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나는 승민이와 기태의 중간” -1
이제훈│“나는 승민이와 기태의 중간” -1
“나도 날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것 같다.” 이제훈은 스스로 말할 때 꽤 흔하게 쓰는 이 문장이 유난히 강한 설득력을 가지는 이였다. 반투명 종이 너머로도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예의 그 높고 아름다운 코부터 흐릿한 실루엣만으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소한 몸짓, 스물아홉의 남자에게 흔치 않을 부러울 만큼 말간 웃음, 그리고 인터뷰 내내 좀처럼 높아지는 순간이 없이 잔잔한 수면 같던 어투까지 모두 이제훈이었다. 일관된 하나의 형상이 아닌 각 부분, 매 순간의 인상을 쌓아 만들어진 그는 강렬하고 선명한 볼드체가 아니라 굵기도 기울기도 다른 여러 필체로 겹쳐 쓰인 이름 같았다. 다만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고 해내는데 시간이 필요”한 그가 매번 진심의 힘으로 눌러 쓴 것만은 분명하다. 이 인터뷰 역시 이제훈의 그 때 그 순간의 답이다. 하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서 별로 개의치도 않고 후회도 없다”는 그가 들려 준 최선의 “정직함”이기도 하다.

작품을 쉬지 않고 계속 하고 있어서 많이 힘들었겠다.
이제훈: 끝나면 여행 가야지 하면서 참았는데 막상 끝나니 또 밀려 있는 일정들이 있어서 쉽지 않을 것 같다. (웃음) 체력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했지만 정말 하고 싶었고 그래서 선택한 일이니까.

얼마 전 영화 종영 파티도 있었는데.
이제훈: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아서 감독님과 스태프들을 만나는 게 더 기분이 좋았다. 다들 겨울에 촬영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얼굴이 폈더라. 정말 만나고 싶었던 터라 얘기도 많이 했다.

“100% 다 안다면 연기하는 재미가 있을까”
은 촬영 끝난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 아직도 생각이 나나?
이제훈: 그럼. 납뜩이랑 같이 있었던 독서실 앞이나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었던 곳이 창신동이었는데 에서 가영이 지내던 영걸이 공장, 봉숙이 언니 집도 거기였다. 그 때는 촌스러운 90년대 공간으로 보였는데 에서는 좋은 차에 좋은 옷을 입고 활보하게 되니까 되게 재미있고 묘했다.

승민이가 엄마한테 ‘GEUSS’ 티셔츠 빨아달라고 하면서 “엄마는 할 수 있어”라고 했던 게 애드리브였다고. 진중한 이미지라 그런 코미디 감각이 있는지 몰랐다.
이제훈: ‘승민이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했다. 인물에게 감투를 씌어주면 어떤 시도에 대한 겁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이제훈으로서 웃겨 보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은데 배역으로서 빠져들어서 그 상황을 이끌어보라고 하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면서 스스로 웃기기도 했는데 그런 게 내가 연기를 하는 힘인 것 같다.

다른 애드리브도 있나?
이제훈: 서연이 집 앞에서 고백하려고 연습하는 것도. 원래 시나리오의 대사를 숙지하고 갔었는데 막상 하니까 모니터하시는 감독님도 나도 뉘앙스나 표현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독님께서 정말 승민이로서 네가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할지 자유롭게 해보라고 주셔서 “난 더 이상 널 친구로만 대하기엔 내 마음이, 내 가슴이” 라는 애드리브가 나왔다. (웃음)

이용주 감독이 되게 놀란 적이 있다더라. 비 때문에 오래 대기하다가 결국 다른 촬영장에 가는 길에 비가 그쳐서 다시 오게 했더니 또 비가 오고, 모두가 패닉이 되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당신은 연기를 했다고.
이제훈: 스스로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연기하는 게 쉽지 않고 괴로웠다. 어떻게 생각하면 “더는 못 하겠습니다” 하고 미뤄도 다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많은 스태프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할 수밖에 없더라.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갔던 것 같다. 결국 그 장면은 편집이 돼서 아쉬웠지만 그런 의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 하는 모습으로 스태프들에게 조금 더 에너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어떤 작품이나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나?
이제훈: 시나리오를 보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항상 시나리오가 잘 넘어갈 때와 그 인물에 대해서 잘 이해될 때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잘 보이면 선택을 하는 것 같다. 매번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상황에 진솔하게 접근한다고 할까, 어떻게 보였으면 하는 겉모습이 아니라 이 인물이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느끼면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까지도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과 창의적인 발상도 꽤 영향을 준다.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 머리로는 납득이 안 돼도 감정적으로 동조가 될 때도 있지 않나. 어느 쪽이 본인을 더 끌어당기나?
이제훈: 둘 다 해당되는 것 같다. 내가 살아 온 방식과 경험한 인간관계의 폭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시나리오 상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래, 맞아, 나는 이런 경험이 있었어’ 라거나 ‘나는 이럴 것이야’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는 그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보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잘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 빠져들어서 경험을 하게 되면 무엇이 나올까 같은 호기심도 되게 중요한 것 같다. 모든 상황에 있어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100% 다 안다면 연기하는 재미가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고.

“승민이의 행동을 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었다”
이제훈│“나는 승민이와 기태의 중간” -1
이제훈│“나는 승민이와 기태의 중간” -1
승민이는 어땠나? 공대생이고 무스도 대학 가서 처음 봤을 만큼 모범생이었던 그에게서 실제 공대생이었던 당신의 모습을 보았나?
이제훈: 승민이는 사랑이 대체 뭐고 지금 이 감정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그 순간에는 몰랐을 것 같다. ‘아, 그게 내 첫사랑이었겠구나’라고 나중에야 느꼈을 거다. 나도 첫사랑의 경험이 있었고 그 때 어땠었는지 생각하면서 승민이의 행동을 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데 이견이나 불만이 거의 없었다. 딱 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던 게 서연과 재욱의 차를 타고 가다가 내리는 장면이었다. 나로서는 속으로는 되게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저 여기서 내릴게요, 안녕”이라고 하는 걸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승민이라면 그런 것까지 계산하지 못 하고 다친 마음을 표현하면서 도망갔을 거라고 하셔서 스스로 그걸 받아들이고 해내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승민과 서연이 다시 만난 후반부에 대해 10, 20대 관객들은 이해를 못 하거나 설득당하지 않기도 했다. 왜 둘이 잘 되지 않느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는데 관객으로서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나?
이제훈: 되게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그래야만 이 이야기가 정말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는 해피엔딩이나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밝은 모습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런 헤어짐이 분명 아쉽지만 그래서 굉장히 애틋하게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주 감독이 편집하면서 순간 순간 영화 기태의 눈빛이 보여서 덜어내기도 했다더라. 실제 본인은 기태와 승민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나?
이제훈: 중간이다, 중간. (웃음) 촬영하면서 되게 추웠었고 그래서 참기 힘든 순간이 많았는데 한 번은 참지 못 하고 폭발했다. 고백하려고 기다리다가 서연과 재욱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택시 기사한테 어마무시하게 맞는 장면. 승민이로서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로서는 되게 괴로웠던 것 같다. 세 테이크 정도를 흠씬 맞고 나서 컷 소리와 함께 택시를 발로 막 찼다. 억눌림과 분노로.

다들 놀랐겠다.
이제훈: 그 순간 그걸 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 빌린 택시였는데 찌그러져서 나중에 PD님께 괜찮냐고 여쭤봤었다. (웃음) 그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고 여태까지 맡았던 캐릭터에는 내가 항상 반영되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다중이는 아니다. (웃음)

그러고 보면 에서도 참 많이 맞았다. (웃음) 그런데 실제로 맞거나 때린 경험이 많았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제훈: 초등학교 때는 많이 싸웠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조금 덜 싸웠고 고등학교 때는 한 번 정도? 남자들끼리 말로 해결이 안 되고 젊은 혈기에 주먹부터 나가거나 하면서 어렸을 때는 자주 티격태격 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얌전해진 것 같다.

경력에 비해 능숙하고 섬세한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몸을 자연스럽게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댄스 동영상도 봤는데 춤을 잘 춰서 솔직히 놀랐다.
이제훈: 스무 살 때 다녔던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를 들어가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전에 비해서는 덜 추긴 하지만 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몸을 쓰는 것도 연기에 반영이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에서도 주변에서 본 많이 가진 사람이나 젊은 재벌 2세들의 외형적인 모습과 행동을 보면서 걷는 것에 대한 설정을 처음에 되게 뚜렷하게 했었다.

글, 인터뷰. 김희주 기자 fifteen@
인터뷰. 이지혜 sev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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