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때 처음 TV 카메라 앞에 섰고, 여덟 살에는 연극 무대에 올랐다. 열아홉 살이 됐을 때는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감독 이해영·이해준)에서 주인공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줘 제27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받았다. 배우 류덕환이 걸어온 길이다. 어떤 작품, 어떤 인물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 덕분에 연기만 하면 호평이 쏟아졌다. 그를 더욱 주목하게 만든 작품은 2010년 OCN 시즌제 드라마 ‘신의 퀴즈'(극본 박재범, 연출 이준형)였다. 2014년 시즌4까지 극 중 한진우 박사 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 12월, 팬들은 육군으로 만기 전역한 류덕환의 ‘무사 귀환’을 반기면서 ‘신의 퀴즈5’를 기대했다. 2년의 공백을 어떤 작품으로 메울까, 이목이 쏠렸다. 류덕환이 선택한 건 최근 종영한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극본 문유석, 연출 곽정환). 극 중 서울중앙지법 민사 제43부 우배석판사 정보왕 역을 맡은 그는 누구보다 유쾌하게 작품에 녹아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의아함을 느낌표로 만들었다.
10. 제대 후 복귀작이라 더 주목받았는데, 부담은 없었습니까? 류덕환 : 작품을 보자마자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담 없이 재미있게 찍었습니다. 캐릭터를 만들 때도 편안했고,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을 만나서 즐거웠어요. 저를 믿고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죠.
10. 판사 역인데 재판을 구경만 했어요.(웃음) 류덕환 : 판사 역할이라고 해서 실제 법정에 가서 재판 과정도 지켜보고 여러 책도 읽으면서 연구를 했는데 말이죠.(웃음) 정보왕은 거의 재판장에 가지를 않아서 ‘내가 왜 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실제로 여덟 차례나 재판을 참관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마치 시장 같기도 했어요. 그래서 민사 재판을 직접 보라고 하신 것 같아요.
10. ‘미스 함무라비’의 어떤 매력에 끌렸나요? 류덕환 : 첫 번째는 ‘이야기’예요. 회마다 다른 에피소드를 다루는데 그게 매력이었어요.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재판장 밖, 일상의 모습은 사실 우리와 다를 게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게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예요. 특히 철없는 면도 있고, 회사 생활을 잘하는 정보왕 역이 흥미로웠죠. 개인적으로는 멜로가 있어서예요.(웃음)
10. 멜로는 만족했습니까? 류덕환 : 여한 없습니다. 하하. 극에서 무거운 사건을 다루고, 예민한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정보왕과 이도연(이엘리야)의 로맨스가 중심은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답답해질 때 해소해주는 정도였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즐겁게 봐주신 것 같아요.
10. 2년 동안 드라마 제작 환경은 달라졌나요? 류덕환 : 체계가 바뀌 건 잘 모르겠는데, 분명히 다뤄야 하는 이야기의 표현법이나 이야기 흐름의 구조는 바뀐 것 같아요. 실제로 바뀐 건지, 제가 오랜만이어서 어색해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초반에는 많이 긴장했거든요. 전역 전에 주위에서 워낙 “제대 후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라고 해서요. 그런데 작품을 시작하면 다른 건 생각할 겨를 없이 그것만 집중해야 해서 적응함에 있어 힘든 건 없었어요.
10. 사전제작이라는 점도 도움이 됐겠죠? 류덕환 : 정말 많았어요. 여유를 가졌고 제작진, 배우들과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미스 함무라비’를 집필한, 현재 판사로 재직 중인 문유석 작가님도 “내가 쓴 글이 어떻게 나오나~” 하면서 촬영장에 자주 오셨어요. 작가님은 대사 하나라도 혹시 저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진 않을까, 우려하면서 “이런 대사를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으셨죠. 덕분에 세세하게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10. 정보왕을 표현할 때 문유석 작가도 참고했습니까? 류덕환 : 정보왕은 오지랖이 넓고 사람을 좋아하고, 주위에 관심이 많고 소문에 재미를 느끼는 친구예요. 누군가 짐을 들고 가는 것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죠. 그 모든 것들이 배려로 나타나요. 문 작가님은 사람 관계에서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인데, 정보왕과 흡사한 부분이 있어요.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서 정보왕 역을 연기한 류덕환. / 조준원 기자 wizard333@
10. ‘미스 함무라비’는 기술적인 장치나 효과 없이,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작품이죠. 배우로서 연기할 때는 어떻게 다른가요? 류덕환 : 지극히 제 생각인데요, 과거 다양한 개그 프로그램들이 유행할 때 짤막한 콩트에서 나오는 유행어가 인기 끌었잖아요. 언제부턴가 전체보다 유행어 같은 짧은 순간이 중요해졌죠. 시청자들도 익숙해져서 찾기 시작했고요. ‘미스 함무라비’의 제작진은 시작부터 잊고 있었던 옛날 좋았던 드라마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드라마의 힘은 이야기 안에서 배역들이 그 인물로 묻어나는 거예요. 작품이 끝난 뒤 특정 키스신이나 OST가 떠오르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았던 예전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멋부리거나 힘을 주지 않아도, 실제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매력적으로 표현됐죠. 저 역시 글에 충실했고요.
10. 복귀작으로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까? 류덕환 : 작품이 잘 돼서 좋은 것보다 사람이 살아가는 작은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어서 크게 만족했어요.
10. 제작발표회 때 ‘군인 티를 벗었다’는 평가를 듣고 싶다고 했죠? 류덕환 : 최근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군 복무 중인 배우 고경표에게서 영상통화가 와 있더군요. 비행기 안이어서 못 받았죠. 그렇게 잠이 들었는데, 다시 입대하는 꿈을 꿨습니다. 하하. 전역 후 한 번도 안꿨는데…(웃음). 정말 공포스럽더군요. 얼마 전 술자리에서도 옆에 앉은 어린 친구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길래 귀가 쫑긋했어요. 아직 티를 못 벗은 것 같습니다.(웃음)
10. 시즌제 드라마인 ‘신의 퀴즈’로 복귀할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도 있었습니다. 류덕환 : 저도 그 생각을 해봤어요. 소중한 작품이니까요.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미지를 오래 갖고 있던 저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준 드라마여서 의미가 큰 작품이죠.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 일기 같은 작품이에요. 군대를 다녀와서 30대가 된 류덕환의 모습을 ‘신의퀴즈’로 남긴다면 좋은 기록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저 혼자 움직인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요.(웃음) 지금도 얘기는 나오고 있고, 제의를 받은 것도 사실이에요. 언젠가 준비되면 할 것 같습니다.
10. ‘천하장사 마돈나’는 볼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드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출연자로서도 다시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류덕환 : 연기는 잘 모르고 할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웃음) ‘천하장사 마돈나’를 찍을 때는 어렸는데도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19살인 제 안에도 정답은 있었겠죠. 당시 갖고 있던 배우관으로 여러 주장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기를 지나니까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웬만하면 너무 고민하지 말자로 바뀌었어요. 시작하기 전에는 고민을 하지만 찍을 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죠. ‘신의퀴즈’를 시작할 때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아역 연기자 이후 드라마를 잘 안 했고, 확실한 믿음도 없었죠. 장르물도 처음 시도하는 것이어서 걱정도, 우려도 컸습니다. 촬영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다 비웠어요. 시즌1은 제멋대로 했어요.(웃음) 호응을 얻은 뒤 시즌제가 되면서는 똑같은 캐릭터와 구도로 간다는 게 부담됐죠. 시청자들은 같은 드라마가 아니라 새로운 걸 원할 텐데 ‘어떻게 새롭게 표현할까?’ 고민했습니다. 박재범 작가를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작가님도 저를 믿어줬고요.
배우 류덕환. / 조준원 기자 wizard333@
10. 그래서인지 ‘신의퀴즈’는 류덕환이 아니면 안된다는 반응이에요. 류덕환 : 시즌3 때 대본에 다음 상황이 쓰여있지 않은 채 괄호에 ‘덕환이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죠. 작가님이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글로 표현되지 않는 건 건 배우인 저에게 맡겨주신 거죠. 시즌제이고 같이 작업을 오래 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없었다면 저는 계속 부담만 갖고 찍었거나, 제풀에 지쳐서 그만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신의퀴즈’를 함께 만든 모든 이들이 부담을 나눠가진 것 같아요.
10.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류덕환 : 20대 때 회사 말도 안 듣고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했어요. 30대가 되고 ‘미스 함무라비’를 선택한 건 드라마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한동안 드라마가 무서울 때가 있었어요. 물론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군 복무 중에 후임인 친구가 저에게 “류덕환 병장님, 나중에 전역하고 TV에서 보면 반가울 것 같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2년 동안 군대에서 최고의 대중들과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이 그간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나 싶더군요. 20대 때 한없이 하고 싶은 것만 했으니까, 이젠 두려워했던 곳에 발을 들여야 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아마 이제부터는 다양한 경험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첫 번째는 이야기가 좋아야 겠죠.
10. 그 후임은 전역 후 연락했나요? 류덕환 : ‘미스 함무라비’를 잘 보고 있다고 생활관에서 다 같이 모여 전화를 했더라고요. “이엘리야 정말 예쁩니까?”라고 묻더군요.(웃음)
10. 다섯 살에 데뷔해 지금까지 한 길로 가고 있는데, 직업 선택의 아쉬움은 없나요? 류덕환 : 장점과 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분명한 건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편하게 연기를 못하겠죠. 어렸을 땐 ‘내 길이 맞나?’ 스스로에게 물을 겨를도 없이 엄마가 시키니까 했어요. 오디션 보러 간 친구를 이기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 촬영할 땐 학교를 안 가서 좋았어요.(웃음) 순수한 시기에 인생의 길이 정해져 버린 느낌이지만, 익숙해져서 하는 건 아니에요. 영화 ‘묻지마 패밀리’를 찍으면서 스스로 길을 정했어요. 빠른 나이에 선택을 빨리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안 좋은 점은 너무 일찍 알아버려서, 제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어릴 때부터 최불암·김수미·김혜자 선생님들과 연기를 했어요. 그때 저에게는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였어요. 10년 가까이 그렇게 지내면서 제가 선택하고 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정답이라고 생각했죠. 그게 가장 후회되는 부분들이에요. 지금, 늦게나마 깨우치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개선해 나가고 싶어요.
10.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네요. 류덕환 : 차기작은 검토 중이에요. 작품 선택의 기준이 바뀐 만큼 그 부분을 기반으로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