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배우의 연기란 그의 몸과 카메라와 화면이라는 여러 단계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기 마련이지만 간혹 그 물리적 거리를 훌쩍 뛰어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KBS 드라마스페셜 에서 영화감독 준감독을 연기한 엄태구처럼. 준감독은 준비하던 작품들이 줄줄이 엎어지는 가운데 아르바이트 삼아 맡은 전설의 영화 DVD 서플먼트 연출을 통해 기회를 잡아보려는 인물이다. 예술가 특유의 자의식과 허세, 재능을 인정받지 못 하는 불만이 뒤섞인 안 풀리는 영화감독을 말 그대로 물 흐르듯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엄태구에게서 카메라를 겁내지 않는 배우의 유연함이 오롯이 전해졌다.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스페셜 연작시리즈 의 중국첩보지부장 태구 역시 그랬다. 어눌한 연변 사투리와 냉소적인 표정이라는 극단 속에 담아낸 차가운 비열함은 ‘제 2의 하정우’라는 제작진의 평이 우스갯소리가 아닐 만큼 보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며 눈길을 끌었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내 안의 두려움과 싸운다”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화면 속 엄태구는 배우가 안 되었다면 어쩔 뻔 했나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치밀하고 논리적인 해석 이전에 자신과 인물 사이의 간극을 동물적 감각으로 메우는 날 것의 에너지를 지닌 이다. 하지만 직접 대면한 엄태구는 동물은 동물이건만 예상과 조금 달랐다. 요컨대, 호랑이인줄 알았는데 강아지였다. 공손함이 밴 어깨는 누구에게라도 금세 인사를 할 듯 굽어 있고, 카메라 앞에서는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처럼 타고난 배우임을 의심치 않게 했던 서른 살 청년은 “겁이 되게 많다. 현장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데뷔작이었던 영화 을 찍을 때 고작 한 문장을 두고 무려 30번이나 NG를 내며 머리가 새하얘졌고, 연기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지금도 엄태구에게 연기는 “도를 닦는 심정으로 내 안의 두려움과 싸우는” 작업이고, 배우로서 그의 가장 큰 과제는 “평소의 사회적인 나를 내려놓고 연기할 수 있는 나를 올리는 스위치 전환”이다.

그러니 첫 주연을 맡은 드라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독립영화 작업을 하면서 노숙자가 되기도 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거나(), 사채업자에게 신체포기각서를 받아드는()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힘든 역도 연기한 적 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드라마 현장은 그 자체로 부담이었다. “배탈도 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다가 대사를 하면서 깨기도” 할 만큼 힘들었지만 그렇게 인물과 자신의 거리를 확인하고 좁혀가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했다. 준감독이 애타게 찾던 전설의 여배우 고정아(이보희)와 마침내 조우한 그 순간, 엄태구 자신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찡하더라구요. ‘고정아 찾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라는 대사를 하는데, 준감독은 고정아 찾느라 힘들었고 저는 저대로 준감독이 되려고 힘들었는데 그게 똑같아서 되게 재밌고 기분이 좋았어요.”

타고난 호랑이보다 무서운 성실한 하룻강아지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엄태구│‘제 2의 하정우’ 장난이 아닙니다
“좋은 배우 이전에 좋은 사람”이고 싶고, 그 방법 중 하나로 대본을 받으면 이름이 적힌 배우와 스태프 모두를 위해 기도 한다고 수줍은 듯 말하는 엄태구. 그 순박한 얼굴에서는 준감독의 능청도 태구의 서늘함도 찾아볼 수 없다. 그 간극을 뛰어넘는 것은 연습, 그리고 또 연습이다. 엄태구는 지금도 매일같이 연습실을 오가며 “쫄지 않을 수 없다면 적어도 쫄아 있다는 걸 인지할 수는 있어야 하니까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훈련”을 하고 “자다 깨서도 주르르륵 나오듯이, 주기도문 외우듯이” 대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외우고 또 외운다. 그 지난한 훈련 덕에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살아 있고 맛깔 나는 연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는 카메라 앞이 두렵고 다양한 인물을 표현하기에 “연기 근육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배우 엄태구의 앞날엔 걱정보다 기대가 앞선다. 때로는 성실한 하룻강아지가 타고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법이니까.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사진. 이진혁 elev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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