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name is 김정우
1987년 5월 20일생.
손가락이 긴 편인데, 어릴 때 피아노를 쳐서 그런가 보다. 원래 예술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는데 IMF 이후로 가정 형편상 그게 불가능해졌다.
기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쳤다. 군대를 제대한 사촌 형이 우리 아버지에게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집에서 기타를 잡으신 거다. 옆에서 보다가 그게 재밌어 보여서 나도 덩달아 시작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밴드 샌드페블즈의 창단 멤버였다. 그래서 원래 레코드판을 엄청 많이 갖고 계셨는데 이사를 워낙 많이 다니다 보니 그걸 다 처분해 버리셨다고 한다. 많이 후회하신다. “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걸 다 둘걸. 다시는 안 들을 줄 알았지” 그러시면서.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샀던 앨범은 메탈리카의 . 메탈리카가 진짜 본능을 자극하는 음악인데 톡식의 음악을 할 때도 그런 느낌을 많이 참조하려고 한다.
최고로 좋아하는 밴드는 뮤즈. 듣고 있으면 진짜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쫙 펼쳐져 있는 느낌이 든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노래를 들어도 항상 차갑게 분석적으로 듣기 마련인데, 어릴 때 감성을 자극했던 노래들은 여전히 마냥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뮤즈, 레드핫칠리페퍼스, 카사비안 같은 밴드들.
지금도 실용음악 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 물론 음악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 하더라도 밴드는 계속해야 하니까 직업은 계속 갖고 있으려고 한다.
전에 다른 밴드를 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독선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연습 늦는다고 잔소리도 하고. 그런데 밴드가 해체를 하고 나니까 그런 사소한 감정싸움들이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 연습 좀 늦어도 그냥 밴드 하고 싶고, 음악 하는 게 좋으니까. 여자친구랑 헤어지면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뭐 그런 것처럼. 하하.
여자는…… 늘 연습실에만 있으니까 누굴 만날 기회조차 잘 없다. 슬옹이랑도 같이 하는 얘기라고는 축구 얘기, 밥 뭐 먹을까, 머리 자를 때 됐나, 그런 얘기뿐이다. 아니면 음악 얘기. 오늘도 인터뷰 오면서 슬옹이가 좋아하는 시규어 로스를 같이 들었다.
슬옹이를 처음 음악학원에서 봤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중학생이 드럼을 연주하는 경우가 잘 없었는데, 얘는 너무 잘하는 거다. 학원에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지.
정원영 코치님은 정말 천사다. 항상 “생각해봐” 하시면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과제를 주시는데, 참고할 CD를 건네주기도 하신다. 벌써 10장은 받았을 거다. 선생님 교수실 방에 놀러 가도 “이거 내가 언제 산 앨범인데” 그러면서 좋은 CD를 들려주신다.
평소에 우리에게 코치 같은 존재는 예리 밴드의 한승오 형이다. 내가 슬옹이 나이일 때부터 우리가 연습하는 것, 밴드의 방향을 다듬는 것까지 전방위적으로 돌봐주신 분이다. 지금은 거의 가족 같은 사이다.
브로큰 발렌타인은 우리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밴드다. 열심히 하는 태도 말이다. 사실 흐름이 바뀌면서 이모코어가 비주류가 되었는데, 여전히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음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존경하고 있다.
최근에 슬옹이의 상의 탈의 사진이 유출 되었는데, 그건 아이씨사이다 형들이 대기실 사진을 몰래 찍어서 퍼트린 거다. 지금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데, 우리도 형들 사진을 찍을까 한다.
방송 때문에 이미지가 점점 시크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굳어지고 있는데, 사실 나는 좀 푼수다. 허당이고. 이렇게 말도 많고. 하하하. My name is 김슬옹.
1992년 4월 14일생.
초등학생 때 교회에 나가면서 처음 드럼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내 꿈은 드러머였다. 뭐, 꿈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톡식에서 내 포지션이 드러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 나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하니까.
정우 형을 만나서 톡식을 하기 전까지는 주로 재즈를 연주했다. 제일 처음 산 앨범이 칙 코리아였을 정도니까. 그때는 드럼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스윙, 삼바, 보사노바, 훵크, 록까지 다 연습했었다.
처음 정우 형을 봤을 때는 되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내가 막 “무서운 형이래”하고 얘기하고 다닐 정도였다. 하하하. 나중에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도 음악 고집이 상당해서 남의 말은 잘 안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같이 밴드를 해 보니까 전혀 아니다. 마음이 엄청 열려 있고, 우리는 심지어 내가 기타 리프를 짜고 형이 드럼 패턴을 연구할 정도로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이다.
너무 어려서부터 드럼을 목표로 하다 보니, 처음에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설득으로 결국은 계속 드럼을 칠 수 있게 되었다. 중학생 때는 재즈 드럼 세트를 사 주시기도 하고, 지금은 오히려 “내가 아들에게 배우는 게 있다”고 말 하실 정도로 나를 많이 믿어 주신다.
추석 때 할머니랑 같이 KBS 를 봤는데 내가 우는 장면이 나오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막 같이 우시는 거다. 귀가 안 들리시니까 내가 떨어져서 우는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 두 분이 교회를 다니셔서 ‘은혜 받았다’는 의미로 설명해 드렸더니 그때부터 기뻐하시더라.
그날 운 건, 심사평이 감사한 것도 있었지만 객석에 와 있던 승오 형이랑 눈이 마주쳐서 그만…… 굉장히 일정이 바쁠 때 짬을 내서 우리 무대를 봐 주러 오신 거였는데, 심사위원의 칭찬을 들으면서 형이 눈물을 흘리고 계시더라. 원래 그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형이 아닌데, 그 모습을 보니까 그만 참았던 게 터져 가지고, 아.
16강 대진표를 짤 때, 모두가 (브로큰 발렌타인의 드럼)성산이 형이 8번을 뽑은 걸 알고 있는데 우리가 마지막에 남으니까 정말… 형이 미웠다! 브로큰 발렌타인은 엄청 강팀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승해야 한다. 형들이 우리에게 자리 양보하고 바통 넘겨준 거니까 형들 위해서라도 잘해야지.
한동안 많이 아팠다. 우울증 때문에 고생한 적도 있고, 급성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는 잠잘 때 숨도 못 쉬고 정말 고생을 했었다.
더위에 정말 약하다. 축구를 하면 여름과 겨울에 뛰는 게 완전 다를 정도다.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면 뒤쪽에 조명이 있어서 정말 힘들다. 땀범벅되서 힘들어 죽겠는데, 꼭 체력이 바닥날 쯤이면 코러스를 불러야 한다. 이제 여름이 지나서 슬슬 내가 살아날 때다! 비장의 빨간 재킷을 입을 수 있겠다.
자주 하고 나오는 목걸이는 안산역 지하상가에서 주로 산다. 베트남 여자분이 손수 작업하시는데, 요즘 통 안 나오셔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정우 형한테도 하나 사다 주기로 했는데. 평소에도 액세서리를 좋아해서 모아놓은 것들을 보면 다 내 새끼들 같고 그렇다. 히힛.
정우 형의 기타는 사실 20만 원 정도 하는 모델에 형이 좋아하는 그림을 커스텀 디자인으로 그린 거다. 비싼 기타에는 이렇게 못 하지! 하하하. 너무 톤이 선명하면 그것대로 난감한 지점이 있어서 일부러 소리가 좀 뭉개지는 악기를 쓰는 이유도 있고. 그런데 연주를 할 때마다 조금씩 그림이 지워지고 있다. 이대로도 앤틱해 보이기는 한데, 나중에 우리가 진짜 유명해 지면 기타 회사에서 그림이 안 지워지게 만들어서 형한테 선물해 주지 않을까? 하하.
글. 윤희성 nine@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장경진 three@
1987년 5월 20일생.
손가락이 긴 편인데, 어릴 때 피아노를 쳐서 그런가 보다. 원래 예술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는데 IMF 이후로 가정 형편상 그게 불가능해졌다.
기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쳤다. 군대를 제대한 사촌 형이 우리 아버지에게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집에서 기타를 잡으신 거다. 옆에서 보다가 그게 재밌어 보여서 나도 덩달아 시작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밴드 샌드페블즈의 창단 멤버였다. 그래서 원래 레코드판을 엄청 많이 갖고 계셨는데 이사를 워낙 많이 다니다 보니 그걸 다 처분해 버리셨다고 한다. 많이 후회하신다. “너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걸 다 둘걸. 다시는 안 들을 줄 알았지” 그러시면서.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샀던 앨범은 메탈리카의 . 메탈리카가 진짜 본능을 자극하는 음악인데 톡식의 음악을 할 때도 그런 느낌을 많이 참조하려고 한다.
최고로 좋아하는 밴드는 뮤즈. 듣고 있으면 진짜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쫙 펼쳐져 있는 느낌이 든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노래를 들어도 항상 차갑게 분석적으로 듣기 마련인데, 어릴 때 감성을 자극했던 노래들은 여전히 마냥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뮤즈, 레드핫칠리페퍼스, 카사비안 같은 밴드들.
지금도 실용음악 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 물론 음악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 하더라도 밴드는 계속해야 하니까 직업은 계속 갖고 있으려고 한다.
전에 다른 밴드를 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독선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연습 늦는다고 잔소리도 하고. 그런데 밴드가 해체를 하고 나니까 그런 사소한 감정싸움들이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 연습 좀 늦어도 그냥 밴드 하고 싶고, 음악 하는 게 좋으니까. 여자친구랑 헤어지면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뭐 그런 것처럼. 하하.
여자는…… 늘 연습실에만 있으니까 누굴 만날 기회조차 잘 없다. 슬옹이랑도 같이 하는 얘기라고는 축구 얘기, 밥 뭐 먹을까, 머리 자를 때 됐나, 그런 얘기뿐이다. 아니면 음악 얘기. 오늘도 인터뷰 오면서 슬옹이가 좋아하는 시규어 로스를 같이 들었다.
슬옹이를 처음 음악학원에서 봤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중학생이 드럼을 연주하는 경우가 잘 없었는데, 얘는 너무 잘하는 거다. 학원에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지.
정원영 코치님은 정말 천사다. 항상 “생각해봐” 하시면서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과제를 주시는데, 참고할 CD를 건네주기도 하신다. 벌써 10장은 받았을 거다. 선생님 교수실 방에 놀러 가도 “이거 내가 언제 산 앨범인데” 그러면서 좋은 CD를 들려주신다.
평소에 우리에게 코치 같은 존재는 예리 밴드의 한승오 형이다. 내가 슬옹이 나이일 때부터 우리가 연습하는 것, 밴드의 방향을 다듬는 것까지 전방위적으로 돌봐주신 분이다. 지금은 거의 가족 같은 사이다.
브로큰 발렌타인은 우리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밴드다. 열심히 하는 태도 말이다. 사실 흐름이 바뀌면서 이모코어가 비주류가 되었는데, 여전히 열정을 갖고 열심히 음악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존경하고 있다.
최근에 슬옹이의 상의 탈의 사진이 유출 되었는데, 그건 아이씨사이다 형들이 대기실 사진을 몰래 찍어서 퍼트린 거다. 지금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데, 우리도 형들 사진을 찍을까 한다.
방송 때문에 이미지가 점점 시크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굳어지고 있는데, 사실 나는 좀 푼수다. 허당이고. 이렇게 말도 많고. 하하하. My name is 김슬옹.
1992년 4월 14일생.
초등학생 때 교회에 나가면서 처음 드럼을 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내 꿈은 드러머였다. 뭐, 꿈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톡식에서 내 포지션이 드러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궁극적으로 나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하니까.
정우 형을 만나서 톡식을 하기 전까지는 주로 재즈를 연주했다. 제일 처음 산 앨범이 칙 코리아였을 정도니까. 그때는 드럼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스윙, 삼바, 보사노바, 훵크, 록까지 다 연습했었다.
처음 정우 형을 봤을 때는 되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내가 막 “무서운 형이래”하고 얘기하고 다닐 정도였다. 하하하. 나중에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나서도 음악 고집이 상당해서 남의 말은 잘 안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같이 밴드를 해 보니까 전혀 아니다. 마음이 엄청 열려 있고, 우리는 심지어 내가 기타 리프를 짜고 형이 드럼 패턴을 연구할 정도로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이다.
너무 어려서부터 드럼을 목표로 하다 보니, 처음에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설득으로 결국은 계속 드럼을 칠 수 있게 되었다. 중학생 때는 재즈 드럼 세트를 사 주시기도 하고, 지금은 오히려 “내가 아들에게 배우는 게 있다”고 말 하실 정도로 나를 많이 믿어 주신다.
추석 때 할머니랑 같이 KBS 를 봤는데 내가 우는 장면이 나오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막 같이 우시는 거다. 귀가 안 들리시니까 내가 떨어져서 우는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 두 분이 교회를 다니셔서 ‘은혜 받았다’는 의미로 설명해 드렸더니 그때부터 기뻐하시더라.
그날 운 건, 심사평이 감사한 것도 있었지만 객석에 와 있던 승오 형이랑 눈이 마주쳐서 그만…… 굉장히 일정이 바쁠 때 짬을 내서 우리 무대를 봐 주러 오신 거였는데, 심사위원의 칭찬을 들으면서 형이 눈물을 흘리고 계시더라. 원래 그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형이 아닌데, 그 모습을 보니까 그만 참았던 게 터져 가지고, 아.
16강 대진표를 짤 때, 모두가 (브로큰 발렌타인의 드럼)성산이 형이 8번을 뽑은 걸 알고 있는데 우리가 마지막에 남으니까 정말… 형이 미웠다! 브로큰 발렌타인은 엄청 강팀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승해야 한다. 형들이 우리에게 자리 양보하고 바통 넘겨준 거니까 형들 위해서라도 잘해야지.
한동안 많이 아팠다. 우울증 때문에 고생한 적도 있고, 급성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는 잠잘 때 숨도 못 쉬고 정말 고생을 했었다.
더위에 정말 약하다. 축구를 하면 여름과 겨울에 뛰는 게 완전 다를 정도다.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면 뒤쪽에 조명이 있어서 정말 힘들다. 땀범벅되서 힘들어 죽겠는데, 꼭 체력이 바닥날 쯤이면 코러스를 불러야 한다. 이제 여름이 지나서 슬슬 내가 살아날 때다! 비장의 빨간 재킷을 입을 수 있겠다.
자주 하고 나오는 목걸이는 안산역 지하상가에서 주로 산다. 베트남 여자분이 손수 작업하시는데, 요즘 통 안 나오셔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정우 형한테도 하나 사다 주기로 했는데. 평소에도 액세서리를 좋아해서 모아놓은 것들을 보면 다 내 새끼들 같고 그렇다. 히힛.
정우 형의 기타는 사실 20만 원 정도 하는 모델에 형이 좋아하는 그림을 커스텀 디자인으로 그린 거다. 비싼 기타에는 이렇게 못 하지! 하하하. 너무 톤이 선명하면 그것대로 난감한 지점이 있어서 일부러 소리가 좀 뭉개지는 악기를 쓰는 이유도 있고. 그런데 연주를 할 때마다 조금씩 그림이 지워지고 있다. 이대로도 앤틱해 보이기는 한데, 나중에 우리가 진짜 유명해 지면 기타 회사에서 그림이 안 지워지게 만들어서 형한테 선물해 주지 않을까? 하하.
글. 윤희성 nine@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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