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노규민 기자]
‘한국 영화계의 큰 별’ 신성일이 4일, 폐암 투병 중 별세했다. 대중의 관심은 자연스레 아내 엄앵란에게 향했다. 두 사람의 굴곡진 로맨스가 재조명 받고 있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1960년 개봉한 영화 ‘로맨스 빠빠’를 통해 처음 만났다. 신인배우였던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서 막내 아들 역할로 은막에 처음 등장했다. 엄앵란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 엄앵란은 이미 ‘단종애사’를 비롯해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후 신성일과 엄앵란은 ‘특등신부와 삼등신랑’ ‘청춘교실’ ‘가정교사’ ‘말띠여대생’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했다. 특히 1964년작 ‘맨발의 청춘’으로 신성일은 당대 톱배우 자리에 올라섰다.
여러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호감이 깊어졌다. 신성일은 한 매체를 통해 1964년 ‘배신’ 촬영 때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간 신성일과 엄앵란은 1964년 11월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기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천여명이 몰려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초대장이 암거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확연히 다른 생활 습관 탓에 1975년부터 별거했음이 한 방송을 통해 밝혀졌다.
신성일은 2011년 발간한 자서전을 통해 동아방송 아나운서였던 故 김영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털어놨다. 자신의 외도를 공개했지만 오랜 기간 마음고생을 했다.
엄앵란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혼만큼은 하지 않았다. 2011년 SBS ‘좋은아침’에 출연해 “(사람들이) 심심하면 이혼했다고 한다. 신문에 언급한 대로라면 50번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도 있고 저렇게 사는 것도 있지 어떻게 교과서적으로 사느냐”며 “악착같이 죽을 때까지 (신성일과)살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7월 채널A ‘명랑해결단’에서는 “과거 역술인들이 우리 두 사람의 궁합에 대해 제게는 최악이지만 남편에게는 최고라고 했다. 부모님도 결혼을 반대했는데 당시에 신성일에게 푹 빠져 있었기에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는,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의 뒷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궁합이 안 좋다고 해도 부부가 서로 극복하며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고난은 이어졌다. 엄앵란이 갑작스럽게 유방암에 걸려 부분 절제 수술을 받는 등 투병하게 된 것. 20여 년 넘게 집을 나간 신성일이 이를 계기로 돌아와 엄앵란을 간호했다.
이후 신성일도 폐암으로 투병했다.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동지’가 됐다.
올해 3월 방송된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는 신성일을 향한 엄앵란의 진심이 전해졌다. 엄앵란은 신성일을 “내가 책임져야 할 큰아들”이라고 표현하며 “내가 먹여 살려야 하고, 죽을 때까지 VVIP 특실에서 대우받고 돌아가셔야 한다. 작은 방에 병원비도 없어서 돌아가시는 것을 나는 못 본다. 내 남편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또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변하지 않고 의지하는 기둥이다”라고 밝혔다.
신성일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영화인장으로 거행된다. 발인은 오는 6일 예정이다.
노규민 기자 pressgm@tenasia.co.kr
신성일과 엄앵란은 1960년 개봉한 영화 ‘로맨스 빠빠’를 통해 처음 만났다. 신인배우였던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에서 막내 아들 역할로 은막에 처음 등장했다. 엄앵란도 이 영화에 출연했다. 엄앵란은 이미 ‘단종애사’를 비롯해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후 신성일과 엄앵란은 ‘특등신부와 삼등신랑’ ‘청춘교실’ ‘가정교사’ ‘말띠여대생’ ‘맨발의 청춘’ 등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했다. 특히 1964년작 ‘맨발의 청춘’으로 신성일은 당대 톱배우 자리에 올라섰다.
여러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호감이 깊어졌다. 신성일은 한 매체를 통해 1964년 ‘배신’ 촬영 때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사랑을 키워나간 신성일과 엄앵란은 1964년 11월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기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천여명이 몰려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초대장이 암거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확연히 다른 생활 습관 탓에 1975년부터 별거했음이 한 방송을 통해 밝혀졌다.
신성일은 2011년 발간한 자서전을 통해 동아방송 아나운서였던 故 김영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털어놨다. 자신의 외도를 공개했지만 오랜 기간 마음고생을 했다.
엄앵란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혼만큼은 하지 않았다. 2011년 SBS ‘좋은아침’에 출연해 “(사람들이) 심심하면 이혼했다고 한다. 신문에 언급한 대로라면 50번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도 있고 저렇게 사는 것도 있지 어떻게 교과서적으로 사느냐”며 “악착같이 죽을 때까지 (신성일과)살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7월 채널A ‘명랑해결단’에서는 “과거 역술인들이 우리 두 사람의 궁합에 대해 제게는 최악이지만 남편에게는 최고라고 했다. 부모님도 결혼을 반대했는데 당시에 신성일에게 푹 빠져 있었기에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는,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의 뒷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궁합이 안 좋다고 해도 부부가 서로 극복하며 헤쳐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고난은 이어졌다. 엄앵란이 갑작스럽게 유방암에 걸려 부분 절제 수술을 받는 등 투병하게 된 것. 20여 년 넘게 집을 나간 신성일이 이를 계기로 돌아와 엄앵란을 간호했다.
이후 신성일도 폐암으로 투병했다.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의 희로애락이 담긴 삶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동지’가 됐다.
올해 3월 방송된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는 신성일을 향한 엄앵란의 진심이 전해졌다. 엄앵란은 신성일을 “내가 책임져야 할 큰아들”이라고 표현하며 “내가 먹여 살려야 하고, 죽을 때까지 VVIP 특실에서 대우받고 돌아가셔야 한다. 작은 방에 병원비도 없어서 돌아가시는 것을 나는 못 본다. 내 남편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또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변하지 않고 의지하는 기둥이다”라고 밝혔다.
신성일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영화인장으로 거행된다. 발인은 오는 6일 예정이다.
노규민 기자 pressgm@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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