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텔레비전을 봤네요.”텔레비전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J 형’에게서 들었다. 음반사를 비롯해 음악과 관련된 여러 회사에서 근무했던 J 형은 텔레비전의 광팬. 나름 음악을 심각하게 듣는다는 이들도 텔레비전을 모르는 경우가 꽤 있다. 텔레비전은 록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명반 1집 〈Marquee Moon〉(1977), 그리고 2집 〈Adventure〉(1978)를 발표하고 돌연 해산했다. 실제 활동기간은 4,5년 남짓. 명반을 남기고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린 밴드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텔레비전의 존재는 팝음악의 명반들을 정리한 한 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낡은 책 한쪽 귀퉁이에 〈Marquee Moon〉에 대한 찬사가 쓰여 있었다. 전설적인 라이브클럽 CBGB를 다룬 한 다큐멘터리에서 텔레비전의 리더 톰 벌레인을 꽤 비중 있게 다룬 것도 봤다. 그렇게 듣게 된 〈Marquee Moon〉에 담긴 음악은 ‘진짜’였다. 1980년대에 태어난 기자에게 〈Marquee Moon〉은 옛 고전영화와 같은 느낌이었다. 1970~80년대에 동시대 음악들을 외국잡지를 통해 실시간으로 접했던 J 형은 텔레비전이 청춘을 함께 한 밴드라고 말했다.
‘TV를 봤네’를 노래한 장기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12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큐레이팅을 맡은 기획공연 ‘얼굴들과 손님들’이 열렸다. 손님은 뉴욕펑크록의 전설 ‘텔레비전’. ‘TV를 봤네’의 가사처럼 모든 관객들이 눈이 시뻘개지도록 록밴드 텔레비전에 열광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소수의 텔레비전 골수팬들, 록 음악을 너무나 좋아해 전설을 확인하고자 온 사람들, 뮤지션들, 그리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팬들까지 약 1,000여 명의 관객들은 텔레비전의 ‘역사적인’ 내한공연을 사이좋게 관람했다.
공연이 확정된 후 텔레비전을 보러 올 관객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내심 걱정이 됐다. 텔레비전은 레드 제플린이나 이글스처럼 인기가 많은 밴드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J 형처럼 젊었을 때부터 텔레비전에 열광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100명? 200명? 하지만 낡은 음반으로 어렵게 접한 록의 거장을 기다리는 것은 필시 즐거운 일이었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보러 온 여성 팬들이 텔레비전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래저래 기대되는 공연이었다.
공연 당일 블루스퀘어에는 예상보다 많은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뮤지션들이 많았고 의외로 20~30대 젊은 층이 대부분이었다. 장기하와 얼굴들도 객석에서 텔레비전의 공연을 봤다. 무대에 등장한 텔레비전은 가벼운 잼 연주를 시작하더니 신곡 ‘The Sea’를 들려줬다. 열변을 토하듯이 노래하는 톰 벌레인은 시작부터 존재감이 대단했다. 두 번째로 히트곡(?) ‘Venus’가 나오자 환호성이 이어졌다. 원곡의 익숙한 기타리프가 나오자 감동이 대단했다. 앨범에서 혈기가 느껴졌던 벌레인의 목소리는 이제 도인과 같은 고고함을 얻은 듯 보였다.
텔레비전은 매 곡마다 상당히 긴 기타 솔로를 들려줬다. 거의 모든 곡에서 노래보다 연주가 길 정도였다. 이들의 연주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즉흥연주에 가까웠다. ‘1880 Or SO’, ‘Glory’에서의 연주는 청자를 최면상태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했다. 톰 벌레인의 기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래 연주를 한 아티스트가 들려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신경질적이고 괴팍한 연주는 가끔은 괴상했고, 가끔은 멋졌다. ‘Prove it’의 기타리프가 나오자 상당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순수하게 텔레비전을 보러 온 팬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J 형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텔레비전의 사운드는 또 다른 기타리스트 지미 립의 정교한 연주를 통해 비로소 완성됐다. 특히 ‘Marquee Queen’은 약 15분 가까운 시간동안 원곡과 거의 유사하게 연주되며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고 갔다. 벌레인과 립은 원곡의 긴 기타솔로에 이어 후반부의 꿈결 같은 아르페지오까지 재현하며 드라마틱한 광경을 연출했다. 도어즈를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일까? 커트 코베인이 죽지 않고 살았으면 이런 라이브를 보여줄까? 지금은 옷가게로 운영된다는 CBGB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텔레비전을 처음 접한 여성 팬들은 어떤 감흥을 얻었을까? 정원석 대중음악평론가는 “록의 영웅을 실제로 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 김밥레코즈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