력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샘플들을 한번은 겪어봤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의외로 편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고. 토크쇼 제안도 그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고현정: 안 그래도 토크쇼 때문에 SBS 작가들과 한번 미팅을 했어요. 전 저를 소비시키는 것에는 별 두려움이 없어요.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특별히 인신공격성 발언이 아니고는 자유롭게 하는 편이니까요. 살짝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 건 아이들이에요. 드라마는 캐릭터로 도망갈 구멍이 있는데 토크쇼는 아니니까,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표정 하나하나까지 TV에서 다 읽힐 테니까요. 지금 열두 살, 열 살, 한참 민감한 때인데 엄마에 대한 자부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애들이 사는 환경에서 엄마가 부끄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는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거죠. 그래도 만약 토크쇼를 한다면 재미는 있을 것 같아요. 빅뱅도 만나고 싶고. (웃음)
빅뱅 중 누구요?
고현정: 당연 탑 군이죠. 그 친구가 춤출 때 하는 작은 몸짓, 눈빛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이효리도 만나보고 싶고. 이효리씨는 정말 방송 3사가 보호를 해줘야 하는 스타인 것 같아요. 그렇게 재주 많고 엽렵한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나겠어요.
이런 의외의 유머나 솔직함이 고현정이 진행하는 토크쇼를 기대하게 하는 부분인가 봐요.
고현정: 유머감각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거 이번에 산산조각 났잖아요. 토크쇼 제작팀을 만났는데, 거기 부장님이 “현정 씨, 웃기려고 하는 강박관념이 너무 강한 거 같아요” 하시더라 구요. (웃음)
수줍은 공주보다는 장군 같은 기질이랄까. 옛날에 태어났으면 나라를 구했을. (웃음)
고현정: 예전에 집에서 가만히 그걸 생각해본 적이 있거든요. 전생에 난 뭐였을까? 아마도 켈트족의 전사였을 것 같아요. 투구에 창칼에 잔인무도한, 장난 아닌 진짜 전사. 그런데 그 전사가 싸우러 나가다가 개한테 물려 죽었어. 제 인생이 딱 그건 거 같아요. 열 명도 아니고 백 명도 아니고, 천명, 만 명을 죽이러 만반의 준비를 해서 길을 떠나는데 문을 나서면서 개한테 물려 죽은 허당 인생. (웃음)
<모래시계>같은 대작을 또 만나고 싶다, 하는 욕심은 없어요?
고현정: 이거 좀 건방져 보이는 말일 수도 있지만 좋은 작품을 만나서 또 다시 어떤 정점을 맞이하기 보다는 클라이막스 없이 광활한 초원을 계속 달려갔으면 좋겠어요. 그냥 이렇게, 조용히, 오래오래.
“쿨하고 시크한 건 별로 자신이 없어요”
물론 고현정이란 여자의 인생을 생각하자면 그 점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닌데, 이기적인 관객이나 시청자 입장으로는 이 배우가 험난한 길을 헤쳐가서 더 좋은 작품을 만나주길 바라는 게 있어요.
고현정: 물론 저도 그런 맘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욕심을 내면 지금 이 상태를 잃을 것 같아요. 이 편안함. 그걸 얻으려면 뭘 잃어야 하는지 이제는 알거든요, 정말 나에게 무언가를 해야 할 때가 온다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자연스럽게 올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아끼고 기다리나 봐요. 나에게 제일 어울릴 자연스러운 무언가를. 그나저나 너무 나이 먹으면 못하는데. (웃음)
고현정이라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한 지점 같은 게 뭐라고 생각해요?
고현정: 고현정만이 만들 수 있는 고유한 지점. 아, 어렵다. (웃음) 음… 차마 어쩌지도 못하고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 사실 쿨하고 시크한 건 별로 자신이 없어요. 얼굴도 너무 달게 생겼고요. 누군가를 잘 가라고 떠나보내면서도 뒤에서 우는 마음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를 보다가 문득 나는 저런 장면에서 어떨까, 상상을 했던 것 같아요. 상상을 했다는 건 잘하고 싶다는 뜻 아닐까요.
욕심을 내서 좋은 작품을 찾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안 생기나요?.
고현정: 꿰차고 싶진 않아요. 그런 짓까지 하면… 얄밉지 않을까요? 제가 지루하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저는 공평하고 공정한 순간이 안 지루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어떤 찰나, 밸런스가 딱 맞는 순간을, 모두가 딱 좋은 순간이 오는 걸 꿈꾸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사는 건 어때요? 그 어느 때보다 얼굴이 편해 보이긴 해요.
고현정: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결혼도 해봤고, 이혼도 해봤고, 자식도 아들 딸 하나씩 낳은 것도 좋은 것 같고, 현대인의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지병 같은 것도 생겼고. (웃음) 너무 건강한 것보다는 배우에겐 이렇게 골골한 게 멋진 것 같기도 하고. 일도 있고, 친구도 있고, 그리고 이렇게 편하게 뵙고 싶은 분들 만나서 인터뷰도 할 수 있고. 그냥 딱 좋은 것 같은데요. 서른아홉이라는 나이도.
이 나이쯤 되면 내가 어떨 거라고 예전에 생각해본 적 있었어요?
고현정: 어릴 때 엄마 친구 분들이 오셔서 ‘이제 우리가 마흔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생각이 ‘참, 불쌍하다. 곧 죽겠구나…’ 였어요. (웃음) 또 중년배우들이 인터뷰에서 지금 내 나이가 너무 좋다, 하시면 ‘웃기네. 이런 합리화’ 라고 했었죠.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말하고 있는 지금이 아까울 정도로, 오늘, 이 순간이 딱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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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은하 (on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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